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5)화 (95/131)
  • 95화

    잠시 후 시종이 잔에 음료를 따라 주자, 잔 표면에 보글보글 달라붙는 작은 기포를 눈치챈 소후작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그 물이네요.”

    “소후작 부인께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고르게 되었어요.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안타깝기도 했고요.”

    샤를 소후작 부인은 은은한 붉은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과육을 감상하다 한 입 머금었다. 그레이스가 열심히 배합한 만큼, 멋진 풍미가 느껴졌다.

    과일의 풍요로운 달콤함과 산미, 와인의 향 그리고 그녀가 종종 그리워했던 고향의 물을 느끼자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비단 그리움뿐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맛있었다.

    ‘괜찮나 보네.’

    그레이스가 굳이 샹그리아를 택한 이유는 흉내 낸 와인은 결국 진짜 와인의 풍미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탄산수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이런 음료가 세간에는 없을 거라 예상한 그녀는 과일의 맛으로 부족한 풍미를 메우기로 했다.

    예전에 티백의 떨어지는 품질을 블랜딩으로 메웠듯이.

    소후작 부인의 반응이 괜찮다 못해 매우 긍정적이자, 처음 보는 와인을 흉내 낸 음료에 손님으로 온 이들이 흥미를 보였다.

    그레이스가 이를 놓치지 않고 손짓하자 샐리가 서둘러 밖에 대기시켜 둔 선물 상자를 여럿 가져와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건 과일은 들어 있지 않지만, 풍미는 느껴질 거예요. 차게 해서 드세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랍니다.”

    이렇게 하면, 베이비 샤워의 주인공만을 위한 선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응이 좋은 이상 이 음료는 실제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어치를 했다.

    샤를 후작가는 사교계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의미는 여기 있는 손님들도 한가락 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사교계의 정점에 있는 이들은 유행을 따르기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행을 주도하는 자들이었다.

    이 샹그리아가 그들의 마음에 든다면 그들은 이 샹그리아를 이용해 유행을 이끌어 가고자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탄산수를 이용할 테고, 그럼 소후작 부인의 고향도 휘청거리던 경제가 다시 바로잡히겠지.’

    탄산수도 평생 가지는 않을 테니 곧 다른 사업안을 고려해야겠지만, 사업의 밑천을 대기엔 나쁘지 않다. 그레이스가 어떤 의도로 가져온 선물인지 알아챈 것인지 소후작 부인은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

    그레이스는 그런 소후작 부인의 손 위에 작은 상자를 하나 더 쥐여 주었다.

    “이건 또 다른 선물이랍니다. 모두에게 같은 것을 나누어 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부러 자신의 의도를 숨기겠다는 양. 물론 숨겨진다고 숨겨지는 건 아니다. 그레이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래 ‘의도치 않게 알려지는 익명 기부’ 쪽이 좀 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 마련이었다.

    “급히 마련한 거라,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그레이스가 따로 준비한 것은 분홍색 산호로 만들어진 참(charm)이었다.

    “분홍 산호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해요. 그중에 순산의 의미가 있기도 하고요.”

    “…….”

    “두 분을 닮은 아이를 건강하게 낳으시고, 소후작 부인께서도 평소의 일상으로 되돌아오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샤를 소후작 부인은 상자에서 작은 산호로 된 참을 꺼내 손에 쥐었다.

    “공작 부인, 역시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마치 원래부터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 같았다. 그레이스는 벙찐 얼굴로 이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도 못했다. 모두가 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샤를 후작 부인도 있었고. 그녀의 눈길은 처음보다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어째서인지 모두가 훈훈하게 그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또 뭔데.’

    그러니까 이게 빙의자 버프라는 건가?

    고작 음료 하나 선물해 줬다고 지금 다들 훈훈하게 바라보는 거냐고. 이래도 되는 거야? 그레이스는 멍하니 앉아, 그 모든 훈훈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레이스의 찜찜함을 풀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다들 기대보다 그레이스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찜찜해.’

    너무나도 찜찜했지만, 아무튼 파티는 시작되었고 무턱대고 아무나 붙잡아다가 왜 나를 그렇게 따스하게 바라보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게 빙의자 버프든 뭐든 일단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서 나쁠 게 없었다.

