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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6)화 (106/131)
  • 106화

    그레이스는 부러 아리아와 거리감을 유지한 채 그들의 시선을 관찰했다.

    아리아와 그레이스가 대화를 나눌 때면 다른 무리뿐 아니라 신전 측 사람들의 시선도 진하게 느껴졌다.

    ‘역시.’

    하지만 그 외에도 잘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면 ‘드레스’ 이슈였다.

    만약 유행하는 디자인이 겹치는 것이었으면 유행이니 묻어갈 수 있지만, 하필 둘의 복식은 유행을 따르지 않는 고풍적인 양식이었다.

    그레이스는 이걸 빨리 처리하고 휴게실을 사용한 명단도 확인하고 벤자민을 찾아가야 했다.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근데 애초에 드레스가 겹쳐서 비웃음을 산 사람이 아리아한테 못된 짓을 해서 문제가 된 거 아니었나?’

    그레이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럼 자신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내가 갑자기 미쳐서 아리아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레이스는 속이 후련해졌다. 그렇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는 있었다.

    “아리아 님, 제가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어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그레이스가 준비한 계획을 이행할 차례였다.

    샤를 후작가 무리에 아리아를 소개시켜 주기.

    친구라는 말에 아리아는 꽤 기대가 되는 기색이었다. 황실 시종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이미 휴게실 하나를 빌려 자리 잡고 있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네.’

    파트너도 없이 돌아와 홀에 머물며 이상한 시선을 받느니, 휴게실로 가는 쪽이 낫다.

    ‘나야 아리아를 맡기고 벤자민을 보러 간다고 하면 다들 납득할 테고.’

    벤자민을 보러 가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보러 가는 김에 다른 휴게실 사용 명단도 볼 뿐이었지.

    아리아를 이끌고 샤를 소후작 부인이 있는 휴게실로 가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머, 부인!”

    “성녀님도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아리아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가 티타임을 즐기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와 산책을 하던 중 헤어져 혼자 걷다 길을 잃었는데 성녀님과 마주쳐서요. 성녀님 덕에 안으로 들어왔는데 혹시 잠시 성녀님과 시간을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야 영광이죠!”

    그레이스는 지금 홀에 아리아를 혼자 두는 것보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들 틈에 아리아를 두고, 아리아의 편을 만들어 주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저는 그럼 안심하고 각하를 찾으러 갈게요. 각하께서 저를 찾고 계실 거라서요.”

    “두 분께서는 정말 사이가 좋으신 거 같아요.”

    “저도 나중에 꼭 저런 부부 생활을 하고 싶네요…….”

    물론 그레이스와 벤자민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나,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파묻은 채로 그레이스는 입꼬리만 슬며시 올린 채 밖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아리아를 향한 각종 칭찬이나 찬양이 들려왔다.

    “성녀님, 외모는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역시 성녀님께서도 ‘지지 않는 꽃’ 상품을 사용하시는지.”

    “예전부터…….”

    끼익.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낭랑한 목소리가 끊기고, 복도에는 침묵이 돌았다. 눈 아플 만큼 화려한 복도와 달리 고요한 주변이 언발란스했다.

    “마님.”

    밖에 대기하고 있던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현재 황태자 전하의 방에 계십니다.”

    펠튼 공작가의 기사는 펠튼 공작가를 지키나, 1순위로 벤자민의 명을 따랐다. 만약 벤자민이 자신의 거처를 비밀로 하라고 했으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그녀의 물음에 솔직히 답한다는 것은 안내를 부탁하면 순순히 응할 것을 의미했다.

    “그럼 가기 전에 음료가 필요하겠구나. 시종을 시키면 말이 돌 테니 네가 가져와줄 수 있겠니?”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레이스의 명을 군말 없이 이행하러 떠났다. 마침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레이스는 재빨리 거울의 방 쪽으로 향했다.

    ‘……지금도 아무도 없어.’

    거울의 방은 역대 황족의 초상화가 걸린 고귀한 장소였다. 보통 그런 장소는 지키는 이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까지도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이상해.’

    오늘은 모든 방문자에게 거울의 방이 개방된 만큼, 이렇게 조용할 순 없었다.

