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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5)화 (105/131)
  • 105화

    “……누군가가 제 생각을 믿고 따라 준다는 건 정말 충만한 일이더라고요.”

    아리아가 그레이스를 믿어야 할 이유 따위 없었는데, 어쩌면 제 명예를 깎을지도 모를 요구를 전부 믿고 행해 준 것이 그레이스는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래, 그건 달라졌어.’

    실베스터가 부상을 입고, 아리아에게 역경이 찾아온 전개는 바꾸지 못했으나 자수 대회의 이야기는 바꾸었다.

    그레이스가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번 암살 건이 운이 안 좋았던 거지, 더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이제 소설 내에서 나오지 않은 정보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해도 그때마다 원작에는 없던 그레이스가 끼어 있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소설과는 다르다는 증거였다.

    그레이스는 옆에 앉아 있던 벤자민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금 맞잡은 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리아 님, 한 번만 더 시도해 봐요. 실패하면 각하께서 어떻게든 도와주실 거예요.”

    그레이스의 말에 아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게 떨리는 손에는 유약하지만 강인한 힘이 실려 있었다.

    “저, 저를 이렇게 도와주겠다고 한…… 분들은 여러분이 처음이에요.”

    “…….”

    “그, 그러니까…… 실비를 빼고요.”

    물기 어린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는 그게…… 너무 고맙고, 행복하네요…….”

    아리아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성녀였다. 그녀도 당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따금 혼자만의 시간이 생길 때면 외로움을 느끼고는 했다.

    유일한 성녀라는 데 대한 부담감이 존재했다.

    지금 이 순간, 실베스터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닥쳐서도, 울면서도 누군가를 빨리 찾으러 가지 못한 이유에는 아마 자신의 성녀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면 이제까지의 호의가 사라질까 두려웠던 탓도 있었을 터였다.

    그레이스는 아리아가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마냥 행복하고 선한 캐릭터가 아님을 새삼 느꼈다.

    주변에 의하여 그렇게 만들어지고 성장한 이였지, 그녀도 주변의 상황에 따라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이 있을 곳을 찾고자 했다.

    “…….”

    “어?”

    둘은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로 인해 약간의 행복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에 대한 안심과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것에 대한 행복.

    이 불안하고 무거운 공기 속, 오히려 그런 상황이었기에 안도감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우린 서로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도와주겠구나 하는 믿음이.

    그 믿음은 두 가지 빛의 형태로 어우러져 나왔다.

    황금색과 미약한 청록색의 빛은 각자 누구의 것인지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였다.

    “……보여요?”

    멍하니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를 향해 아리아가 물었다.

    빛은 서서히 실베스터에게 스며들었고, 이내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네.”

    그레이스는 멍한 얼굴로 긍정했다. 이 빛은 아리아의 눈에도 보이는 듯했다.

    ‘성력에 색이 있다는 건 소설에선 묘사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아리아는 힐끔,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벤자민은 둘의 대화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공작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실비를 황실 내로 데려가 줄 수 있을까요? 금방 뒤따라갈게요. 치료가 늦어진 만큼, 상태를 확인하기도 해야 하고요.”

    아리아가 실베스터와 밖으로 나가는 걸 목격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실베스터는 충격의 여파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이 중에서 황실 내부 사정에 가장 밝은 벤자민이 몰래 실베스터를 빼돌리는 게 나았다.

    “제가 길을 잃어 아리아 님께서 안내해 주었다고 할게요.”

    “……그럼, 그러도록 하죠.”

    벤자민은 실베스터를 들어 올리다가 잠시 멈칫하곤, 다시 추슬렀다. 그러곤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혹시 모르니 기사를 부르겠습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지 말고, 빨리 오세요.”

    “당연하죠.”

    벤자민은 그래도 영 걱정이 되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아리아가 주변을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든 신성력이 빛으로 보이는 건 아니에요.”

    그레이스 또한 그건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서부 지역에 있을 때 사제들이 힘을 쓰는 장면을 많이 봤지만 그런 빛 알갱이를 매번 보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 빛은 보통 영혼의 색을 띠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저희의 색이 다른 건가요?”

