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대화는 잘하셨습니까?!”
“각하?! 혹시 계속 여기서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마차에 있다가 잠깐 나왔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벤자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 근처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쿠키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레이스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실제로 그레이스는 시레니와 대화하며 차만 마시고, 케이크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스스로 조절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의 성정, 고집을 알았다.
“이 가게에서 제일 설탕이 적게 들어간 것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래도 먹어 보니까, 맛은 좋더군요.”
벤자민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진심으로 받아 주길 바라는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안 받아 주면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아뇨, 조금 슬퍼진 채 거절당한 쿠키는 제 입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물론 부인 탓은 아닙니다.”
“…….”
그레이스는 눈치 보는 낯짝을 한 채 우울한 목소리로 뻔뻔스레 투정 부리는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저게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벤자민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간 그레이스는 포장을 연 다음 쿠키 몇 조각을 그의 손에 올려 주었다.
동그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했다.
“수수료예요, 수수료.”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와 제 손에 올려진 동그란 모양의 쿠키를 번갈아 보던 벤자민이 푸스스 웃었다.
“그렇군요.”
⋆★⋆
며칠 전.
시레니 하피의 비서, 허모서는 심란했다.
최근 들어 그녀가 모시는 상사이자 대상단주인 시레나 하피가 뛸 듯이 기분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상사의 기분이 좋으면 긍정적 신호가 아닌가? 싶겠지만, 조금 다른 문제였다. 시레니가 며칠 전부터 한 편지를 봤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발신인과의 약속을 잡은 뒤로 오매불망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고 보니 그 편지의 주소가 거기였나?’
신원불명의 친구.
시레니에게는 신원불명의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녀가 아르시아 왕국에서 수레를 끌고 나와 장사를 시작할 때 린덴 자작령에서 만난 한 꼬마 여자로,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라며 상단 사람들에게 매번 자랑했다.
“얼마나 똑똑한지 알아? 어? 너희 다~ 본받아야 해. 그 아이가 너희보다 똑똑해~!”
다른 곳에서는 예의를 챙기고 존댓말을 쓰는 시레니였지만, 사석에서는 느슨하고 격이 없었다. 그녀의 비서는 그 ‘친구’가 시레니의 저런 본성을 아나 심히 궁금했다.
‘분명히 모르고 속고 있겠지.’
시레니는 그 ‘친구’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상단이 커지고 난 후에도 계속 린덴 자작령을 방문했다. 사유를 물어보니 작은 친구가 보는 눈이 좋았다고 한다.
세이렌의 노래의 대표 상품인 염색약 또한, 작은 친구가 제 머리 색에 대해 투덜거린 것을 계기로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시레니는 상단의 몸집이 과하게 커지며 대상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준비를 해야 했고 피시언족을 구출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그녀는 작은 친구와의 소꿉놀이 같은 만남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하여, 세이렌의 노래로의 직통 주소가 아니라 ‘가짜 주소’를 하나 건네어 연락을 이어 나갔다.
다만, 시레니가 몰랐던 것이 있다면 작은 친구 또한 가짜 신분으로 시레니에게 연락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작 부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시레니에게 금을 건네어 도와주면서도 그녀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시레니가 제 작은 친구를 찾아보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금을 받을 때쯤이 되었을 땐, 슬슬 작은 친구를 제 상단에 넣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상하게 아무리 수색해도 ‘작은 친구’를 찾지 못했다.
“그야 당연하지!”
시레니는 흥분하며 외쳤다.
“그 아이가 그 펠튼 공작 부인이라니 말이야!”
이게 말이 돼? 그녀는 허모서를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무능하고 못난 공작 부인이라니, 그딴 건 다 거짓말이야. 그런 가십지 따위 말도 안 된다고. 그 아이랑 조금만 대화해 보면 다들 좋아하게 될걸?”
시레니는 확신에 차 있었다. 누구보다 가치를 잘 알아보는 대상인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
“다, 다 됐다.”
그레이스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보며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조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되었다.
‘오미자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걸 그렇게 샀을 때는 솔직히 돈지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이야. 역시 돈은 최고다.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염려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스가 마련한 선물 상자를 바라보았다. 만드는 과정까지 지켜본 그녀로서는 이것의 금전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다른 귀부인들이 준비해 오는 것에 비해, 마님의 것은 저렴하여 성의 없다고 느껴질까 봐 걱정되어요. 열심히 만드신 건데요.”
