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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7)화 (97/131)
  • 97화

    이런 소규모 파티의 경우, 호스트의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한 개개인을 배웅해 준다.

    그레이스가 소후작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개인적인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떠나야 했다. 이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중 후작 부인이 그녀를 찾았다.

    “공작 부인, 드디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군요.”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옅게 풀어졌다.

    “젊은이들의 대화 자리에 끼면 안 될 것 같아 늙은이는 그저 앉아 있었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온 거지?’

    후작 부인은 내내 자리를 지키다 사담이 길어지자 떠났고, 다른 이들을 배웅할 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의문을 표하자 그것을 읽은 듯 후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생각을 숨기는 법이 필요하겠네요. 개인적인 호감이라고 하지요.”

    “저에게 어째서…….”

    “글쎄요. 부인께서 새아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라고 하면 믿으실까요? 특히 처음 보내 준 원단이요.”

    “……?”

    그레이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여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새아가의 눈 색과 똑같은 원단이라니, 참 감각이 좋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굴 위한 선물인지 완벽히 보이잖아요.”

    ‘그거 우연인데요.’

    마침 좋은 천이 있었고, 그레이스에겐 어차피 맞지도 않는 색이라 겸사겸사 보냈을 뿐이다. 그게 딱 샤를 소후작 부인의 눈 색이었을 줄 그레이스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이미 그 당시 보냈던 원단의 색을 새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제가 소후작을 가졌을 당시에도 부인같이 감각 있는 분이 근처에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새 아가라도 만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

    아니 그 모든 게 우연이라니까요. 그레이스는 목 끝까지 이 말이 차올랐지만 꾹 삼키고 그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여기서는 침묵을 지키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후작 부인이 다음으로 꺼내는 말에 그레이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서, 부인께서 그때 자수 경연에 대하여 말한 것은 사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 그걸 어떻게……?”

    “한때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늙은이랍니다. 그 정도는 알아채지요.”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이들도 눈치챘을 수 있다며, 후작 부인이 덧붙였다.

    “새아가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저에게 부탁하는 게 나을 거예요. 아직 제게 권한이 더 많으니까요.”

    ‘아하…….’

    그레이스는 그녀의 의중을 깨달았다.

    “이번 파티 후에 소후작께서 후작이 되시는군요?”

    “예,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레이스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부탁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은밀하고, 어쩌면 또 그만큼 위험하다고 해석될 수 있었다.

    그 일에 현 소후작 부인이 참여했다가 무언가 어그러지면 후작가 자체가 관여했다는 의미로 보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만약 곧 공식 석상에서는 은퇴할 후작 부인이라면 그럴 걱정이 덜했다.

    “이번 자수 대회에 사실 뒷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후작 부인이 정말 자신을 도와줄지 아닐지 계산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매달릴 때였고, 그녀는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그 안에는 보석을 깎아 만든 비즈와 압화 그리고 봉해져 있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걸 아리아, 성녀님께 전해 드릴 수 있을까요?”

    “이것을요?”

    “예, 그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라서요.”

    그레이스는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물론 거짓말을 섞어서.

    “이번 자수 경연을 통해 성녀님을 우승시키려는 세력이 있어요. 귀족 측에도 신전에 의탁하는 분이 있으니까요.”

    “…….”

    “성녀님께서는 아직 사교계에 파벌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셈인 거죠.”

    “만약 성녀님께서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겠지만…….”

    후작 부인은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아리아가 그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던 탓이다.

    “자칫하면 역효과가 나겠군요.”

    “그래서 이게 그분에게 필요할 거예요. 그들의 판단은 성녀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던 거거든요.”

    이건 참이다. 아리아는 경연에 나갈 생각도 없었고, 이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상을 받아 기뻐하긴 했으나, 당황했다는 묘사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는 편지에 적어 뒀어요. 대신, 이걸 보내실 때 다른 물건에 섞어서 보낼 수 있을까요?”

    “……흠.”

    혹시 의심을 사 거절당할까, 그레이스가 약간 애를 태우던 중 후작 부인이 흔쾌히 응했다.

    “어렵지 않지요. 그쯤이야. 무슨 부탁을 하려나 했더니 오히려 한시름 놓았습니다.”

    “들어주신다고 해 주셔서 기뻐요.”

