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당연히 그레이스는 알면서 물어본 것이다. 서부 오염이 완전히 정화되면 황실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주최한다. 당연히 신전과 성녀 아리아의 공훈도 널리 알린다.
“예, 아직 공식으로 고지된 건 없지만요. 서부 오염이 정화되었으니 연회를 주최하겠지요.”
그리고 그 연회 이전에 샤를 소후작 부인의 베이비 샤워 모임이 있을 것이고, 그레이스는 이 모든 모임을 알뜰하게 이용할 예정이다.
“그 파티에 저도 가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부인께서요?”
벤자민은 매우 놀란 듯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레이스의 사교계 모임 참석률은 매우 저조하다 못해 ‘0’에 수렴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다 옛말로, 이번 파티는 원작에서도 중요한 이야기였으며 전개를 비틀기 위해서는 그녀의 개입이 필요했다.
“네, 그리고 그 파티에 성공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요.”
⋆★⋆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와 물건은 다행스럽게도 마음에 쏙 들었는지,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좋았어…….”
직물 공방의 파업에 대한 소문 때문에 더 호감으로 보인 듯했다. 그레이스의 앞에 놓인 잔에 커피를 따르던 샐리가 웃었다.
“좋은 답변을 받으셨나 보아요.”
“응, 다행스럽게도 말이야. 갑작스러운 불청객이라 안 좋게 볼 것 같았거든. 다행이지?”
최근 그레이스는 밖에 나가는 게 아니면 침실, 혹은 서재에서만 머물렀다. 다들 그레이스의 행동반경이 넓어진 건지 좁아진 건지 아리송해하며 걱정했지만, 원인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연기였다.
‘흠…….’
베이비 샤워에 가져갈 선물도 걱정이었다만, 저 연기를 없앨 방법도 문제였다. 그레이스는 그날과 비슷한 시도를 재차 해 보았지만 같은 빛과 힘이 나오진 않았다.
‘그리고 벤자민이 가구를 관리한다고 해도 실제로 판매처에 연락을 한 건 다른 자일 거야. 그자가 누구인지, 실제로 가구를 공급한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해.’
보통은 가문의 안주인이 관리하는 재정관리표를 확인하면 되겠지만 살림을 돌보지 않은 그레이스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잠깐.’
그레이스는 딱 한 군데, 연기가 나지 않는 곳을 떠올렸다.
“샐리, 별관의 서재는 누가 꾸몄더라?”
“글쎄요? 저도 마님을 모시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랬지, 참.”
그레이스는 질문할 대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 그런데 새 가구를 들일 때마다 서재 쪽은 건들지 말라고 집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주인님께서 명령하셨다고요.”
“서재 쪽을? 그럼 다른 곳은 새 가구를 자주 들였던가?”
그레이스가 연신 질문을 함에도 샐리는 딱히 의아해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 별관에서만 머문 1년 동안의 기억은 그레이스에게도 존재하긴 했으나, 주변 환경을 둘러볼 정신머리가 없었는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전에는 종종 들이는 편이었죠. 마님께서 내부에만 계시니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라고요.”
‘진짜 돈지랄…….’
아직 감각이 소시민에서 채 벗어나지 않은 그레이스는 자신 때문에 가구를 종종 바꾸었다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공작가에서 사는 가구라면 한두 푼이 아닐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구들이 그레이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니.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위협을 끼치는 물질.
‘내가 슈X맨도 아니고. 저게 크X토나X트야 뭐야?’
그레이스는 실베스터가 떠올랐다. 아리아가 그레이스에게 그와 비슷하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베스터가 무언가 알지도 모른다. 모를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이 소설 내에서 저주에 걸린 유일한 존재가 실베스터인 만큼 그자라도 붙잡아야 했다.
‘역시 아리아를 도와줘야겠어.’
애초부터 아리아를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도와주었다는 어필을 더욱 적나라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리아라면 죽고 못 사는 게 실베스터고, 저번에 그레이스가 아리아에게 조언을 준 참이었다. 그 조언이 잘못된 곳을 스친 게 아니라면 둘에게 좋은 진전이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이제 다음 베이비 샤워.’
거기서 샤를 소후작 부인의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주고, 파벌을 만든다.
‘그런데 뭘 주는 게 가장 마음에 들까?’
이건 좀 난제였다. 그레이스는 베이비 샤워 파티에 가 본 적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마, 마님?”
