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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0)화 (90/131)

90화

마차에서 내리니 사복을 입은 공작가의 기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몰라 마차도 가문 인장이 없는 것으로 타고 왔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 있을까…….’

그레이스는 유난이다 싶으면서도, 이런 보호를 받아들였다. 고아원 화재 사고 때, 원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왜 나를 향한 복수라고 한 거지?’

그레이스는 그 고아원 원장을 본 적도 없었다. 그 뒤에 바로 원정을 떠난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 뒤에 그레이스가 전처럼 칩거하며 침묵을 유지했다면, 좋지 않은 여론이 박차를 가했을 터였다.

‘하지만 서부 원정에 함께함으로써 시선이 다 그쪽으로 옮겨져서 여론이 희석된 거겠지.’

어쩌면 그레이스가 모르는 어디에선가 안 좋은 말이 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현재 그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레이스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것을 차근차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막막하게 보이던 멀리 있던 무언가도 언젠가 눈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좋아, 일단 이 만남부터 잘 끝마쳐 보자.’

그레이스가 한 손을 작게 주먹 쥐었다가, 카페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약속 장소는 구석, 파란 소파였지?’

카페는 생각보다 손님이 적어, 둘러보기 편했다.

“샐리, 너는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렴.”

“하지만 마님…….”

“괜찮다니까. 멀리 있기 좀 그러면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으면 되잖니.”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는 자신이 초대한 이 외의 존재가 대화에 함께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정보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그레이스는 샐리를 멀리 떨어트려 놓고,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년 여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

“처음 만나는군요.”

작위법상, 그레이스가 맞은편의 상대에게 존칭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존칭을 쓰는 이유는 현재 이 만남은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의 만남임을 은유했다.

또한 상인은 상인으로서의 만남과 존중을 선호했다. 특히, 상당히 단기간에 ‘세이렌의 노래’라고 불릴 만큼 상단을 대규모로 불린 시레니 하피는 자신이 존중받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사실 그건 상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단, 타국 출신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거 같지만.’

본심을 말하자면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쓰는 것보다는 존칭이 편했다.

그레이스는 중년 여성의 찻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와 오늘 만나기로 하신 분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찻잔이 하나만 놓여 있어서요.”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면 빈자리에 거꾸로 뒤집힌 빈 찻잔이라도 놓는 게 예의였다.

즉,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와 만남이 약속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나 그레이스가 자리를 잘못 찾아왔을 확률은 없었다. 이 카페에서 파란 소파는 여기 딱 하나였다.

‘그리고 사실 시레니 하피는 거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 무엇도 입에 대지 않아.’

혹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상대방이 도착하는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레이스는 원래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할 수는 없으니, 제국 내에 통용되는 예의에 대충 끼워 맞췄다.

“시레니 하피, 그 사람은 나를 친우라며 편지를 보내었는데…… 친우의 자리에 빈 찻잔을 두지 않는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겠죠.”

“…….”

“만약 그렇다면 유감스럽네요.”

중년 여성은 그레이스를 매우 의외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여 인사했다.

“부인을 시험하는 결례를 끼쳤습니다. 상단주님 대신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괜찮아요.”

‘아마 내가 그레이스의 이름을 판 건 아닐지 궁금했을 수도 있지.’

그레이스는 시레니가 제삼자의 눈으로 그레이스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대역을 알아챌 수 있는 눈썰미가 있을까 파악하고 싶었겠거니 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레이스와 중년의 여성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이 하나 내려왔다. 달칵, 하고 2인용 포트, 찻잔 그리고 케이크가 담긴 접시였다.

‘주문한 적 없는데?’

쟁반을 가지고 온 여성은 능숙하게 테이블을 세팅하며 그레이스의 찻잔에 차를 따라냈다.

“실례가 많았어요.”

“……!”

소설 속에서는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 그러니까 시레니 하피의 외관 묘사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시레니 하피이며 상단주라는 걸 알아챘다.

짙은 남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은 카페 종업원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상단주로서의 카리스마가 여전했다.

자연스럽게 조금 전까지 다른 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며 본인을 소개했다.