    “네, 또…….”

    아리아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까지 공작 부인께서 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

    “공작 부인께서는 저와 같은 성…….”

    그레이스는 아리아가 말을 끝내기 전에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내, 내가 왜 막았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아리아는 그레이스 또한 성녀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리아의 당황한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레이스는 그녀의 입을 막은 채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

    “성녀는 늘 딱 한 명뿐이잖아요.”

    이건 절대적인 설정이다. 그레이스가 원작에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 ‘변수’가 어떻게 다가올지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 원작의 그레이스가 성녀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는데?’

    그레이스는 눈을 굴리며 머리를 바삐 굴렸다.

    “……아.”

    ‘행복.’

    성녀의 힘은 행복을 느껴야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원작 속 그레이스 펠튼은 지독한 우울을 겪었다.

    그녀가 행복할 수 있는 시기는 없었다.

    ‘아냐, 원작의 그레이스는 성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자.’

    지금의 그레이스가 ‘빙의자’라서 성녀가 되었을 가능성.

    그래서 원작과 달리 그레이스가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런 이야기까지 듣게 된 것이다.

    그레이스는 애써 진정하며 아리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 냈다.

    “저번에 드렸던 펜듈럼을 기억하시나요?”

    아리아는 그레이스가 조금 전의 주제를 다시금 꺼내는 것은 꺼릴 것이라 예상하고 다른 이야기를 말했다.

    “아, 네.”

    그레이스는 차마 그것을 깨 먹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끄덕였다.

    “그건 사실 신성한 돌의 일부로 만든 거예요. 신전에 있던 조각상의 일부죠. 그리고, 그건 신성력을 증폭시키는 힘도 가지고 있어서…… 신전 내에서는 심한 오염 지역에 갈 때 가져가는 부적으로도 쓰여요.”

    ‘아, 그래서 나한테 준 거였구나.’

    아리아가 그것을 갖고 있던 이유, 그리고 자신에게 그걸 준 이유 둘 다 바로 이해가 되었다. 서부 오염 지역이었으니까 아무리 성녀더라도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누군가가 주었을 테고 아리아는 그레이스의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 펜듈럼을 준 것이다.

    벤자민이 부른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 둘을 호위하기 위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조명이 부서져 전하께서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희가 황실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레이스는 호위를 받으며 부서진 잔해를 훑었다.

    “마도구인가요?”

    “네, 조명 마도구입니다. 후에 마도구 연합 측의 사람도 부를 예정입니다.”

    마도구는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고, 황실에 납품되는 것은 불량품이 없도록 몇 번이고 검수한다. 그런 만큼 갑자기 폭주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암살 미수로 수사가 들어간 거구나.’

    그레이스는 전개상 이런 일이 터지면 오히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가십지에 별로 실리지도 않겠거니 싶었다.

    ‘물론 그전에 홀에 들어가면 신경 쓸 게 있지만.’

    실베스터는 쓰러졌지만, 그와 별개로 아리아와 그레이스는 연회장으로 입장해야 한다. 넷 다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엔 너무나 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곧 온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그레이스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딱 하나.

    아리아와 그레이스가 연회 홀로 동시에 입장하자 노골적으로 비교하는 시선들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된다 이거지.’

    아리아가 소설과 다른 의상을 입고 온 바람에 그 배역이 그레이스에게 배당되어 버렸다.

    평소라면 아리아의 주변을 에워쌀 신전 사람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떨어졌겠지만, 황실 행사에서는 사제가 그리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귀족가의 기사 또한 가문당 허용된 인원이 있었고, 제아무리 힘이 막강해지고 있는 신전이라고 한들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레이스와 아리아가 나란히 있는 것을 다소 흥미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서 있으니까 서부에서는 신전이 유독 아리아랑 나를 떨어트리려고 했단 걸 알겠네.’

    황실 연회에 참석하는 사제들은 성녀를 제외하면 거의 다 유사시를 위해 대기 상태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닌 척하며 그레이스와 아리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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