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4)화 (104/131)

104화

“아리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 공작님……!”

그레이스는 눈앞의 상황을 목도하자, 소설 내에서 서술된 ‘갑작스러운 사고’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모, 모르겠어요. 시, 실비…… 황태자 전하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 있던 조각상이 폭발을, 그래서 저를 감싸다가…….”

원작에서는 암살자의 소행이라고 밝혀졌다.

‘그 암살자를 누가 사주했더라. 진짜 복선 하나도 없는 뜬금없는 엑스트라였는데…….’

이 에피소드는 아리아가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다. 이 소설은 정말 주인공의, 주인공을 위한, 주인공에 의한 행복한 꽃길 이야기였음에도 아주 가끔 시련이 필요하긴 했으니까.

그레이스는 새삼 이렇게 내용을 떠올려 보면, ‘성녀의 소원은 망작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 그런데…… 치, 치료가 안 되어서…….”

아리아는 눈물로 얼룩진 채, 실베스터의 상처 부위를 꽉 압박하고 있었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성력이 나오질, 않아요.”

성녀의 성력이란 당연스러운 이치처럼 느껴지기 쉬웠다. 그것은 축복과도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그레이스는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면, 성녀의 성력이야말로 유지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싶어졌다.

‘행복할수록 강해지는 성력이라니, 조금이라도 불행하면 성력이 약해진다는 거잖아.’

그 결과가 지금의 아리아였다.

평소 아리아는 구휼을 하러 가거나 빈민가에 갈 때면 괴롭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며 성력을 쓴다고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특별한 기억도 하나 없고, 가족도 없었기에 어떠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 꽤 특별한 행위였다.

그런 아리아에게 실베스터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을지. 그리고 그 특별한 존재가 난생처음으로 자신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 어떡하죠? 아무나 좀 불러 주세요…….”

벤자민은 매우 난처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여기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모두가 이 광경을 보게 되고 소문날 수밖에 없었다.

성녀 아리아의 힘에 제약이 있다는 것이 제국, 그리고 타국에까지 퍼지게 되면 이는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

‘사실 제국뿐 아니라, 아리아한테도 위험해.’

아리아는 성녀라는 것 외에는 큰 강점이 없는 여성이었다. 그나마 예쁘다는 점? 그러나 아무런 권력이 없는 여성이 예쁘다고 해 봤자, 그리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아리아의 약점이 알려지면 세상이 그녀에게 지금까지처럼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리아도 위태로워지고, 또다시 그녀의 성력이 약해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지금 부를 수 있는 사제가 근처에 있을까요?”

한참 동안 입을 달싹이던 벤자민이 겨우 꺼낸 말이 이것이다.

‘아니, 사제도 위험해.’

그레이스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사제가 알게 되면 신전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아리아를 향한 호감이 성녀를 향한 것이라면, 신전 역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다분했다.

원래라면 아리아 혼자 극복해야 할 장면이었으나, 이미 그레이스가 개입함으로써 많은 전개가 뒤틀렸다.

그레이스가 이 장면에 끼어들려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서부 오염 사태에 그레이스가 참가해 존재하지 않던 이벤트가 생겼고, 아리아는 직물 공방 파업 사건에서 활약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리아는 그간 각성할 기회가 없었기에 지금 당장 실베스터를 위해 힘을 쓸 기력이 없다는 말이 옳았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아리아의 근처로 다가갔다.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고, 실베스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고, 공작 부인.”

아리아가 벌벌 떨며 그레이스를 불렀다.

“성녀님, 괜찮아요.”

그레이스의 목소리 또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괘,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까요? 자, 잘 모르겠어요. 이런 적이 없었어서…….”

그레이스의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벤자민이 옆에 앉았다.

“각하?”

벤자민도 지금 다른 사람을 부를 수 없으니, 아리아의 성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벤자민은 평소보다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중한 이를 순식간에 잃고, 그럼에도 당신은 해야 할 일을 요구받는 순간이 생길 것입니다.”

