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2)화 (92/131)
  • 92화

    “물론 그건 아르시아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가정하의 일이지만요.”

    “제국에서 제일가는 대상단을 이끄는 이인데 설마 불가능할까요?”

    아리아야 이득을 거의 보지 않는 조건으로 아르시아 왕국과의 거래를 이끌었지만 그레이스는 그럴 생각 따위 없었다.

    ‘나는 지금 입지가 필요해.’

    게다가 그레이스는 시레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나름 아르시아 왕국의 은인 포지션임을 깨달았다.

    금전적 이득이야 시레니가 얻겠지만, 이를 통해 얻을 영예는 전부 그레이스의 이름으로 올라갈 것이다.

    “제가 그레이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군요. 실패하면 손해가 클 텐데 말이에요.”

    “상인들도 그러니까요. 이득을 보려면 손해도 감수해야죠.”

    상인들도 100퍼센트 확신하며 모든 일에 뛰어드는 게 아니었다. 물론 시레니는 자신이 성공할 거란 확신 또한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제국인이더라도, 시레니가 도와주면 아르시아 왕국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기 쉬울 테니까.’

    아르시아 왕국 입장에서 피시언족은 일종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재능을 가졌건만, 약간 다른 외관 탓에 모두가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만든 것을 탐내는 자들이 고와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부 피시언족은 아르시아 왕국에서 만든 보호법을 갑갑하게 느꼈다.

    왕국에서만 자라 차별을 직접 겪지는 못해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삼엄한 법의 공기만을 맡으며 자란 세대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용해 먹은 게 바로 타국인이었다.

    ‘원작에서 아리아가 피시언족 일에 직접 개입한 적 없으니 소설에서도 잘 묘사되지 않았나 보다.’

    그러니 시레니가 피시언 혼혈이었다는 중요 정보가 나오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또한, 아리아에게 일정 이상의 호감을 보이지 않고 그 뒤에 소설에서 사라진 것도 이런 사유라면 납득이 갔다.

    ‘원작에서의 그녀는 파업이 벌어진 후, 나머지 피시언 혼혈이 어디로 갔을지 추적해야 했을 거야.’

    두 공방에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 있는 일을 축소하기 위해 파업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착취하던 노동 인력을 제국 곳곳, 또는 다른 나라로 보내 버렸다.

    ‘가지가지 한다.’

    이것이 그레이스의 감상이었다.

    시레니는 인권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상단주였을 뿐이지만, 피시언족의 피가 흐르는 이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고 자기 민족에 애착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인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아르시아 왕국이 이대로 가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피시언족뿐 아니라, 아르시아 왕국엔 인재가 많았다. 이번 기회에 긍정적으로 거래를 이어 나가기 시작하면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해 나라의 체급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아르시아 왕국이라면 더 솜씨 좋은 세공사도 있을 거야.’

    제국에도 좋은 보석 세공사가 많지만, 아르시아 왕국을 따를 자는 없었다. 아리아가 아르시아 왕국과 거래를 트며 만나게 된 아르시아 출신의 세공사들은 전부 놀랍도록 섬세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 목걸이를 하고 온 이유도 그러했다.

    그녀의 목에는 작게 커팅된, 아직 이름도 없는 보석 한 알이 걸려 있었다. 지난번에 가져온 수확물이었다.

    “시레니, 이번에 원단 수입에 관한 계약을 아르시아 왕국과 맺으며 세공 기술 협약도 맺고 싶어요.”

    “그건 목에 걸려 있는 그 보석 때문인가 보군요.”

    시레니는 애초부터 그레이스가 오늘 걸친 것들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걸친 것은 전부 시장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다.

    “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번 파티에 필요하거든요. 두 가지 물건으로요.”

    “솜씨 좋은 세공사는 제도에도 여럿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장인이 필요한가 보군요.”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레니는 그레이스의 질문에 생각에 잠긴 듯, 찻잔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가벼이 두들기다가 웃었다.

    계산을 마친 상인의 미소였다.

    “우린 앞으로 더욱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아르시아 왕국과 거래를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게이트 설치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다. 게이트 사용이 많을수록 돈을 버는 건 펠튼 공작이겠지만, 아르시아 왕국의 문을 연 것은 그레이스의 공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거래하고 있는 공방의 위치를 알려 줄 테니, 그쪽에 있는 사람들의 신변을 당신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시레니는 제 사람은 끔찍하게 아꼈다.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시레니는 그들의 안전을 우선하며 챙겨 줄 터였다.

    ‘이러면 혹시 모를 톰 버킨의 안전도 보장되지.’

