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4)화 (94/131)

94화

“마차까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할게요.”

벤자민은 얼마 안 되는 거리였음에도 조심스럽게 그레이스를 에스코트했다.

그레이스가 마차에 앉자 벤자민이 눈웃음 지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금방 돌아올게요.”

“즐거우시면 늦어도 됩니다.”

“정말로요?”

“하하, 반은요.”

시답잖은 대화를 끝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던 벤자민이 별관을 관리하는 집사에게 명했다.

“별관의 가구 관리 내역서를 가져오도록.”

⋆★⋆

‘화려하다.’

그레이스는 마차가 멈춰 선 건물을 보고 짧은 감상을 뱉었다.

정말 지독하게 화려했다.

‘여기가 샤를 후작저도 아니랬는데.’

베이비 샤워를 진행하기 위해 따로 마련한 장소라고 했다. 그레이스는 이게 바로 로판 세계관 속 귀족들의 돈 쓰는 클래스인가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펠튼 공작 부인. 초대장을 가져오셨습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안내인은 그레이스가 다가오자 익숙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레이스가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녀를 오랫동안 알아 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맞이하는 것에서 그가 얼마나 노련한 자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네.”

그레이스가 초대장을 보여 주자 확인한 안내인이 바로 그녀를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얼마나 안전을 기했는지, 곳곳에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레이스의 선물을 들고 있는 기사와 샐리도 호위의 규모에 놀랄 정도였다.

‘점점 좋은 향기가 나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갈수록, 파티의 분위기에 걸맞게 부드러운 색과 향이 느껴지며 담소를 나누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가 방에 도착하자 들려오던 대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든 귀부인이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 펠튼, 펠튼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안내인이 그레이스의 도착을 알렸다.

“…….”

모두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저들이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그레이스가 사교계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기회가.

베이비 샤워의 호스트인 샤를 소후작 부인이 반갑게 그레이스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펠튼 공작 부인. 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나 뵙게 되었네요.”

“부족함이 많아 늘 고민하다 실례임에도 이리 오게 되었답니다.”

작위로 따지자면, 그레이스가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존칭을 쓰는 건 다소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제국에서 정해 준 작위의 이야기였지, 여기선 그레이스가 예의를 챙겨서 나쁠 게 없었다.

‘역시 와 있네.’

샤를 후작 부인. 아직 정정한 그녀가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사실상 소후작 부부가 정계와 사교계에서 활동 중인지라, 후작 부인은 대부인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작위상으로는 그레이스가 위였으나, 입지로 따지면 후작 부인이 더욱 위였다. 여기서 그레이스가 후작 부인에게 하대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애초에 손주까지 볼 어르신에게 반말 쓰는 것도 편하지 않고, 내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후작가는 가족끼리 사이가 좋았어.’

그런 와중, 며느리인 소후작 부인에게는 하대하고, 후작 부인에게는 존칭을 쓰면 오히려 더 불쾌함을 느낄 것 같았다.

‘이건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조금 어수룩하지만 착해 보이는 쪽이 낫지 않나? 하고 그레이스는 판단했다. 그녀에게 있는 악평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계산이었다.

여기는 사교계의 이야기가 여러 신문사에 실리는 세계였다. 그러니까, 유명한 귀족은 지구의 언어로 셀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샤를 후작가가 언론에 시달린 적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조금 어수룩하지만 착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답답하지만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 확률이 높았다.

이른바 ‘사람이 좀 답답하지만 소문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작전이었다.

“공작 부인,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샤를 후작 부인이 상석에서 일어나 그레이스를 반겼다. 그제야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스가 어렴풋이 짐작한 것처럼 이 파티에서 그레이스는 조금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샤를 소후작 부인이 한걸음에 나와 그레이스를 반긴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소후작과 벤자민이 사이가 좋았다고 하니까 이 정도인 거겠지.’

그래도 그레이스의 지위를 고려해 자리는 후작가의 근처, 즉 손님 중 최고 상석이었다. 소설에서 종종 봐 온 치졸한 따돌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가지고 온 선물을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건넸다.

“후작가의 위상이 대단하여, 무엇을 드려도 누가 될 것 같아 고심 끝에 준비하였어요. 부디 마음에 드시길 바라요.”

“어머.”

소후작 부인은 선물 상자를 받자 사르르 웃었다. 본디 베이비 샤워 때는 선물을 가져오는 게 관례였기에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행복하다는 듯 띤 미소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사교에 능숙한지 알 수 있었다.