“…….”
그냥 마음에 드는 정도로 그치면 안 되었다. 선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돈…… 돈 칠…… 아니, 이건 좀 아닌,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너무 소시민이라서 그런가?’
그레이스가 한때 황금만능주의로 점철되어 있던 SNS를 떠올리며 찻잔을 움켜쥘 때였다.
“마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직물 공방인가?”
“아뇨. 마님의 친우…….”
이때까지만 해도 그레이스는 ‘이 몸에 친구가 어디 있어?’라고 생각했다.
“……시레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
그레이스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편지를 가져온 집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그거 이리 주게!”
“여, 여기 있습니다.”
그레이스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집사와 샐리는 서로 시선만 교환하다가 말았다. 딱히 나쁜 신호로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정말 연락이 왔어.’
시레니, 그레이스가 린덴이던 시절 교류했던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로서는 밑져야 본전으로 연락을 넣은 것이었는데, 진짜 답장이 와 심장이 쿵쿵 뛰었다.
편지는 오랜만에 연락이 온 친우를 향한 반가움, 애틋함, 그리고 만나고 싶다는 어필…… 그리고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줄줄 3장에 걸쳐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놀라서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 시레니 하피 올림]
‘바로 앞에 있었잖아……!’
그레이스는 대체 왜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가 자신에게 이토록 호의적인지 알 수 없었다.
‘주소가 공작가라서 그런가?’
그레이스는 이 생각은 금방 철회했다.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였던 시레니는 아리아에게도 친절하긴 하지만 벽은 분명히 존재했다.
오죽하면 소설을 읽었음에도 그레이스는 상단주의 진짜 이름을 전혀 몰랐다. 상단주는 설정상 손님을 만날 때마다 쓰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 이름들 중에 ‘시레니’는 없었으니, 이 이름 역시 진짜 이름 혹은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가라서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나름 호의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네.’
그레이스가 아니라 그녀를 뒷받침하는 배경에 관심이 생겼더라도, 그걸 이용해 먹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 한 번의 기회를 장기적으로 이어 나가는 건 이번 만남을 내가 어떻게 쓰냐에 걸려 있겠지.’
그레이스는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소설 속 상단주가 좋아할 만한 걸 떠올렸다.
‘큰일 났네, 딱히 정보가 없어.’
그는 대상단의 주인이라는 엄청난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소설 속에서는 딱히 지분이 없었다.
아르시아 왕국과의 거래 중후반부에 잠깐 등장해 아리아와 몇 번 대화하고, 포스 조금 풍기며 뭐 있는 척하더니 그게 끝이었다.
‘허무한 퇴장이었지.’
그레이스가 아는 건 그가 아르시아 왕국 출신이라는 점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소설의 내용을 대화까지 놓치지 않고 다 외우지 않았기에 놓친 점도 있을 수 있긴 했다.
‘그래도 준비는 해 볼까?’
그레이스는 서랍에서 린덴 자작령에서 가져온 일기장을 꺼냈다. 이 안에서 나름대로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
그레이스는 시레니 하피를 공작저에 초대하는 대신,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답장 발신자에 대놓고 ‘세이렌의 노래’라고 적지 않은 걸 보면, 공작저에 들어올 때도 세이렌의 노래라는 걸 알릴 요량은 없어 보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집으로 초대한다는 건 그만큼 친밀감을 과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 시레니 하피에게 정보를 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그레이스에게 편지를 통해 친밀감을 보이긴 하였으나 그레이스는 그자가 현재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그자가 나와 그만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면 이번 만남을 통해서 알 수 있겠지.’
상인은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법이었다.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면, 시레니 하피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제도에 있는 한 디저트 가게라는 점이다.
가게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문에서 광고를 본 적도 있었고, 어떤 케이크가 특히 맛있다고 말이 도는 곳이기도 했다.
‘맛있겠다.’
그리고 그레이스에게는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 한창 체중감량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지금, 케이크를 먹었다가는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마차 안에서 자신의 매무새를 확인했다.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고, 옷도 풍성한 레이스나 리본이 많이 달려 있지 않았으나 충분했다.
‘이 옷이면 충분히 관심을 끌 수 있을 거야.’
또한 오늘 그레이스의 장신구가 화려하지 않은 건 시선을 한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목에 걸려 있는 한 알의 보석을 손으로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