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무슨 일이지?’
그레이스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상황을 설명해 줄 만한 그녀의 우호적인 무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아가 홀에 있다면 당연하게 사람이 많은 곳에 있을 테니까.
“……!”
드디어 발견한 아리아의 드레스는 오묘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서 지저분해져 있었다. 누가 음료수를 끼얹은 듯한 모양새였다.
‘음료수…….’
그레이스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굴려 벤자민이 들고 있는 잔을 보았다. 우연찮게도 그녀가 기사에게 시켜 가져온 잔에 담긴 내용물이 딱 저 색이었다.
그때 한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매섭고 큰지, 연회장의 모두가 놓칠 수 없었다.
“제가 봤어요!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 분명 저 색의 음료가 담긴 잔을 들고 가는 걸요!”
그 목소리는 그레이스를 겨냥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남편까지 대동한 공작 부인을 범인이라며 몰아붙이는 게 정상인 건가, 그레이스는 의문이 들었으나 나름 납득이 가는 점이 있었다.
이건 원래 원작에서 일어날 이벤트와 흡사했다.
그레이스가 저지했으니, 그레이스에게 일어난 것이다. 적어도 그레이스는 이렇게 생각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저 영애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하…….’
그레이스는 분명 자신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이마까지 박살 날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난 아리아를 건들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날 음해한다.’
“…….”
보지 않아도 그레이스는 옆에 서 있는 벤자민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이 자리는 황실이 친히 서부가 정화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벤자민이 큰 소리를 낸다면 황실의 체면에 손상을 내는 꼴이다.
그러나 홀 내가 계속 술렁거리자, 그도 계속 참는 것은 무리였는지 그가 들고 있던 잔에서 빠직 소리가 났다.
‘……빠직?’
그레이스가 힐끗, 하고 벤자민이 들고 있던 잔을 훔쳐보았다. 금이 가 있었다.
‘살벌하다…….’
“충신의 자질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 보여 기쁩니다.”
벤자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본인의 생각을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충신이란 역사적으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군주를 위해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들이다.
즉, 벤자민은 지금 ‘죽을 각오 하고 나불거리는 거겠죠?’ 라고 그레이스에게만 들리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이, 일단 제가 대화를 해 볼게요.”
벤자민이 차분함을 유지하는 이유가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였다면, 분노를 참는 이유는 그레이스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권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리아는 안절부절못하며 모두에게 그레이스가 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유는,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필 휴게실에서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잠시 아리아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기에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원작의 전개를 피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꼴이네.’
이럴 때 보면 그레이스는 성녀의 지위라는 게 얼마나 유명무실한지 느껴졌다. 아리아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 주는 이가 이렇게나 없다니.
‘그나마 보리스라도 있었으면 들어 줬으려나.’
그레이스에겐 한없이 짜증 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리아를 위하는 사람이기는 했으니까.
“내 지시를 받은 펠튼 공작가 측 기사가 이 음료로 성녀의 의상을 더럽혔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저, 정황상 그렇죠!”
아리아의 옷에 대해 가장 언성을 높이던 영애가 내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이유는, 없는데도?”
“부인께서 오늘 입은 드레스는 성녀님과 디자인이 일치하여 모두가 부인을 비웃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지요!”
그레이스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저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술렁거리는 것도 어이가 없었고, 숨이 막히기도 했으며,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탓이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벤자민이 서 있었다. 그는 언제든 그레이스가 요청하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벤자민을 보자 약간 숨이 트였다.
‘괜찮아.’
화를 낼 힘도 없는 그레이스를 대신해 늘 온화함 속에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다정한 사람.
그가 제 뒤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홀 내에 음료 세례를 받아야 할 분들이 몇이나 될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군.”
“……!”
“유행하는 디자인이라 거의 똑같은 옷을 입고 온 이들이 꽤 되는데 말이야. 그럼 곧 다들 옷이 넝마가 될 예정인가?”
그레이스가 주변 이들의 옷을 쓱 훑어보았다. 조금 전까지 한 영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또, 같은 디자인이라고 했으나 내 옷을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텐데…… 애석한 일이군.”
