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0)화 (100/131)

100화

실베스터는 시종이 가져온 잔을 그레이스에게 건네며, 다른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부인을 보는 것 같은데요.”

“음?”

실베스터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샤를 후작가의 베이비 샤워 때 본 이들이었다.

“아, 아는 사람들이에요. 가도 괜찮을까요?”

그레이스가 묻자 실베스터가 흔쾌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행동을 보며 벤자민이 저를 혼자 두지 말라고 부탁했나 보다 추측했다.

“부인, 오늘 너무 우아하세요.”

“저번에 뵙고 드디어 다시 만나네요. 건강하셨나요?”

그레이스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모두 우호적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추문으로 뒤덮인 공작 부인이 사교계에서 큰 힘을 가진 파벌에 끼자, 홀 내의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빠른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개중 크게 동요하며 자리를 피하는 이가 있었다.

‘내 소문을 만들어 퍼트린 자는 아닐 거야.’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추문을 신나게 떠들지만, 주도적으로 일을 벌인 건 아닌 자. 그 사람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어딘가로 이동한다면 제 파벌이 있는 쪽으로 가서 이에 대해 말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황제가 오지 않았으니까 휴게실 같은 데 있을 수도 있어.’

그레이스가 그 방향 쪽을 주시하고 있자,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이 말했다.

“어머, 부인, 거울의 방에 가 보시려고요?”

“……?”

“하긴 아직 본 행사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긴 했죠. 우리끼리 보러 다녀올까요? 오늘은 특별히 개방도 되어 있다고 하니까요!”

다들 까르르 웃으며 들떠 보였다.

‘거울의 방이 뭐지?’

그레이스가 그것에 대해 채 묻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각하와 부인의 초상화는 어찌 걸려 있을지 기대되네요.”

“……아.”

역대 황가와 공작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 그 방의 이름이 거울의 방이었나 보다.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소설에서는 그런 방이 있다는 것만 나오고 방의 이름이 나오진 않았으니까.’

“부인, 자수는 제출했나요?”

“아, 전 제출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서 그냥 참여하지 않으려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시지 그러셨어요.”

“아하하…….”

‘1등 해도 문제고, 안 되어도 문제거든요.’

뭘 해도 욕먹는 지금의 상태라면 그냥 대회에 나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그저 웃어넘겼다.

‘그래도 궁금했으니까 같이 갈까.’

그레이스는 실베스터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거울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도 그레이스가 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보고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황태자가 거울의 방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이야말로 이상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울의 방은 역대 황족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만큼 웅장하고 화려했다.

‘사람이 없네?’

늘 개방되어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방 안에는 그레이스가 포함된 무리만 있었다.

‘방금 그 사람도 이 방향으로 가는 거 같았는데, 이상하다.’

그레이스는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있는 귀부인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오는 길에 휴게실이 있나요?”

“네, 연회 시작 전이나 도중에 쓰는 방이 몇 개 있답니다. 규모가 큰 경우에는 타임 테이블에 예약을 걸어 사용하는 편이죠.”

“아아, 그렇군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전부 아름답네.’

“이쪽이 펠튼 공작가의 초상화인가 봐요.”

“공작가 중에서도 펠튼가만 황족들과 나란히 초상화가 걸리는 것을 허가받았다면서요?”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1년도 더 넘게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머, 1년이 넘게 걸린다니 저라면 진짜 지칠 거예요. 부인은 기억하시는 게 있나요?”

“아하하,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흐릿하네요.”

그레이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웃어넘겼다.

“어머, 이분들이 전대 공작 부부시네요.”

“아름다우셔라.”

“…….”

그레이스는 그제야 기억에 없는 전대 공작 부부를 보았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짙고 어두운 검은 머리의 남성과, 그와 대비되는 태양 같은 금발을 가진 여성.

그레이스는 초상화가 그들의 미모를 완벽히 담지 못했으리라 확신했다.

“작년에 그런 일만 아니었으면…….”

“이봐요……!”

누군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의 입을 막았다. 그레이스의 앞이었던 탓이다.

‘작년에 그런 일?’

작년이면 그레이스가 린덴이 아니라 펠튼의 성을 받은 후였을 때이다.

그레이스가 그들을 바라보자, 모두 조금 전 난처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감추고 그녀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눈에는 그들이 감추고 있는 감정이 얼핏 보였다. 동정심이었다.

‘작년에 불의의 사고로 떠났구나.’

