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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2)화 (102/131)
  • 102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이번에 제 부인께서 오랜만에 연회에 참석하며 한 가지 보석을 폐하께 진상하고 싶다고 하여 완벽히 준비하느라 늦었으니 이번만 눈 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벤자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보석함을 열자 주변에서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빛은 본 적 없어요.”

    “과연…… 저 보석인가요? 멀리서도 빛이 나네요.”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아르델 백작령에서 발견된 보석을 크게 가공해 박아 장식한 보석 술잔이었다. 가장 크고 흠결 없는 보석을 큼지막하게 박아 넣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술잔을 황제 폐하께 진상합니다.”

    “……아름다운 보석이군. 이름은 있나?”

    황제는 술잔에 박혀 있는 보석을 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일단 가장 아름다운 자수를 자아낸 이를 고르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벤자민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전환했다.

    ‘알고 있었나 보네?’

    그레이스는 중간에 끼어들었음에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주제를 전환시키는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건재함을 알리기를 기다리는 이가 많습니다, 폐하.”

    ⋆★⋆

    가장 우수한 자수의 주인으로 한 귀부인이 뽑혔다.

    행사가 무사히 끝난 뒤, 벤자민은 황제를 독대했다. 그레이스는 그동안 벤자민을 기다렸고, 다행인지 아닌지 아무도 춤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저를 기다려 주신 겁니까?”

    “……그런 거라고 할까요?”

    “무슨 말이 그렇습니까?”

    기다렸다기보단 샤를 후작가의 베이비 샤워에서 친해진 이들도 다 댄스 홀로 나갔고, 실베스터와 아리아도 원작 전개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가 버렸으니 그레이스 혼자 남았다는 게 옳은 말이었다.

    ‘그래도 내가 여기 서 있던 게 기다린 거냐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벤자민은 그게 뭐냐고 타박하듯 말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듯 작게 웃고 있었다.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 나누셨나요?”

    그것이 궁금했던 그레이스는 예의를 차리거나, 빙빙 돌리는 대신 묵직한 직구를 담은 질문을 벤자민에게 던졌다.

    벤자민은 그러한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진상한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르델 백작령은 황태자 전하에게 봉작된 남작령이 근처에 있기도 하고, 론델 운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중요한 곳이니까요.”

    “으흠…….”

    “이 원석이 시장에서 주목받으면 서부의 끝단도 점점 주목을 받을 테고, 상단이 많이 오가기 시작하면 발전을 하니 나쁘지 않다는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피해를 입은 많은 지역이 금방 수복되겠지요.”

    “그러고 보니 린덴 자작령에서 만났던 상인이 서부 쪽으로 향하려고 했었죠. 이런 소식을 들었던 걸까요?”

    “글쎄요, 원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저희 측에서 일부러 흘린 기억이 없으니까요. 신경 쓰이면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도 부탁하고, 자신도 따로 알아보기로 했다. 정보가 일치할지 아닐지 확인하는 것도 퍽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튼, 황제 폐하께선 이러한 결과와 진상한 보석이 마음에 드셨는지 두 가지 선물을 내려 주셨습니다.”

    “선물이라 하면요?”

    “현재 황실이 가진 권한 내에서, 두 가지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러한 상황에서 큰 청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황제와 벤자민 둘 다 알고 있었다. 벤자민 자체도 큰 욕심이 있는 자가 아니었고, ‘황실이 가진 권한’이라고 한 만큼, 외부에 압력을 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인과 상의해야 하는 것을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정해 버렸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부탁드릴 것도 없었는걸요. 뭘 청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우선은 거울의 방에 있는 초상화에 대한 청을 드렸습니다.”

    “…….”

    벤자민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째 조금 씁쓸해 보였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황제 폐하의 권한으로 초상화를 새로이 그려 교체해도 될지 청하였습니다. 물론 허가받았고요.”

    그레이스는 그의 말에 어째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나쁜 울렁거림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보석의 이름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이름으로 짓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청도 아니었다. 애초에 현 소유주가 펠튼 공작가였으니, 어지간하면 벤자민의 의사대로 지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것을 굳이 ‘청’까지 했다는 것은 반드시 짓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이제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레이스.”