“…….”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하는 말이 비단 아리아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되뇌듯, 그는 버석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조금만 시도해 봅시다.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제가 입이 무거운 의사를 찾아오겠습니다.”

“…….”

“진정하십시오. 상처는 크지만, 치명상은 아닙니다. 이런 걸로 실베스터는 죽지 않습니다.”

벤자민이 타인의 앞에서 실베스터를 직함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특히 여주인공이었던 아리아의 앞에서는.

그러나 지금은 실베스터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행동이 아리아로 하여금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느낄 수 있게 했다.

아리아는 아까 전보다 진정한 건지 눈물 고인 눈을 천천히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제 손을 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고, 공작 부인, 괜찮으시다면 잠깐 손 좀 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 그냥 공작 부인이 계시면 될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아르델 백작령에서도 아리아는 그레이스에게 비슷한 기운을 받아 친밀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레이스는 그 일을 떠올리며, 그녀를 돕는 것이 마땅하면서도 어쩌면 이것으로 별관에 있는 안개를 무찌를 힘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자기 자신이 조금 계산적이라고 느껴졌다.

아리아의 손을 잡으니 찐득한 피의 느낌과 함께 따스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저, 저는 최근에는…… 황태자 전하랑 있었던 일을, 생각하곤 했어요.”

‘알아.’

아리아는 제도로 올라온 뒤 행복한 기억이 많이 생겼지만 특별한 기억은 실베스터와 지낸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아리아에게 예의를 차리고 꾸민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실베스터와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풋풋한 한때였으니까.

처음에는 저주를 풀어 주기 위해 만난 둘이었으나, 실베스터는 아리아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아리아는 자신을 성녀로서만 대하지 않는 그를 보고 호감을 얻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떠올려도…… 그냥 최악만 떠올라서…….”

한 번, 처음에 너무 놀라서 딱 한 번 실패한 것이 아리아를 너무나도 크게 흔들어 버렸다.

최악만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것이 그녀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그레이스는 그런 어린 소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요.”

“…….”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꼴사나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태풍이 불지 않는 날은 없어요, 아리아 님. 그래도 태풍을 견디고 나면 하늘은 늘 존재하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레이스는 제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처지인가 싶었다. 자신도 조금 전 대체 뭔지 모를 기억이 떠올랐고, 또 이상한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았던가.

속이 메슥거려 죽을 맛이었다. 거울의 방에 있던 초상화를 봤을 때부터, 그래, 그때부터 진짜 우울했던 것 같다.

부러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레이스에게 이런 침전된 기분은 공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벤자민이 두 가지 청 중 하나로 초상화 교체를 거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정말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청했는지 물어보기 두려우면서도 기꺼웠다.

그 초상화 속의 그레이스 펠튼은 그녀와 달리 정말 이름처럼 우아한 여성이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빙의한 후로 수많은 우울을 조우했다. 아니, 빙의 이전에도 그녀의 삶은 우울의 바다 위에서 나침반 없이 목적지도 잃은 채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보석의 이름을 ‘그레이스’라고 짓는다는 것보다 초상화를 교체하는 게 더 기뻤다. 제 얼굴 그대로 그려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누군가가 그걸 본다고 생각하면 울렁거리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제 모습을 받아들여 준다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 거야.’

그레이스는 아리아와 포개져 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 빙의했을 때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다른 이들에 비하면 통통했다.

예전에는 제 외모에 관한 비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 게 신기했다.

조금 전에 떠오른 비관적인 생각에서도 외모에 관한 건 없지 않았는가.

모든 우울은 버티다 보면 끝이 존재했다. 그리고 버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곤 했다.

“……사실, 아리아 님께서 제가 보낸 편지를 제대로 받으시고 믿어 주신 게 너무 기뻤어요. 저희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미,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를 위하는 말이었잖아요.”

“저는 그게 기뻤어요.”

그레이스는 마음속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이 침침한 상황에서도,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리아가 편지를 보고, 저를 믿어 준 게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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