그레이스에게 결혼 후 1년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대 공작 부부가 그녀에게 어떤 가족이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초상화를 보고 있자니 심장 전체가 뻐근하고 아팠다. 벤자민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통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통증이었다.

계속 보면 입 안이 바짝 말라, 그레이스는 시선을 거둬 다음 초상화가 있을 자리로 몸을 이동했다.

‘아.’

그 자리는 현 펠튼 공작 부부, 즉 벤자민과 그레이스의 초상화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어머, 아름다워라.”

차마 제 얼굴이 담겨 있을 액자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중, 맑은 목소리의 찬사가 들려왔다.

그를 시작으로 함께한 무리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

그레이스는 초상화 속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닮았지만, 그레이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주근깨도 없었고, 통통하지도 않았다. 그레이스와 닮은 점은 구불구불한 당근색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이라는 점뿐이었다.

‘얼굴이 닮긴 닮았나?’

정말 열심히 뜯어보면 닮기는 했다. 열심히 뜯어봐야 한다는 맹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벤자민의 눈은 조금 슬퍼 보여.’

초상화일 뿐인데 감정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레이스는 이 전시장에 괜히 들어왔다고 후회했다.

⋆★⋆

자수가 진열된 테이블은 공정성을 위해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실제로 모를 리가 없지만.’

곧 황제가 도착해 우승자를 뽑기 때문에 그레이스는 일행과 홀로 돌아왔다.

“아직 성녀님께서는 안 오셨나 봐요.”

“곧 오시겠죠.”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이실까요, 너무 기대되네요.”

‘아리아는 우승자를 뽑기 직전에 올 텐데.’

이건 원작과 동일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그레이스가 미리 써 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발 아리아에게 잘 전달되었기를.’

그레이스가 속으로 기도하던 중,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몸을 돌려 그에게 예우를 갖추고 몸을 숙였다.

‘유약해 보인다.’

그레이스가 몸을 숙인 채 그를 훔쳐보며 내린 감상이었다.

황제치고는 약한 인상을 가진 자. 황좌 앞에 서서 인사말을 하고, 본식을 시작하기 앞서 가장 멋진 자수를 놓은 이를 추려내겠다고 하였다.

원래라면 황후가 이끌어야 마땅한 행사였으나, 애석하게도 이 제국에는 황후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할 황태후나 황녀 또한 없었기에 결국 황제가 대신 이끌었다는 게 해당 소설의 설정이었다.

‘황태자 또한 이번 원정에 출정했던 인원이라, 치하받아야 하는 사람이라서 황제가 했다고 했대나 뭐래나.’

다만 취지는 좋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의 좋은 예시였다.

차라리 아리아가 자수를 보통 이상으로라도 했으면 모를까, 형편없는 실력을 띄우며 다른 이들을 짓뭉갰으니 말이다.

참가한 부인과 영애들이 자신들의 것이 뽑힐까 기대 어린 시선을 교차하고 있던 중, 급한 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왔다!’

시종이 도착을 알리기도 전에 아리아가 거친 숨을 뱉으며 홀로 들어왔다. 여기까진 원작과 똑같았다.

“……음?”

그러나 아리아가 입은 드레스를 보자, 그레이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런 드레스지?’

그레이스는 당연히 아리아가 실베스터에게서 받은 옷을 수선해 입을 거라 생각했다.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옷은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레이스가 입은 드레스와 비슷한 양식이었다.

그녀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목걸이……!’

아리아의 목에는 ‘태양의 가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목걸이를 원작보다 빨리 찾아서 그런 거였어!’

그레이스가 톰 버킨을 통해 ‘태양의 가호’에 대한 정보를 신전에 알렸다. 그것은 성녀, 더 나아가 신전의 상징.

그간 목걸이의 존재 여부에 대해 말이 많았던 만큼 서부 오염을 완벽히 정화한 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걸고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통성을 강조하려면 우아한 드레스가 낫다고 누가 판단한 거겠지.’

피하려고 애썼더니, 오히려 이 홀에서 유일하게 아리아와 디자인이 딱 겹쳐 버렸다.

벌써부터 모두가 둘의 드레스를 흘기며 비교하는 게 느껴졌다.

‘처음 입장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드레스를 뜯어보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레이스는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에 숨이 막힐 거 같았는데, 아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듯, 그레이스를 보고 약간 반가운 기색을 보이다가 서둘러 자수가 진열된 테이블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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