108화
“무, 무슨 소리신가요! 제, 제…… 저희가 블루멜로우 티를 주문하긴 했지만 레몬이 들어간 건 아무것도……!”
“…….”
그레이스는 그녀를 보며 진짜 딱한 표정을 지었다.
“레몬이 들어간 음료는 저쪽에 진열이 되어 있단다. 그리고 나는 블루멜로우 티에 뭘 넣으면 붉은색이 된다고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아주 잘 알고 있구나.”
앙글레즈 자작 영애는 제 실수를 알고 얼굴이 더더욱 파래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자작 영애를 향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리아가 그제야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그레이스의 앞에 섰다.
“공작 부인, 괜찮으세요?!”
“……너무 어이가 없을 만큼요.”
“결백이 밝혀져서 다행이에요. 괜히 저 때문에 큰일 날까 봐 걱정했어요.”
진심이었는지 아리아는 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꼬옥 안고 다독여 주었다.
“황태자 전하도 상태가 괜찮다고 해요. 나중에 보러 가세요.”
“……네.”
‘그리고 이걸 어떡한담.’
그레이스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앙글레즈 자작 영애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일을 쟤 혼자 했을 리는 없으니.’
휴게실 사용자 명단을 보던 그레이스는 결국 뒤에 있던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가 이런 결단은 잘 못해서요. 혹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건 성녀님도 끼어 있는 문제라, 저 혼자 결정하기도 어렵네요.”
“흠.”
벤자민은 명단을 받고 방긋 웃었다.
“그럼요. 최대한 깔끔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드리지요.”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천사 같았다.
⋆★⋆
“부인, 부인.”
“으음…….”
“부인, 도착했습니다.”
“5분, 10분만…….”
“…….”
“헉.”
그레이스가 눈을 떠 보니 이젠 꽤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어, 언제 잠들었죠?”
“마차에 타자마자 잠드셨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난 후, 진절머리가 난 그레이스는 그냥 빨리 떠나는 걸 택했다. 벤자민도 별로 개의치 않고 그레이스와 함께했다.
“도착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데요?”
“얼마 안 되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깨셨어요.”
그레이스가 마차 밖을 보니 대기한 지 꽤 된 듯한 분위기였다.
“진짜요?”
“네, 정말입니다.”
하지만 벤자민은 시침 뚝 떼고 멀끔하게 웃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레이스는 도착하고 나서 30분은 꼬박 더 잤지만, 그것을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성정상 과하게 미안해할 터였으니 벤자민은 하얀 거짓말을 택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완벽히 깬 것을 확인하고 마차에서 성큼 내려 손을 내밀었다. 이젠 그레이스도 매우 익숙하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한 게 뭐가 있다고 벌써 한밤중이네요.”
“하하, 한 건 많은 것 같긴 합니다만.”
“…….”
“……웃을 일은 아닌 거 같긴 하군요.”
“아뇨, 각하라도 웃으세요.”
그레이스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웃으면 좋은 거지, 싶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보리스 사제는 언제쯤 온다고 하였나요?”
“일정도 저희가 정하면 됩니다. 원하시는 날짜가 있나요?”
“가능한 한 빨리요. 그다음에는 각하와 마도구 협회도 가야 하고요.”
정원에서 본 흐릿한 기억 속, 그레이스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마 사제일 것이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별관의 검은 안개를 하나도 건들면 안 되었다. 그레이스는 잔잔한 얼굴로 별관을 바라보았다.
“…….”
‘이제 힘을 어떻게 쓰는지 대충 알 거 같은데.’
아리아와 합을 맞추며 대충 운용 방법을 깨달았는데, 한동안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별관에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음.’으로 해석하고, 보내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윽.”
“아……! 음, 아, 아프셨습니까?”
압박감에 그레이스가 반응하자 바로 쩔쩔매며 손에 힘을 푼 그는 영 아쉬운 얼굴로 손을 꼬물거리다가 웅얼거렸다.
“……그냥, 부인과 춤도 추지 못한 게 아쉬워서…….”
“…….”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이런 말은 할 줄 몰랐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춤추고 싶으셨어요?”
그레이스가 춤을 추지 않았다는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이 되었던 게 사실은 같이 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건가? 그녀는 ‘그런 거였어?’ 하고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각하, 저랑 춤추고 싶으셨어요?”