    다과를 아주 조금씩만 갉아먹으며 차를 마시던 중, 그레이스에 관한 주제가 나왔다.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는데 이리 뵙게 되어 기뻐요. 앞으로도 이야기로 듣기보다 직접 뵈면 좋겠네요.”

    “맞아요. 저도 실제로 뵈니까 더 좋은걸요?”

    그러다 몇몇 귀부인들의 발언으로 그레이스는 대강 추측이나마 해 보았다.

    ‘아, 그래서인가?’

    그레이스, 그러니까 펠튼 공작 부인은 안 좋은 소문이 너무나도 많은 이였다. 아마 그레이스가 모르는 추문도 많을 것이다.

    갓 사교계에 발을 들인 이들이나 멋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소문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재미 삼아 소문을 입에 올리고 또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한 추문을 들어도 실제 사람을 보면 알아서 판가름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교계의 중심이 되려면 어지간히 머리가 좋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이곳도 일종의 정치판이었다. 자기 주관과 처세술이 능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

    저들이 하는 말 또한, ‘그레이스가 추문과 달리 매우 좋은 사람이니 앞으로 밖에 자주 나와 사람을 접하며 소문을 잠재우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샬롯 소후작 부인에게 선물한 것이 소후작 부인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도 든 것이다.

    의미도 의미였고, 자신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누어 준 것도 가산점 요소였다.

    그레이스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러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더욱 용기 내어 보아야겠어요. 다른 곳에서도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레이스 또한 ‘앞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할 의지가 있긴 한데, 나랑 같이 지내 줄 거지?’라는 의미를 담아 물었다.

    그다지 부정적인 반응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이번에 그레이스가 제대로 잘 보이긴 한 듯했다.

    ‘물론 아직은 시작일 뿐이지만.’

    “그러고 보니 곧 황실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하지요. 그때 공작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저희가 있는 휴게실로 오세요.”

    “맞아요, 공작 부인. 그리고 저희보다 높으신데 말 편히 하시고요.”

    그레이스는 한 영애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여러분과 상하 관계가 아니라, 친우로서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괜찮다면 앞으로도 이리 말씀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레이스의 제안에 어린 영애는 살짝 놀라며 끄덕였다. 보통 낮은 가문의 레이디가 높은 가문의 안주인이 되면 거만해지거나 위치에 걸맞지 않게 어수룩하기 일쑤였다.

    그레이스 또한 다소 어색한 면모는 있었으나, 눈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의 호감을 얻은 상태에서 보이는 부족함이란, 그들의 올챙이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도움을 주고 싶게끔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는 준비하셨나요?”

    “어휴, 말도 말아요. 최근 유행하는 옷감은 구하기가 정말 힘들더군요. 무슨 일인지…….”

    “다행스럽게도 지난번에 선물받은 드레스 옷감이 있어 그걸 기반으로 드레스를 주문하긴 했지만, 걱정스럽긴 해요. 펠튼 공작 부인도 아직 준비 안 하셨으면 말씀하세요.”

    “맞아요. 부인께서는 이런 큰 자리는 처음이니, 유행을 잘 모르시죠? 저희가 잘 알려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소후작 부인께서는 어쩌실 예정인가요?”

    파티를 위한 새 드레스에 대해 담소를 나누던 중,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 물었다.

    “상태를 보고 참석하게요. 의미가 깊은 자리니 말이에요.”

    배가 많이 불러 있었으나 몸 상태는 안정적이었기에 그녀는 선뜻 대답했다.

    “다만 아이를 가진 동안 많이 부어 걱정이에요. 소후작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지만요.”

    “……?”

    그레이스는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흘러나온 주제에 의문스러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충분히 말랐는데요?’

    임산부치고는, 아니 그냥 봐도 마른 몸이었다. 배만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 저거 괜찮은 걸까? 하고 처음 보았을 때 걱정한 참이었다. 그럼에도 샤를 소후작 부인은 염려 가득한 얼굴로 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모임에 참석하지 않다가 큰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참석해도 될지 걱정이 되어서요.”

    그레이스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을 몰래 훔쳐보았다. 다들 자신보다 한참 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나도 꽤 많이 뺐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 체력도 붙고 체중 감량도 성공했다고 생각했건만 여기 앉아 있으니 비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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