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 사람이 누구더라, 그레이스는 골몰히 생각했지만 이름까지 떠오르진 않았다. 다만, 아리아와 비교될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꽤 상징적인 인물이긴 했을 것이다.
그 등장인물은 비슷한 색과 양식의 드레스를 입었기에 더욱 아리아와 비교당했다. 애석하게도 그레이스는 드레스의 색상이나 디자인까지는 기억하지 못했기에 아예 현재 유행하고 있는 패턴 자체를 피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파티에 참석하면, 사교계 입지는 떨어지더라도 화제성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테니까.’
오랜만에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낸 펠튼 공작 부인.
참으로 물어뜯기 좋은 소재였다.
‘게다가 아리아는 황실에서만 쓰는 엄청 귀한 천을 사용했으니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능사라고 했다. 그레이스는 아예 돌아가기로 했다.
“피시언족의 원단을 일부 사용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만들어 둔 게 없으니 이제부터 준비해야겠지만요. 괜찮을까요?”
모든 귀족이 유행을 따르는 건 아니었으니, 굳이 그레이스도 유행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몰라서 따르지 않았다는 말은 피하는 게 좋지.’
그레이스가 황실 파티에 참석하면 좋지 않은 의미로 이목을 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레이스의 외관, 걸친 장신구와 입은 드레스 등 모든 것을 훑어보고 평가할 게 안 봐도 훤했다.
‘응, 이건 피해망상이 아니고 확실한 사실이지.’
카탈로그에 있는 드레스 디자인을 살피며, 그레이스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기왕이면 몸을 가리는 형태가 좋겠어요. 몸에 주근깨가 조금 있어서요.”
“그럼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은 아니군요.”
“네, 그래도 방법은 있으니까요.”
시레니는 영 걱정스러운 투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주근깨 완화에 좋다고 ‘지지 않는 꽃’의 물건을 선물받기는 했는데, 처음 받아 보는 거라 얼마큼 어떻게 쓰는 건지도 영 모르겠어서요.”
시레니가 아쉬워하는 틈을 타, 그레이스는 슬쩍 정보를 흘렸다.
그 상단의 이름이 나오자 시레니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의외인 점이 있다면 벤자민도 그 이름을 듣고 미약한 반응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는 곳인가요?”
해당 상단은 샤를 후작가의 베이비 샤워 때만 보아도 여성을 위한 곳인 게 확실했기에 벤자민이 안다는 건 꽤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 수도 있긴 하지. 벤자민이니까.’
마법사가 아님에도 마정석으로 시작해 마도구 협회와 게이트 사업에 연관되어 있는 벤자민은 그야말로 제국 상업의 주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기에 어쩌면 해당 상단을 만나 보았을 수도 있었다.
‘지지 않는 꽃의 비중은 정말 없었나 봐.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에서 나온 기억이 없거든.’
벤자민은 소설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비중이 큰 캐릭터였으니, 그와 깊게 연관되었으면 한 번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뜬금없이 흑막이 되는 과정에 관련이 있었다거나?’
그레이스는 의문을 모른 척, 시침 뚝 떼며 벤자민에게 말을 이었다.
“귀부인들이나 영애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인가 보더라고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요.”
“예, 저도 들어는 본 적 있습니다. 마도구 협회에서 해당 상단과 교류를 한 적 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아, 마도구 협회와 무슨 새로운 상품을 만든 건가요?”
“그랬으면 저에게도 보고가 들어왔을 겁니다. 마도구 협회에서 만든 새 상품은 출시 전에 반드시 저를 거쳐 가니까요.”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레니를 바라보자, 그녀 또한 입을 열었다.
“지지 않는 꽃은 생긴 시기에 비해 매우 빠르게 커졌죠. 그리고, 그 시기는 어떤 한 상단이 서서히 사그라진 때와 비슷합니다.”
‘그 상단의 이름도 들어 봤자 원작에 안 나오겠지.’
그레이스에게 감이 짜릿하고 꽂혔다.
“‘별의 노래’라는 곳이었어요.”
그레이스는 시레니의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상단이 설립되고 사라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인데 왜 하필 그 상단을 주목하는 거죠?”
“그 이유는 별의 노래에서 파는 품목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완전 같은 상품은 아니지만요.”
“혹시 사업 방식도 비슷한가요?”
“아예 똑같지는 않지만, 예. 그렇습니다.”
“…….”
그레이스에게 또 다른 감이 짜릿하고 꽂혔다.