“……네, 그러니까 그만 물어보십시오.”
아무래도 두 번이나 확인 사살을 담은 질문을 받으니 민망했는지 벤자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자꾸 주변에서 방해하는 기분입니다.”
‘아, 이건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데.’
벤자민도 저와 비슷했다고 생각하니 썩 나쁘진 않아 그레이스는 슬며시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사실 저도 그 비슷한 생각을 좀 해서요. 각하가 저와 같은 말을 하니까 재밌네요.”
“그래요, 부인이라도 웃으십시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에 그레이스는 ‘허!’ 하며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새침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힐끗 보던 그는 다시금 푸스스 웃어 버렸다.
“각하께 뭐 하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얄미워서 그만둘래요.”
“뭘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축음기가 있나 물어보려고 했어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저의를 바로 깨닫고, 눈이 커다래지며 바로 웃음기를 싹 거두며 안절부절못했다.
“있습니다. 음악도 당연히 종류별로 다 있고요.”
사실 벤자민이 한 행동은 놀린 축도 아니라, 그레이스가 심술부릴 것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괜히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좋아요.”
“……!”
어째 환해진 낯의 벤자민에게서 귀와 꼬리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
공작저의 축음기는 역시나 평범한 게 아니라 마도구가 장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음악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었고, 음질도 탁월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자작 영애였을 때 거기에도 축음기가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 잡은 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렇게 좋은 건 아니었고요. 그래도 역사가 깊고 잘 관리된 거라서 판다면 최소 100만 젠은 될 거라고 할 만큼 귀한 거였어요.”
“그래도 당신은 그걸 좋아해서 팔지 말자고 반대했겠군요.”
“네, 그래서 제가 공작가로 오기 전까지는 팔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번에 방문했을 땐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으니, 팔렸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함을 느꼈다.
‘아마 그렇게 팔아서 갚고 남은 빚이 그쯤이었던 거겠지.’
“이것만큼 음질이 좋진 않지만, 깊고 좋아서 각하께서도 꽤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 분명 저도 좋아했을 겁니다.”
그레이스는 들어 본 적도 없으면서 냉큼 긍정하는 벤자민을 보며 웃어 버렸다.
“참, 각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오랜만에 본관에 들어온 그레이스는 이 내부에 검은 연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보리스 사제가 공작저를 방문할 때까지 본관에 머물러도 될까요?”
“평생 머물러도 됩니다.”
“……예?”
“아니, 큼.”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부부였으니 문제가 없는 이상, 같이 지내는 게 보통이긴 했다.
하지만 벤자민은 괜스레 민망해하며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별관보다는 본관이 더, 무슨 일이 있으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그러잖습니까.”
“그야 그렇죠.”
“네, 그리고 또 정원은 본관 쪽이 더 넓게 잘 보입니다.”
그가 어필하는 요소가 묘하게 하찮고 귀여웠다.
‘검은 연기를 없애면 사라진 기억이 떠오르는 거 같아.’
그냥 별관을 봉쇄하고 본관으로 아예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검은 연기의 원천을 없앨 기회를 놓치게 된다.
“보리스 사제가 오기 전까지만 본관에서 지내고, 그 뒤에 잠시 별관에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오래 지냈다 보니 정리할 게 있어서요.”
“……! 네, 그것도 괜찮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벤자민은 그것도 좋다며 바로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그녀를 이끌었다.
“부인의 방은 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관에 내 방도 따로 있구나.’
그레이스는 조용히 끄덕이며 벤자민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별관 집사에게는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불편한 일 없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고맙긴요, 당연한 일입니다.”
벤자민이 안내해 준 방은 그레이스의 기억에는 없는 곳이었지만 어쩐지 익숙했다.
‘언젠가 떠오를 기억으로 보게 될 장소려나.’
따스하고,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이곳은 정말 매일 정돈하는지 먼지 냄새 하나 나지 않았다.
‘난 한 번도 오지 않았는데도.’
내부를 둘러보던 그레이스는 잠시 후, 하녀들이 가져온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솔솔 몰려왔다.
별관에서 들던 잠과 달리 햇살 속에 누운 것 같이 편안한 감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챙겨 온 그 종이…… 확인해야 하는데.’
내일 일어나서 해야지. 무거운 정신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