    그레이스는 근처에 있던 휴게실 앞에 붙어 있던 카드에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빈 카드를 한 장 뜯어 소매 안에 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가 없다면 시종이라도 지키고 있는 게 정상인데.’

    아까 들렀을 때 아무도 없었던 게 우연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거울의 방 내부로 들어서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실물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그는 펠튼 공작 부부의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누구지?’

    새까만 머리카락에 고혹적인 눈매,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벤자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를 보고 잘생겼다는 기분보다는 어째 불쾌한 기분만 들었다.

    “전에 보내드렸던 선물이 마음에 드셨길 바랍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아.”

    그는 그제야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저는 제이드 바이먼이라고 합니다. 자르테 공작위를 황제 폐하께 하사받았죠.”

    “……!”

    “애석하게도 저는 거울의 방에 초상화가 올라가지도 않았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니 부인께서 절 모르시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저 사람이 자르테 공작이구나.’

    원작에서 비중이 그레이스만큼은 아니지만 적은 인물. 하지만, 그레이스가 다르게 행동하자 원작과 다른 행보를 보인 자.

    그레이스는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 어색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공작께서 지원해 주신 물자 덕분에 순조롭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요. 이 모든 것이 제국을 위한 일 아닙니까.”

    “예, 이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인지 공작님께서 지켈 남작령에 계셔서 다행이었어요.”

    자르테 공작이 그때 마침 지켈 남작령에 있었다는 것도 수상쩍었다.

    ‘지켈 남작령은 원래 아르델 백작령을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자르테 공작이랑은 교류하고 있었다고?’

    그런 자르테 공작이 아르델 백작령의 사정을 진짜 모르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약제사 연합을 운영하고 있는 그가 그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켈 남작령에 있었다는 건, 남작령을 운영하고 있던 대리 영주와 적게라도 교류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자르테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것이지요. 은총은 늘 옳은 자를 위해 내려집니다.”

    ‘그러고 보니 자르테 공작을 호위한 우리 쪽 기사는 어딜 갔지?’

    돌아와서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물론 그게 그레이스에게까지 보고되어야 할 의무는 없었으나, 지금 그를 보니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그럼 이번에 공작께서 선을 베푼 만큼 신께서 은총을 내리시겠군요.”

    그레이스는 빨리 자리를 뜨기 위해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후에 더 좋은 자리가 마련되길 바라며, 먼저 떠나겠습니다.”

    “부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은 무슨.’

    예의상 하는 인사였다.

    그레이스는 급하게 몸을 뒤로 빼, 밖으로 나섰다. 복도로 나가자 음료를 들고 있는 기사가 복도에서 급하게 걸으며 그녀를 찾는 게 느껴졌다.

    “마님……!”

    “미안하네, 잠시 초상화를 보느라.”

    “황실 내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 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대가 큰일이 났겠지.”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닙니다.”

    그레이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기사에게 공작 각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

    “각하, 왜 밖에 나와 계세요?”

    그레이스가 벤자민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방이 아니라 복도 쪽에 나와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약간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살펴보다가 그레이스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부인이 올 것을 알고 나와 있었나 봅니다.”

    “그런 말은 말고요. 황태자 전하의 상태가 심각한가요?”

    “아뇨, 상처는 흉터도 남지 않고 잘 아물었습니다. 다만 충격이 심했던 건지, 숨소리가 조금 옅어 걱정이군요.”

    “……?”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걸 보아 경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원의 말로는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니 제 기우일 수도 있고요.”

    실베스터를 어릴 때부터 보았다더니, 벤자민은 걱정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당장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게 소문이 났으면 연회의 본질이 흐려졌을 테니까요.”

    “그럼요.”

    그레이스는 설핏 미소 지으며, 음료 한 잔을 벤자민에게 건넸다.

    “수고 많았어요. 그럼 연회장으로 돌아가요.”

    “……오늘 밤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군요.”

    “왜요?”

    “내일이 되면 또 찾아봐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요.”

    “아하하.”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벤자민은 나름 진심을 담아 투덜거린 것인데, 제 부인이 제 투정에 웃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작게 웃었다.

    “저의 에스코트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벤자민의 에스코트를 받아 다시 홀로 돌아갔을 때, 내부는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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