    “무엇을요. 부인께서 소문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어 오히려 기쁩니다.”

    후작 부인은 고개를 까딱이며 그레이스를 배웅했다.

    “주최자가 배웅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

    그레이스는 다 끝났으니 한동안 잠시 쉬며 안개에 대해 생각하고, 받은 미용 크림의 출처도 생각하고, 약도 생각하고…… 아무튼 생각만 하다 보면 시간이 한참 흐르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자-! 부인, 고르시죠!”

    휘황찬란한 드레스와 보석 장신구, 구두가 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아름답고 진귀한 디자인과 재질이 가득했다.

    시레니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세이렌의 노래’에서 이번에 구해 온 최고 신상이지요. 단언컨대 부인과 무척 잘 어울릴 거라 자부한답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막 아르시아 왕국과 1차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시레니는 그레이스가 황실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위해 온갖 준비를 해 왔다.

    그레이스는 ‘그래, 보통이라면 이게 맞지…….’ 싶으면서도 익숙지 않아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래, 파티 준비. 그걸 잊고 있었어.’

    그녀에게 닥친 일이 너무 많아서 그걸 준비해야 한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옷장 속에 입지 않은 드레스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거 중 하나를 입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거 돈 낭비 아니야? 하며 그레이스가 소시민적, 아니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카탈로그를 넘기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부인께서는 청록색 드레스가 어울리실진대, 그런 종류는 보이지 않는군.”

    ‘당신은 한 제국의 공작이면서 안 바빠?!’

    벤자민은 그레이스보다 더욱 익숙한 낯으로 그레이스 옆에 앉아 직원에게 이리저리 질문하며 지시했다.

    그러다 그레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부인께서 무엇을 고르시더라도, 맞추어 입겠습니다.”

    “아, 네…….”

    그걸 걱정한 적은 없는데요.

    그레이스는 차마 이 말을 뱉지 못했다.

    “유행이 돌아 현재 유행하는 것은 플라워 패턴이죠. 그중에서도 이 넝쿨무늬가 가장 유행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가져온 드레스는 다 지나치게 화려하네. 장신구까지 걸친다고 생각하면 좀 과하군.”

    “각하께서는 마도구에 전념하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상인 된 입장으로서 감히 말씀 올리자면 이 장신구와 드레스의 조합이 가장 적합하며…….”

    그레이스는 어째서인지 웃는 낯으로 불을 튀기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둘을 바라보았다.

    “…….”

    눈을 굴리며 카탈로그를 보는 척하던 그레이스가 탁, 덮었다.

    “두 분이 고른 거 다 안 입을 거예요.”

    “네?”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두 사람이 고른 드레스는 모두 정말 아름다웠다. 자수 하나하나, 박아 넣은 보석 하나가 얼마인지 감히 상상하기 두려울 만큼.

    ‘돼지 목에 다이아 목걸이도 아니고.’

    이건 그레이스가 스스로를 폄하하는 발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작 전개를 떠올리며,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안 좋은 일을 예상해 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그걸 당할 수 있단 말이지.’

    세이렌의 노래 상단이 아르시아 왕국과 거래를 성공해 이제 제도에서는 보다 활발하게 아르시아산 천을 유통하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 당장 많은 물자를 유통하는 건 아니지만 새 수입처가 생겨 두 직물 공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 두 직물 공방에서는 그간 원단에 사용되는 원재료의 유통 비용을 조작해 이득을 얻고 있었으나, 이제부터 시장은 바뀔 예정이었다.

    이것으로 원작의 내용은 살짝 비틀리나, 현재 제국 유행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니 아리아를 중심으로 한 전개는 그대로 이어지리라 그레이스는 예감했다.

    실베스터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구한 아리아지만 그 드레스는 꽤 예전 물건이었다.

    즉, 황실의 역사 깊은 드레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플라워 패턴이 유행이었기에 지금 유행과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 드레스가 지금은 구하기 힘든 매우 귀한 천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알려져 더욱 이목을 끌었다.

    ‘그때 작중에서 아리아의 외모 찬양은 다른 캐릭터들과의 은근한 비교로 시작했지.’

    배경 인물들이 다른 레이디들과 아리아를 비교하며 역시 아리아가 최고로 아름답다며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때, 유독 폄하당한 인물이 나오고 그 캐릭터는 아리아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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