“마침 조금 전에 받은 선물을 열어 볼까, 하고 이야기 나누고 있었답니다.”

받은 직후 여는 게 아니라, 손님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하나하나 열어, 왜 이런 것을 선물해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의미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선물 개봉식을 끝낸 다음 차를 마시며 친교를 다진다.

‘제발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그레이스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며, 다른 이들이 준비한 선물이 개봉되는 것을 기다렸다. 이 경우에는 제일 처음 선물한 이의 것부터 열었다.

물론, 그것은 샤를 소후작이었다.

“어머나!”

“이것 좀 보세요. 별장 소유권이래요.”

그레이스는 처음 나온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자마자 체할 뻔했다. 이 미친 부자 귀족들은 사랑 주접도 격이 달랐다.

“소후작님께서 소후작 부인을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편지도 있네요, 읽어 주세요!”

“어디 보자…….”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따스하고 한적한 곳에서 아이와 함께 유유자적 쉬다 오길 바라며…… 소후작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리지만 그레이스의 동공은 잘게 떨렸다.

‘보통 귀족은 이래?’

이 몸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고, 그녀의 기억도 감정도 물려받았지만 애초에 그레이스 자체의 생활도 검소했다.

오죽하면 그녀 몫의 품위 유지비는 거의 쓰이지 않아 그대로였고, 그녀가 한 최고의 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건 지난번 차밭 구매였다.

‘나, 잘못 선택한 건가?’

물론 그레이스가 준비한 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한 가치가 있었다. 근데 이 전제도 반응이 좋을 때만 통했다.

즉, 미미한 반응이 나타나면 이 선물은 정말 성의 없는 무언가가 될 뿐이었다.

샤를 후작 부인은 새로운 마차를 한 대 선물했다. 신형 마도구를 장치하여 쾌적하고 흔들리지 않으니 좋을 거라는 설명이 있었다.

이 두 선물만으로 대체 얼마의 돈이 들었을지 그레이스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선물이 풀릴 때마다 경청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로 갈수록 화려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품목이 겹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다들 베이비 샤워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기와 관련된 용품을 많이 가져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레이스가 생각했던 보석이 박힌 황금 딸랑이도 있었다. 소후작 부인은 귀엽다고 했으나, 후작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손님 중 아이를 키워 본 지체 높은 가문의 귀부인들 또한 웃고 있었으나 어색해 보였다. 저것이 아이에겐 꽤 좋지 않다는 걸 아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품목이 겹치다 보니, 의미를 설명해도 무의미했다. 똑같은 사유를 말할 때 민망했는지 말을 더듬거리는 레이디도 보였다.

시간을 맞춰 왔음에도 마지막에 도착해, 가장 마지막에 개봉하게 된 그레이스의 선물은 투명한 와인 병에 담긴 맑고 붉은 음료였다.

“와인?”

어떠한 라벨지도 붙어 있지 않는 와인은 값어치도 측정할 수 없었기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안에 여러 종류의 과일 알갱이가 담겨 있다는 점이었다.

“과일 와인 같은 걸까요?”

“소후작 부인께서 과일을 좋아하시긴 하지만, 술 선물은 좀…….”

더군다나 이번에 샤를 소후작 부인은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젖을 직접 물리기로 하였으니, 그동안은 술도 마실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취하지 않는 술이니 괜찮아요. 알코올이 들어가 있지 않거든요.”

“어머. 그럼 주스 아닌가요?”

“그래도 맛은 와인을 흉내 낸 주스이니, 술 대신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여러 가지를 넣어서 만들었거든요.”

샹그리아였다.

그냥 샹그리아도 아니고 포도즙, 오미자 그리고 갖은 향신료를 섞어서 와인의 풍미를 낸 다음 단델리온 남작령의 탄산수를 넣은 샹그리아.

그레이스는 임산부에게 해롭지 않은 향신료를 조합해 와인의 풍미를 내느라 고생한 지난날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과일이 담겨 있는 건 사실 금방 마시는 게 좋거든요.”

“아…….”

샤를 소후작 부인이 와인을 좋아하는 건 유명했다. 소후작과 만나게 된 것 또한, 제도에 있는 유명한 와인하우스를 기웃거리다가 소후작이 실수로 소후작 부인의 드레스를 더럽힌 것이 계기였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를 가진 후로 술 한번 마시지 못했으니, 갈증이 이는 것도 당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