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레이스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자, 그녀의 눈치를 보던 벤자민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가 있겠습니다.”
“저, 정말요?”
“네, 부인의 친우분이라고 했으니까요.”
벤자민은 힐긋, 시레니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고마워요.”
이는 그레이스의 뒤에 언제든 벤자민 펠튼, 펠튼 공작의 비호가 닿아 있음을 시레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시레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인인 그레이스를 배려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벤자민이 밖으로 나가며 손짓을 몇 번 하자, 몇몇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은 남아 있었으나, 멀리 떨어진 자리였고 시레니 또한 그 정도 인원은 멀리 앉혀 대동했기에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레이스가 다시 자리에 앉자, 시레니가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되었답니다. 1년 전까지 연락을 하긴 했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요.”
“네, 1년…….”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고 넘기려다가 멈췄다.
‘1년?’
즉,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레이스가 공작 부인이 된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녀에게 기억이 없는 그 1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것저것 캐묻고 싶은 욕구를 애써 억눌렀다. 상대방은 대상단주, 괜히 의심을 사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알 수 없는 호의라는 건 정말 개인적인 친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어.’
비록 그 친분이 실제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심장이 욱신거렸다.
“……근 1년간, 많은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지금으로서는 대충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판단이 옳았는지, 시레니는 끄덕였다.
“예, 공작가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불미스러운 일.’
“그래도 1년 만에 그레이스가 연락을 주셔서 기쁠 뿐이랍니다. 더군다나, 오늘 입으신 드레스도 매우 아름다워서 저와의 만남에 신경 써 주신 것 같아 더욱 기쁘고요.”
시레니는 은근슬쩍 그레이스의 드레스에 대해 운을 뗐다.
그레이스는 시레니가 이 옷에 대해 반응할 줄 알았다. 이 드레스의 천은 아르시아국 출신의 피시언족에게만 전수되는 비법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
독특한 피부색 때문에 외관으로 차별받아 온 피시언족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술만이 생존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그 비법을 다른 곳에 팔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은은하거나 어두운색의 천일 뿐이었지만, 빛 아래에서는 군데군데 은은한 빛을 뿜어내, 솜씨가 좋은 피시언족은 이 특성을 이용해 밋밋한 드레스에 무늬가 더해진 것처럼 연출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이 천은 부르는 게 값이지.’
종족 자체는 차별하면서, 그들이 만든 천은 고가로 거래되는 게 웃긴 실정이었다. 사실 지금 입고 있는 건 그녀가 공방을 거쳐 거둔 피시언 혼혈들이 만들어 준 천이었다.
그들의 부모인 피시언 족이 자식들에게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제 특성을 진하게 물려받아 제국인의 신분임에도 차별받게 될 자식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 듯했다.
“당연히 신경 써야지요. 오래된 친우를 만나는 건데 말이에요. 그리고, 친우이기 이전에 시레니는 상인이지 않나요?”
“상인이기 이전에 친우인 게 아니라, 친우이기 전에 상인인 건가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상인과 손님이었잖아요?”
사실 이 천이 비싼 이유는 만들 수 있는 존재가 피시언족뿐인 것도 있지만, 아르시아 왕국을 통해서만 수입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아르시아 왕국은 제 나라 국민을 품에 안고 보호하는 습성이 강했기에, 피시언족을 차별하는 나라는 전부 적대시했다. 그런 만큼, 천을 수출할 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격을 높이기도 하고, 한 번에 대량으로 수출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귀한 것이니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순 없지.’
피시언족이 천 짜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맞았으니 말이다.
“사실, 이 드레스는 제도에서 구매했어요.”
“……!”
시레니는 그레이스의 발언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거래하는 공방이 있거든요. 시레니라면 알 거예요. 지금 제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단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물밑 소문들. 귀족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하지만, 돈 귀가 밝은 이들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그 두 공방에 물자를 납품하지 않았죠?”
“당연하죠.”
곧 파업을 실시할 두 공방은 세이렌의 노래가 아니라 다른 상단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세이랜의 노래 상단주는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공방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운영해도 대상단이 된다는 게 신기하긴 한데.’