“아냐, 분명 좋아할 거야.”
그레이스는 소후작 부인뿐 아니라, 손님 수에 딱 맞게 준비된 상자를 보며 웃었다.
“이건 비용 외에도 큰 가치가 있거든.”
그레이스 역시 대표할 만한 것이 없는 작은 영지 출신의 귀부인으로서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았다.
“얼른 이 상자를 마차에 옮겨 주겠니? 늦고 싶지는 않거든.”
“네, 맡겨만 주세요!”
샐리가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다른 이들과 함께 부랴부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레이스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중 별관을 담당하는 집사가 편지를 가져왔다.
‘시레니가 보내온 거네?’
시레니의 편지에는 버킨가를 비롯한 직물 공방 사람들의 신원을 전부 ‘세이렌의 노래’에 옮겼으며, 그중 톰 버킨의 경우에는 아예 위조 신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의 경우에는 내가 더 긴밀하게 사용해야 하니까, 시레니가 말하지 않아도 잘해 줬어. 가자마자 신원 파악을 확실히 했나 보네.’
신전이 톰 버킨을 처치하지 못한다 해도, 그를 주시할 가능성이 높으니 다른 신분으로 활동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또…….’
세공사도 구했고, 수출 협의를 위한 인력도 아르시아 왕국으로 출발했고……. 내용은 끝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여러 장의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마지막 문장을 보고 시선이 멈추었다.
“……?”
제가 그 헛소문을 다 잠재워 버릴 테니 걱정 마세요.
‘뭐지.’
그 밑에 적힌 문장은 펜으로 거칠게 지워져 있었지만 대략 이렇게 적혀 있는 것 같았다.
그 대단하신 펠튼 공작님께선 뭐 얼마나 바쁘시다고 그딴 허무맹랑한 헛소문 하나 막지도 못했는지.
‘아니, 이게 진짜 뭐지.’
굳이 이렇게 보낼 것까지 있나. 이거 일부러 그런 거다. 새로 쓰지 않고 대충 지워서 보낸 건 감출 생각이 없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이걸 벤자민에게 보여 줄 생각도 없긴 하니까.’
벤자민이 남의 편지 내용물을 뜯어 보는 성격이 아니라 망정이지, 만약 봤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생각보다 시레니는 막무가내인 성격인 걸까?’
그보다 시레니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그날은 꽤 차분한 사람이었던 거 같았는데…… 하고 그레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차 쪽으로 향했다.
‘펠튼 공작이라는 자리가 여유로운 게 아니긴 하지.’
제국 내 공작의 수는 손꼽혔고, 그중에서 가장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가문이 펠튼 공작가였다.
그럼에도 시레니가 남긴 말은 그레이스에게 다른 의문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왜 벤자민은 그레이스에 대한 추문을 잠재우지 않았는가?
그레이스는 ‘원작’ 내용을 기억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레이스, ‘펠튼 공작 부인’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욕은 심각하게 먹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나…….’
이러한 추측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레이스의 마음이 시큰거렸다.
“마님?”
준비를 끝낸 샐리가 그레이스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한동안 그녀의 근처에서 스산한 기운만을 뽐내던 검은 연기가 꾸물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등 뒤로 탄탄한 벽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벽이 아닌데.’
“오늘이 그날 아니십니까?”
벤자민의 목소리였다.
그레이스는 별관 안에서 보는 벤자민이 매우 낯설어 입이 미약하게 벌어졌다.
그녀의 놀란 얼굴에 벤자민이 머쓱한지 목을 가다듬으며, 변명했다.
“마차가 앞에 대기되어 있는데 한참 나오지 않으셔서 걱정되어 와 봤습니다. 그, 전에 부인께서 들어와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원래 그때 한정이었다만, ‘그날만’ 허락한다고 그레이스가 날짜를 특정해서 말한 적 없으니 벤자민은 살짝 약아빠진 수법을 사용한 셈이었다.
린덴 자작령에서의 납치 소동이 그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레이스가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자, 그도 괜히 찔렸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아뇨, 들어오셔도 돼요.”
“……!”
“진짜로요.”
신기한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방금까지 벤자민을 생각하며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또 안심되었다.
그러자 마치 그녀의 기분이 보호막이라도 되듯이 검은 안개는 다가오다 말고 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