    “……!”

    “앞으로 모두가 그 보석을 그레이스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레이스는 장신구 이름에 제 부인이나 연인의 이름을 붙여 선물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는 꽤 로맨틱한 행위로 읽혔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장신구라는 의미니까.

    그런데 장신구가 아니라 보석 자체에 이름을 붙이다니, 이건 꽤……,

    ‘나, 낯간지럽다.’

    익숙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심장이 쿵쿵 뛰며 온몸이 간질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런 대우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 그렇죠. 그 이름 좋죠! 우아하다는 의미도 있고, 그 보석이랑 잘 어울려요. 네, 그래요.”

    그레이스는 부러 큰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제 이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인 양 둘러댔다.

    그러자 벤자민은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그리고 부인의 이름이죠. 그러니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빠져나갈 수 없어.’

    그레이스는 울고 싶었다. 이런 간질거리는 이벤트는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얼굴이 빨개진 채 어버버거리는 그레이스를 벤자민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춤은 추셨습니까?”

    “아, 아뇨. 아직요.”

    “…….”

    그레이스가 아직 한 곡도 추지 않았다는 것에 벤자민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늘 부드럽게 웃는 낯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레이스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딜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바쁘셔서 보내 드렸어요.”

    본인 연애 사업에.

    그레이스는 이 말은 입 안으로 쑤욱 삼켰다.

    ‘그 둘이 잘되어야지, 얼른. 주인공끼리의 삽질을 끝내야 벤자민의 흑화 가능성을 줄일 수 있으니까.’

    “보통 파트너와 첫 곡을 추는 것이 관례인데 말입니다.”

    “이미 첫 곡이 지났으니, 관례는 저에게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도 그렇긴 합니다.”

    “…….”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힐끗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요?”

    그레이스가 밖으로 나가자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원작 전개상 아리아랑 실베스터는 정원에서 썸을 탄다.

    ‘그리고 자세한 건 기억 안 나는데, 썸을 잘 타다가 뒤에 분명 뭔 일이 있었거든.’

    근데 하필 또 기사 한 명 대동하지 않은 밀회여서 수습이 잘되지 않았다. 실베스터가 위기에 처하고, 실베스터의 위기를 본 아리아는 꽃길만 걷다가 충격을 받아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탓에 실베스터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다.

    이걸 수습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황실 기사를 불러 정원의 경호를 강화하는 쪽이었겠지만…… 무슨 사건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큰 문제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하면 시켰지. 하지만 기사들 중에 첩자가 있으면 어떡해? 아예 일 벌이라고 내가 파스타 돌돌 말아서 떠먹여 주는 수준이잖아.’

    둘째로, 이대로 두면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한 곡 추자고 할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춤을 못 춘다.

    기억 속 그녀도 춤을 추지 못했다. 배운 기억이 거의 없었고, 자작 영애 시절에도 레이디로서 좋은 교육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가난한 자작가의 막내였기 때문에 장녀와 장남에게 교육이 몰렸고, 언니와 오빠가 받는 교육을 옆에서 같이 듣거나 언니 오빠가 수업을 들은 뒤 그레이스를 가르치는 수순이었다.

    ‘린덴 자작가가 그리 부유한 가문이 아니니 어쩔 수 없긴 했지.’

    벤자민이 만약 춤부터 추자고 하면 어쩔까, 고민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마침 저도 산책을 제안하려고 했습니다. 저희는 뜻이 잘 통하는군요.”

    “그러게요.”

    오랜만에 사교계에 나와 춤 한 곡 추지 않은 공작 부인에 대해 누군가는 수군거릴 수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그녀는 이미 자수 대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뭘 해도 추문이 붙는다면, 춤이 미숙해서 안 추는 걸로 여겨지는 게 낫지.’

    부부끼리 단둘이 정원으로 나가는 건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붙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벤자민이랑 지금 이혼 절차 밟는 중 아니었나?’

    문득 이 사실을 잊고 있던 걸 떠올리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그냥 잊고 있던 게 떠올라서요. 그걸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싶어서요…….”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것도 맞는데, 그와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도 않았나 보다. 그레이스는 짧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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