‘같은 데구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은 상단이 이름을 한번 갈아치우고 영업 중인 것으로 보였다.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물론 이것은 심증뿐이었으니, 속단하기엔 이르렀다.
‘그럼, 심증을 확인할 수밖에 없지.’
지금 당장 화두를 꺼내면 너무 들이미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문득’, ‘갑자기’,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번 황실 파티에서는 샤를 후작가에서 만난 이들과 짧은 교류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때 진짜로 무슨 대화를 나누든 간에, 벤자민에게 대충 해당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식으로 말하며 지나가면 될 일이다.
그레이스는 아무도 모를 의욕을 불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이 뭔지 모르면, 불안 요소를 다 없애면 될 일이지. 차근차근 없애 주마.’
“아 그래서, 드레스는 조금 전 봤던 디자인을 기반으로 부탁드려요.”
그레이스는 자신이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며 벤자민에게 말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방금 부인께서 말씀하신 드레스를 파티 전까지 완성해서 조달해 주고…….”
벤자민은 말을 잠시 끊고, 화려한 드레스 열몇 벌과 장신구를 가리켰다. 전부 그레이스가 내심 마음에 들어 조금 더 바라본 것이다.
“이것도 구매하지.”
“……?”
“마음 같아서는 다 사서 부인 품에 안겨 드리고 싶지만, 내 부인께서는 쓸데없는 소비를 안 좋아하셔서 말이야.”
‘이미 충분히 쓸데없는 소비인데요.’
그레이스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딴지를 삼켰다.
“그러니 부인께서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한 것들만 구매하는 수밖에요.”
벤자민의 얼굴에는 매우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파티 당일, 그레이스는 이날만큼은 제 몸을 하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목욕은 거의 혼자 하게 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레이스는 분명 가만히 있었음에도 피로가 강하게 밀려왔다.
‘그래, 차라리 바쁘고 지친 게 낫다.’
그레이스는 어떻게 꾸며도 호박에 줄 긋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른 하녀들은 갑론을박하며 진지한 얼굴로 어떻게 꾸밀지 토론하고 있었다.
‘드레스랑 장신구는 다 준비되어 있는데 뭘 이렇게 토론하는 건지…….’
“오늘 마님께서는 혼자 입장하셔야 하니까요!”
“절대로, 누구보다도 마님이 제일 눈에 띄게 해 드릴게요.”
‘아니, 눈에 띌 필요 없다니까.’
그레이스는 원치 않는 배려를 펼치는 하녀들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벤자민은 파티 당일까지 상당히 바빠져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개인적인 일도 있어 보였는데, 내가 맡긴 일 때문에 더 그런 거겠지.’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작은 일을 부탁했다. 시레니에게 부탁한 물건을 파티장에 올 때 가져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면서 응해 줄지는 몰랐는데.’
그레이스는 멍하니 오늘 파티에 있을 주요 사건을 떠올렸다. 그렇게 큰 사건은 원작 내에는 없었다만, 이제 그녀가 포함되어 사소한 것을 비틀었으니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른 행동을 할 예정이니 확실히 달라지겠지.’
그레이스는 이번 자수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다. 실력에 자신 없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지위와 사교계 입지를 따져 보면 어떤 결과더라도 좋지 않은 말을 들을 게 뻔했다.
대신, 그녀의 손에는 펠튼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이걸 벤자민에게 주면 대충 둘러댈 수도 있을 테고.’
그레이스가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자, 하녀들은 야무진 손놀림을 보여 주며 그레이스를 꾸몄다.
곱슬거리는 머리는 반으로 묶어 땋아 올렸고, 군데군데 리본과 보석으로 치장했다.
드레스 자체는 무거운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걸쳐진 장식이 밝은색이었기에 칙칙해 보이지 않았다.
“화장은 가볍게 했어요. 주근깨를 전부 가리진 못했지만, 두꺼운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 같아서요.”
“괜찮아. 나도 지금이 딱 좋은 거 같아.”
그레이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보통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 꾸미면 몰라보게 아름답다느니 천사 같다느니 그런 묘사가 나오곤 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여전히 그레이스였다. 조금 더 나은 그레이스 펠튼.
머릿속에서 불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개를 전부 없애지 않아서 그런가.’
전처럼 그레이스를 공격적으로 집어삼키려는 듯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는 기분 나쁜 기운이 보였다.
밖에 있을 때도 그레이스가 우울감에 잠식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장기간 노출되어 있던 탓에 평소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지금 당장에도 그녀가 하지 않을 법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