오히려 그렇게 운영해 왔기에 사람들이 믿고 따라 이만큼 커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럼 이제 곧 그 두 공방이 파업을 실시할 예정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곧 황실에서 연회를 주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래 파업이라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이라면 잠시 버티며 뇌물 좀 바치고 가벼운 처분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파업을 하겠다며 크게 판을 벌이면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황실에서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은 법이 잘 짜여 있었지만, 신분제가 남아 있었다.
일반 평민이 귀족들의 일에 피해를 끼친다면 그 대가는 혹독했다.
다만, 시레니가 언급한 것처럼 곧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가 있다.
“네, 그것 때문에 황실에서는 적극적으로 문책할 수가 없는 입장이에요.”
이번 연회는 서부 오염의 끝을 알리며, 다시금 사교계가 활기차게 움직이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 황실이 공방을 상대로 강압적으로 나선다면 겨우 잠재운 민심이 동요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파업을 하는 건, 좋게 좋게 당신들이 원하는 이미지의 연회를 운영하고 싶으면 담합 관련 조사 결과를 재고해 달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이 세계는 꽤, 민심에 대해 눈치를 보는 편이라서…….’
“그래서, 그 파업과 그레이스가 입고 있는 드레스에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시레니는 이미 눈치챘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그레이스에게 되물었다.
“시레니 당신이 저와의 친분만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 공방을 키울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시겠어요?”
시레니는 썩 나쁘지 않은 눈치였으나, 바로 호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궁금증이 여전히 남아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거엔 반응하겠지.’
“두 공방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피시언 혼혈을 거둔 곳입니다.”
“과연.”
시레니는 이제야 제 궁금증이 해소된 듯 미소 지었다.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여전하군요, 그레이스.”
“여전하다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에요.”
그레이스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시레니는 혼자 추억에 빠졌다.
‘이럴 때는 입 다물고 있으면 반은 가겠지.’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시레니가 뭔가 정보 하나라도 흘리기를 바라며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1년간 후원한 덕분에 타 지역에 있던 피시언족을 비롯한 아르시아국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었어요.”
“……!”
1년간의 후원, 그레이스는 이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샀다는 기록은 있는데 정작 실체는 찾을 수 없던 황금.
그것은 전부 시레니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르시아의 피시언족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외관 때문에 자신들끼리 모여 사는 부족이죠. 하지만 그런 만큼 후세대로 갈수록 바깥세상에 대한 환상이 많아졌어요.”
“그런 점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이 있었겠죠.”
“네, 그랬죠. 저는 운 좋게도 겪지 않았지만요.”
“……?”
그레이스는 잠시 의아해했으나 대화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시레니 또한 피시언 혼혈이었으나,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피시언의 특징을 하나도 물려받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제국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니 시레니는 성녀가 대단한 존재인 걸 알아도, 그녀가 제국의 신전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이상의 호감을 보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굳이 황금을 사용한 이유는 환전할 때 나오는 돈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인 걸지도. 아르시아가 아닌 타국으로 갈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런 일을 도와줬던 사람이 제도에서 핍박당하던 혼혈을 구조해서 다른 공방에 정당하게 취직시켜 주었고, 다시금 비슷한 이슈로 도와달라고 한다면?
‘호감도 수직 상승 아닌가?’
시레니는 이득을 좇는 상인이지만,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자였다.
“시레니, 그래서 저는 그 공방을 시작으로 아르시아 왕국과 원단을 거래하고 싶어요.”
“애초에 이번에 일어날 파업은 두 공방에서 그간 물량을 독점해 벌어진 사태입니다만. 다시 한 공방만을 원단의 수입처로 사용하면 장기적으로 위험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최초일 뿐, 유일한 거래처는 아니에요. 그리고 이 거래는 시레니에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거래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르시아국의 원단을 대량으로 수입해 제국의 공방에 판매할 상단은 결과적으로 ‘세이렌의 노래’가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 가장 큰 금전적 이득은 시레니가 얻게 될 게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