“시레니 하피입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레이스.”

“네, 네.”

“혹시 누가 그레이스를 사칭하는 걸까 시험을 한번 해 봤어요. 후후, 그런데 그런 식으로 제가 아닌 걸 알아낼 줄은 몰랐네요.”

“그간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워낙 오랜만에 뵙는 거니, 외모로 판별할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으시니 변장을 했을 수도 있고요. 세이렌의 노래는 염색약으로 유명하니까요.”

아르시아국의 옷감 염료를 머리카락에 쓸 수 있게 개발한 염색약을 유통하기 시작한 상단이 ‘세이렌의 노래’였다. 당연히 시레니가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위업이었기에 그레이스가 말하자 살짝 긍정적인 반응이 눈빛에서 읽혔다.

시레니는 그레이스를 보며 훈훈한 미소를 짓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하기 앞서 사실, 그레이스에게 이러한 심술을 부린 이유는 남편분 때문이랍니다.”

“……각하요?”

벤자민 펠튼에 관한 주제가 나올 줄은 몰랐던 그레이스가 토끼 눈을 뜬 채 시레니를 바라보았다.

시레니는 그레이스가 역시 몰랐을 거라 생각한 듯, 덤덤한 눈으로 카페 내부를 쓱 훑어보았다.

“이 카페에서 약속을 잡은 뒤, 사실 오늘 하루는 저희 상단 측에서 이 시간대에는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비밀리에 전세를 내려고 했답니다.”

‘잠깐.’

그레이스의 간담이 서늘해지며 ‘설마……?’ 하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 보좌관이 조사해 본 바로 이날 가게를 하루 통째로 대관한 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허가한 손님만 들어오는 조건으로요.”

“……!”

“예, 그분이십니다.”

그레이스는 바로 고개를 홱 돌렸다. 분명 처음에는 카페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새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그들은 모두 그레이스의 자리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비껴 앉아 있었다.

“…….”

그레이스는 눈을 부릅뜨고 모든 이를 훑어보았다. 개중 갈색 머리는 없었다.

“잠시만요.”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몇몇 이들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녀의 비장한 분위기를 읽은 탓이었다.

그레이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의 자리에서 애매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완벽하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흑발의 남성에게 다가갔다.

“이보세요.”

“…….”

“저기요.”

“…….”

등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긴장한 게 확연히 느껴졌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시면, 별관에 들어가서 4개월 동안 밖에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절대로 부인의 뒤를 밟으려고 한 게 아니고, 제 걱정이 과했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레이스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노릇이 없는 벤자민은 그대로 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사과했다.

‘염색은 언제 했대.’

그레이스에게는 그 인식 저하 마도구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걸 아는 그가 수를 쓴 듯했다.

늘 갈색 머리의 벤자민만 봐 왔던 그레이스였건만, 흑발도 꽤 잘 어울려 당황했다.

‘아, 이게 아니지.’

그녀는 축 처진 눈으로 반성했다며 눈치 보는 벤자민을 보니 순간 마음이 약해져 다른 생각으로 빠졌었다.

다시 마음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저에게 말도 없이!”

“그치만…….”

어째 그레이스의 눈에 허상의 강아지 귀가 축 처져 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한 제국의 공작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실 벤자민이 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레이스의 앞에서는 늘 이랬기에, 그녀로서는 벤자민의 사회생활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께서는 늘 저에게 말없이 나가셨다가 위험해지시니 걱정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음…….”

이건 그레이스도 좀 할 말이 없었다. 밖에 나갔다 구토하고 쓰러진 전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도요. 이번엔 기사들도 대동했잖아요. 이렇게 펠튼 공작가의 사람으로 채워져 있으면, 상대가 불쾌해할 거예요.”

이러한 태도는 대놓고 ‘나는 당신을 불신하며, 언제든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라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에는 불가피하게 이런 제스처를 취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상대였다. 시레니는 일단 그레이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유 모를 호의라는 게 조금 무섭지만.’

더군다나 만약 대화가 잘 이어져 나가면, 그레이스는 벤자민 몰래 시레니에게 부탁해야 할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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