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1)화 (101/131)

101화

“제, 제가 아직 제출 안 했어요.”

아리아의 손에는 작은 천이 들려 있었다. 원래라면 다른 이를 통해 제출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아리아는 이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제국의 유일한 성녀에게 대놓고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소설에선 몰랐는데, 여기 있으니까 잘 들리네.’

그레이스의 귀에 다른 영애들의 걱정이 들렸다. 당연히 성녀이니 우대를 받지 않을까, 하는 내용이 담긴 작은 목소리였다.

‘걱정들 마셔요.’

그레이스는 아리아가 조심스레 펼치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그녀가 계획한 대로 이미 아리아는 규격을 한참 벗어난 자수를 준비해 왔다.

“어머나…….”

“아름답긴 한데, 저걸 자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약간의 자수와 함께 말린 꽃과 작은 보석으로 장식된 손수건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는 아리아의 미숙한 자수 실력을 감추면서도 미리 고지한 양식에서 벗어나 수상 대상이 되지 않게끔 고안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샤를 후작 부인을 통해 드라이플라워 꽃다발 속에 미리 가공해 둔 ‘그’ 광산에서 채굴한 원석을 숨겨 보내며, 아리아에게 자수 대회의 내막을 알렸다.

‘아리아라면 별로 안 좋아할 테니까.’

누군가가 자신의 지위 때문에 1위로 만들어, 다른 이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 선량한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성녀님께서 혹시 이 행사를 우습게 아시는 건…….”

오랜 역사가 있는 행사인 만큼, 그들은 자수 대회에 따라붙는 양식을 매우 중시했다. 하여 그레이스는 이를 뒷받침해 줄 준비물을 준비해 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를 잘 포장하기 위한 다른 준비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최대한 서두른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이야…….’

그레이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깊은숨을 마시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손발이 덜덜 떨렸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지고하신 태양을 뵙습니다.”

“그대는?”

“펠튼 공작 부인, 그레이스 펠튼이라고 하옵니다.”

이제까지 크게 나서지 않았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자 은근히 따라붙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괘. 괜히 나섰나?’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지자마자, 그레이스는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니 수습하는 수밖에.

소문으로만 듣던 이가 여기서 왜 나섰을지, 모두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였다.

사실 감히 황제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지위도 몇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펠튼 공작가의 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만큼 펠튼 공작가의 이름은 대단하였으나, 이제껏 그레이스는 그 이름을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몰랐다.

‘죽으면 쓰지도 못하는데, 지금 써야지. 어쩌겠어.’

물론 서 있는 내내 드레스에 감춰진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입을 열기 전 목소리가 볼품없이 나올까 긴장되었고, 혀를 씹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나 지금 표정 이상한 거 아냐?’

그녀가 무슨 상념에 빠졌건 간에, 황제는 그레이스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군, 그대가 펠튼 공작 부인이군. 무슨 일이지?”

“성녀께서 그 손수건을 준비하게 된 것에는 제 책임이 있어, 아직 우승자가 선정되지 않았음에도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그레이스는 한 글자 한 글자 뱉으면서도 이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닌지 머리를 팽글팽글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레이스가 큰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황제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서부 원정대에 저 또한 일원으로서 참가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곳에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

“그곳에서 한 사제가 성녀님의 물품을 훔쳐, 저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레이스의 고백에 홀 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문도 나지 않고 묻혀 버린 한 가지 ‘사실’은 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귀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그레이스가 우스운 존재일지라도, 대귀족의 성을 지닌 자였다.

귀족들에게 그것은 매우 큰 의미였다.

‘……이걸 이렇게 까발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밝힌다고 해도 그레이스는 신전에 따로 가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지, 이렇게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 앞에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람은 왜 항상 계획한 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

그레이스는 생각과 다르게 차근차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신전과는 오해를 잘 풀어 해결하였으나 성녀께서는 본인의 물건으로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유감을 느끼며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저희는 아르델 백작령 사태의 심각성에 통감하였습니다.”

아리아는 순간 당황하며 ‘우리가 언제요……?’라는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레이스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그걸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대신 그레이스는 빨리 시선을 훑어 실베스터를 찾았다. 그는 이미 아리아의 근처에서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 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었으니, 저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실 겁니다.”

“……황태자가?”

그레이스가 저를 지칭하자 실베스터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네, 당시 해당 누명 사건으로 인해 성녀님과 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동반된 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웠기에 황태자 전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와 성녀님은 이번에 자수를 뽐낼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게 되었죠.”

물론 다 뻥이다. 진실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으며 셋 중 그 사실을 고할 자는 없었다.

“하여, 저희는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수 대회는 이 연회의 개막을 알리는 자리 아닙니까? 연회를 시작하기 앞서, 아르델 백작령의 심각성에 대하여 모두에게 토로하고 그 땅의 가능성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요……!”

서부, 론델 운하의 시발점에 위치한 아르델 백작령의 가능성. 그것은 그레이스가 굳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리아가 손수건에 수놓을 때 사용한 보석은 아무도 보지 못한 빛을 품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낯설면서도 황홀한 이채는 모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황태자, 펠튼 공작 부인의 말이 전부 사실인가?”

황제가 실베스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베스터는 영 눈치 없는 이는 아니었는지 냉큼 태연한 얼굴로 끄덕이며 답했다.

“예, 공작 부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따로 말씀드릴 수 있었으나, 이렇게 모두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었기에 무례임을 알면서도 성녀에게 이 역할을 부탁하였습니다.”

“공작 부인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었을 텐데, 굳이 성녀에게 부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그것은 정치적 의미를 내비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레이스는 말을 더듬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다잡고 이어 나갔다.

“펠튼 공작가는 황실만큼은 아니나 최근 많은 주목을 받고 있음을 폐하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 그런 만큼 제가 직접 움직이면 다른 의미로 내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귀족 중 몇몇은 과연 펠튼 공작가가 진짜 태양을 삼킬 나무인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레이스의 지금 행동은 그녀가 소문만큼 아둔하지 않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펠튼 공작가를 정치적인 추문에 휩싸이지 않게 하면서도 명성을 드높일 수 있게 만들었다.

‘신전은 일단 정치에는 끼지 않으니까.’

다만, 이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그것을 왜 공작 부인이 설명하는가?”

“…….”

그레이스의 설명대로 정치적 의미로 내비치지 않으려면 이 모든 것은 그레이스가 아니라 아리아의 입을 통해 설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

그레이스는 아직도 굳게 닫혀 있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안 와?’

정말로? 목 안이 바짝 말랐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잘 얼버무릴 수 있을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는 마땅한 변명거리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때,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벤자민 펠튼 공작 각하 듭시오!”

“……!!”

조용한 와중 들린 소리와 함께 벤자민이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를 품에 든 채 홀에 나타나,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공작 각하가 오셨네요.”

“공작 부인이 오랜만에 사교계에 나왔는데, 같이 오지 않으시고…… 역시 가십지의 글이 사실일까요?”

“각하의 손에 들려 있는 걸 봐요. 저것 때문에 늦은 걸 수도 있겠어요.”

“저게 뭘까요?”

많은 이들이 쑥덕거리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그레이스의 귀를 불쾌하게 간질였다.

“……내가 많이 늦었나 봅니다.”

벤자민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느릿하게 앞으로 나서며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께 양해를 구하여 늦게 출발하였으나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무엇을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손등에 입을 맞춘 다음,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그가 황제보다 제 부인을 우선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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