    “그러면 앞으로 나와의 연락은…… 원래 그 공방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을 통해 하는 걸로 부탁드릴게요. 당신은 워낙 바쁘고, 저도 세이렌의 노래 사람들보다는 원래 알던 사람이 편해서요.”

    “여부가 있을까요.”

    그레이스는 이렇게만 말해도 톰 버킨이 알아서 기회를 얻을 거라고 믿었다.

    시레니는 근처에 있던 보좌관을 불러 계약서를 꺼내라 일렀다.

    많은 항목이 비어 있었으나, 시레니는 조금 전의 대화를 기반으로 계약 내용을 채워 나갔다.

    “당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적지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대등하게, 수익 또한.”

    “오히려 수익 비율이 제 쪽이 높은 것 같은데요?”

    “펠튼 공작가와 주기적으로 거래하는 상단, 이라는 이름값은 꽤 값지니까요.”

    시레니가 방긋 웃었다. 애초에 그 타이틀만으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마지막 조항을 보고 서명했다.

    본 계약은 향후 협의로 조정 및 파기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야 좋지.’

    어차피 황실 파티 이후 세이렌의 노래 측에서 먼저 다가올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지금 굳이 먼저 운을 떼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시레니가 이 목걸이의 보석에 관심을 갖고, 가치를 잰 정도면 되었다.

    ‘그다음은 이거.’

    한 번에 전부 다 주면 배불러지기 마련이다. 그레이스는 그전에 원하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그녀는 서명한 계약서를 시레니에게 건넸다.

    “일은 전면으로 맡겨도 괜찮을까요? 제가 한동안 바쁠 예정이라서요.”

    “황실 파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다른 일정이 더 있으신가 보군요.”

    “네, 샤를 소후작 부인의 베이비 샤워에 참석할 예정이라서요.”

    “아하, ‘세이렌의 노래’ 측에도 관련하여 물건 의뢰가 들어왔었습니다. 최고급품 중에서도 최고인 아기 물품을 구하느라 고생이 많았죠. 아무래도 레이디의 안목은 뛰어나지 않습니까?”

    “…….”

    시레니는 매우 자연스럽게 말을 흘렸으나, 의미 없는 내용이 아니었다. 즉, 베이비 샤워에 참석하는 많은 이들이 아기 물품을 준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전부 최고급품이니까, 순금 딸랑이에 온갖 보석을 박아서 대령해도 기억에 남지 않을 확률이 높겠구나.’

    오히려 아이에 대해 잘 모른다며 안 좋은 인상을 주기 쉬웠다. 금은 무거운 금속인 만큼 거기에다가 보석까지 달아 주면 아이가 갖고 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무슨 아기 물품을 샀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건 고객의 개인 정보였고, 애초에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걸 가져간다고 해도 결국 이건 똑같이 ‘아기 물품’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었다.

    ‘그럼 역시 샤를 소후작 부인만을 위한 것이 좋겠네.’

    샤를 소후작 부부는 워낙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부부를 위한 선물을 가져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기를 위한 것, 부부를 위한 것을 받다 보면 결국 나를 위한 물건을 갖고 싶어질 테니까.’

    그럼 무엇을 받아야, 정말 ‘나’를 위한 물건이라고 여길까? 그 해답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도출되었다.

    “소후작 부인의 고향인 단디레온 남작령의 유명한 물건을 알 수 있을까요? 유명한 게 없다고 했지만, 그건 외지인의 관점이지, 영지 내에서 즐기는 것이 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의 생각을 바로 읽은 시레니는 입가에 옅은 호선을 유지한 채 끄덕였다.

    “단디레온 남작령의 영주민이 마시는 독특한 물이 있어요.”

    “독특한 물이요?”

    물이 독특해 봤자 얼마나 독특하겠는가 싶어 그레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사실은 그걸 몇 번 팔아 볼까 생각해 보긴 했는데요. 좋은 평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포기했어요.”

    대체 얼마나 특이한 물이길래?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아.’

    “혹시 그거 마실 때 톡톡 튀는 물을 말하는 건가요?”

    “잘 아시네요. 그레이스도 마셔 봤나 봐요?”

    그레이스는 시레니의 눈길이 닿지 않는 테이블 아래에서 양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이거, 잭팟이다!

    ⋆★⋆

    ‘아르델 백작령의 광산 채굴이랑 가공, 탄산수는 시레니가 공수해 준다고 했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시레니에게 알차게 부탁한 목록을 떠올리며 그레이스는 뿌듯함을 느꼈다.

    탄산수가 도착하고 나면 ‘그것’을 만든다.

    ‘마침 딱 알맞은 재료가 있지.’

    그레이스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기분으로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밖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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