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9)화 (99/131)

99화

<옷이 아깝네.>

<이대로 가 봤자 웃음거리가 될 텐데, 그냥 도망치지그래?>

<그래, 차라리 너도 그 약을 먹어. 살을 더 빼야지. 안 그러면 웃음거리가 될걸?>

동그란 몸체를 가진 여성은 절대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레이스는 흔들렸다. 지금 당장 그 소리들을 뿌리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래도 가야지.’

그럼에도 그녀가 움직이는 이유는 이 소리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도망치고 싶다.’

그리고 그 장엄한 다짐은 황궁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딱히 무슨 소리가 들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위용을 보면 누구나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아닌가? 나만 그런가?’

마차는 아직도 황궁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있는 귀족들은 퍽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역시 다들 익숙한가 봐.’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초대받아 간 베이비 샤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행사였다. 그레이스는 역시 그전에 몇 번 더 다른 사교 파티에 참석할걸 그랬나 후회하다가도, 지금 당장 갈 만한 자리가 없었음을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진정하자, 나야. 어차피 그레이스 펠튼의 평판은 바닥이야. 더 떨어질 데도 없다고.’

그레이스가 서부 오염 사태에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문이 사그라들지 않은 듯했다.

‘이쯤 되면 징하다.’

여주인공인 아리아가 서부 원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낱낱이 알려져 찬양하면서도 그레이스가 뭘 했는지는 좋은 말 하나 돌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이쯤 되면 세상이 자신을 따돌리고 죽이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벤자민에 대한 이야기는 신문에 상세히 실려 있던 거 같은데.’

가끔 외출할 때 밖에서 보는 가십지나 신문은 온통 서부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그중에는 해당 원정대를 찬양하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으나, 그레이스와 관련된 언급은 드물었다.

‘욕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여기서 다행이라고 여긴 점은, 원작에서는 벤자민이 서부 원정에 포함된 자였으나 그리 좋지 못한 시선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이트 폭파 사건을 무마해서 그런 것 같아, 그레이스는 만족했다.

‘이 정도면 됐지. 첫술에 어떻게 완벽히 배부르겠어.’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창과 커튼 사이로 눈부신 빛이 드리웠다. 평소에는 벤자민이 먼저 내려 그녀를 에스코트했으나, 오늘은 그레이스 혼자였다.

펠튼 공작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를 향한 수많은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침을 꼴깍 삼키며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할 수 있어.’

벤자민 없이 안 좋은 소문만 무성한 공작 부인이 모습을 나타내자 시선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 할 수 있나?’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안 들리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도착한 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벤자민은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온다고 했어. 괜찮아.’

이른 아침 그레이스에게 연신 미안한 얼굴로 금방 오겠다고 말한 그를 떠올리니, 그나마 든든해졌다.

‘그래도 역시 전부 에스코터가 있긴 하구나.’

약혼자, 남편이 없으면 친구나 아버지와 함께 온 영애들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라도 한 명 대동할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혼자 입장하는 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큰 파티에서 부부는 동시 입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불화설이 뜨기 딱 좋지.’

그레이스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벤자민이 바쁘다는데 어쩌겠는가? 둘 다 늦게 입장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거 같았다.

‘게다가 자수는 초반에 보여 주니까, 직접 보고 싶었고.’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그래도 역시 옆에 누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실 시종이 그레이스의 신분을 확인하고, 내부에 그녀의 입장을 알리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깨가 움츠려져 있습니다.”

“……?”

익숙하지는 않지만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화, 황태자 전하?”

실베스터, 이 소설의 주인공.

빛 아래에서도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블랙홀 같았다. 그럼에도 보라색 눈동자는 신묘한 반짝임을 지녀, 아리아의 눈동자가 별이라면 그의 눈은 보석에 비유할 수 있었다.

“잠시 부인의 에스코터 역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저, 전하께서 저를요? 왜요?”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 예를 갖추지도 못하고 대뜸 질문했다. 그녀도 제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이 당황스러워 입을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해서요.”

원작에서의 실베스터는 아리아의 에스코터를 자처했다. 아니, 애초에 실베스터가 그레이스의 에스코트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기에 그가 옆에 서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전에 공작저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매너를 갖추고 있었다.

“첫째로는, 공작이 나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

그레이스는 여기서 일단 납득했다. 원작에선 다뤄지지 않았지만 둘의 사이는 예전부터 신뢰와 친밀로 다져진 관계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첫째?’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찬찬히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둘째로, 제가 개인적으로 신경 쓰는 사람이 부인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리아구나.’

그레이스로서는 대체 어디서 많은 도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만, 실베스터가 그리 말하니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죠.”

문 앞에 서 있던 터라, 시종이 여전히 둘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실베스터가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다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윽고 둘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연회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어깨 펴고, 바닥 보고 걷지 마세요.”

“……?”

“그리 움츠리고 있으면 무엇을 입더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자신이 또 무의식중에 바닥을 보며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공작저 본관에서 실베스터를 처음 만났을 적에도 그레이스는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을 때였다.

“혹시 그때 그래서 저를 못 알아보고 지나치신 건가요?”

“……그때는 제가 조금 재수 없긴 했죠.”

‘솔직히 많이 재수 없었는데요.’

그레이스는 또 속으로만 딴지 걸었다.

실베스터는 꽤 익숙한 폼으로 그레이스를 이끌어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실베스터가 말한 여파 덕인지 그레이스는 더 이상 몸을 움츠리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은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하고 빛이 부셨다.

실베스터와 함께 입장하니 시선이 두 배로 느껴졌지만, 긍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적대적인 느낌보다는 호기심에 치우쳐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레이스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실베스터도 이 제국의 황태자이긴 하지만, 입지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현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계승권을 잃었을 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원작에서 그의 입지가 얼마나 비좁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실베스터는 그를 어떤 위치로도 재단하지 않는 아리아를 마주하며 치유받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나아가는 이른바 성장형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베스터가 나한테 다소 재수 없게 말한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

생각해 보니 실베스터는 아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약간 재수 없었던 거 같았다.

‘이게 다 사람을 잘 안 만나 봐서 그래.’

실베스터의 설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중 유일하게 저주에 걸린 실베스터는 방랑벽까지 있었다.

‘어쩌면 저주랑 그 방랑벽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레이스는 짧은 추측을 마치고 실베스터에게서 떨어졌다.

“춤은 추지 않을 건가요?”

“아무래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춤을 추는 건 부담스러워서요.”

“그렇군요.”

실베스터는 무뚝뚝하게 답하며 뒷짐을 진 채, 그녀의 옆에 자리했다.

그레이스는 그가 왜 제 옆에 서 있나 했지만 얼마 안 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추문이 붙어 있다고 해도 그레이스는 펠튼 공작 부인, 즉 펠튼 공작에게 접근하기 가장 쉬운 루트라고 할 수 있었다.

실베스터는 그레이스의 옆에 서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귀족 무리를 아주 익숙하게 제 지위를 이용해 내쫓았다.

평소 자신의 소문을 신경 쓰느라 이도 저도 못하는 그레이스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저러니까 평이 안 좋지…….’

“그러고 보니 성녀님과 입장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어차피 좀 늦는다고 했어요. 성녀의 경우, 혼자 입장한다고 하여 쓸데없는 추측을 하는 경우도 없으니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쪽이 낫죠.”

그레이스는 실베스터의 의견을 듣고 의외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리아밖에 모르는 사랑꾼이었기에, 이리 판단하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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