그레이스는 제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대들은 이번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 거야. 직물 공방의 파렴치한 작태를 제국의 대귀족으로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침묵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르시아국과 원단 교역에 합의하는 데 성공했고, 그 상징으로서 선물받은 원단으로 지은 옷이네.”
그레이스가 입은 드레스는 피시언족이 지은 원단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개처럼 반짝이는 것이 인상적인 천이었다.
“나는 그들의 천으로 제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드레스를 만들었어. 이는 앞으로도 제국이 건재할 것과 아르시아와의 깊은 우호를 의미하는데, 내가 성녀와 디자인이 겹친다는 이유로 수치스러워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런 이유 같은 거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냥 절대 겹치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을 골랐는데, 하필 겹쳐 버렸고, 그래도 터지지 않을 것 같았던 사건이 터져 버려서…… 지금 즉석에서 사유를 짜내고 있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반박할 거리는 있었겠지만,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그레이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카드를 꺼냈다.
“펠튼 공작가가 그렇게 우습고 하찮은 존재였나?”
그러자 서늘한 침묵이 돌았다.
그레이스가 하도 좋은 가십거리였기에 다들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하자, 다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펠튼 공작 부인이었다.
황실에 여성이 없었기에, 성녀와 쌍으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고귀한 여성이었다. 만약 그레이스가 좀 더 독한 성정이었으면 지금 당장 모두의 무릎을 꿇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토, 통했나?’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뱉은 장본인은 속으로 발발 떨고 있었다. 지금 숨을 잘못 쉬었다간 심장을 뱉을 것만 같았다.
침묵이 돌긴 하는데, 자신을 향한 반감은 그리 느껴지지 않아 그레이스는 조금 안심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 주스는…….”
“그, 그래요! 시종한테 물어보니 그 주스를 가져간 사람은 공작 부인밖에 없다고!!”
“영애, 지금 내 부인께서 말하고 있는데 예의가 없군.”
이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말을 뚝 끊은 영애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온화한 말투였지만 단단한 경고가 담겨 있는 어조였다.
그레이스가 그를 바라보자 생긋, 하고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정말 내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든든하네.’
다시금 앞으로 고개를 바로 한 그녀는 구석에 서 있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황실 연회장에 준비되어 있는 플래터의 구성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은 잠시 뒤, 마련되어 있던 주스의 종류를 읊어 주었다. 레모네이드, 각종 와인, 온갖 종류의 과일 주스 등등…… 그러나 그중 딱히 특이한 건 없었다.
‘……흠.’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가지 떠올렸다.
“찻잎.”
“예?”
“휴게실 사용 명단을 전부 확인하고, 그 시간마다 마신 차의 종류를 확인해도 되겠나? 혹은, 티 포트나 티 세트를 인원수 대비로 정리한 목록이라거나.”
클레타와 티백 사업을 준비하며 사업성을 위해 해 볼까 할까 하다가 그 차밭에는 없었기에 포기했던 상품이 있다.
시종은 고민하다가, 시종장의 허가를 받고 서둘러 명단을 대령했다.
‘당연하지만 거울의 방 근처 명단은 비어 있네.’
하지만 그곳엔 범인은 없을 테니 일단 그레이스는 다른 곳을 쑥 훑다가, 딱 한 군데 방을 가리켰다.
“여기 있군.”
블루멜로우. 레몬을 넣으면 화학 반응으로 인해 붉은색으로 바뀌는 차였다.
‘이 나라에서는 아직 널리 퍼진 지식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거지.’
“마침 시각도 딱 맞고, 이 휴게실을 쓴 사람을 찾아서…… 앙글레즈 자작가가 어디지?”
그레이스가 명단에 적힌 대표자의 이름을 읊자 조금 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영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너니…….’
그레이스는 약간 애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려 보이는데 왜 그랬어…….’
그래,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 어릴 때는 가끔 실수도 저지르고 그럴 수 있다. 근데 실수의 스케일이 좀 달랐을 뿐이다.
하필 성녀인 아리아한테 이유 모를 화풀이를 했는데, 그레이스에게 누명을 씌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