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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8)화 (88/131)

88화

“자, 잠깐만요! 내려갈게요!”

당황한 그레이스는 드물게 먼저 침묵을 깨고 창문을 탕탕 두드리며 의견을 표했다. 벤자민은 그녀의 의중을 이해한 건지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 정원으로 달려갔다. 예전 체력이었으면 이렇게 달리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텐데, 이젠 이렇게 달릴 수도 있었다.

분명히 연기를 쫓아내느라 힘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벤자민과 마주치니 그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딱히 무섭지 않고, 별관의 무엇도 그레이스를 해칠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서 그레이스 펠튼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벤자민 펠튼이 유일할 것이다.

“……허억.”

“천천히 오셔도 기다렸을 겁니다.”

석양이 지며 온 세상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벤자민은 조금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붉은빛을 등지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것이다. 그의 얼굴이 그토록 붉어 보이는 이유가.

그레이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터질 듯 뜨거워지는 기분이 드는 이유가 말이다.

“가, 각하. 여기서 사, 산책 중이셨나요?”

“으음…… 네, 방금 나왔습니다.”

벤자민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꺼냈다. 그 또한 이것이 누가 봐도 아는 거짓말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인과 이리 만나서 기쁩니다. 부인께서도 지금부터 산책할 요량이면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벤자민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부인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아직 채 지지 않은 햇빛에 반짝였다. 그레이스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던 손이 우뚝 멈췄다.

“…….”

“각하?”

벤자민의 시선이 아래에 고정되었다. 평소에 그레이스가 벤자민을 부르면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와 마주했지만, 오늘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스의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입가가 살짝 벌어져 있는 얼굴, 믿기지 않는 것을 본 자의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가 겨우 입을 뗐다. 목멘 목소리를 겨우 끌어낸 듯, 긁힌 듯한 목소리였다.

“각하께서 사 온 것이었죠? 예전에 제도에서 열린 축제에서요.”

“네, 그랬었죠.”

벤자민은 반지의 중앙에 빛나는 볼품없는 유리알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이리저리 생채기가 나 예전만큼의 빛을 뿜어내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괴로운 듯하면서도 애틋해하는, 그저 완전히 반가운 추억만을 보는 이의 얼굴은 아니었다.

‘왜지?’

그레이스가 이 기억을 처음 찾았을 때 느낀 것은 충만함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벤자민 또한 이 반지를 마주했을 때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둘의 추억을 상징하는 물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난, 둘의 기억을 엿본 외부인이겠지만.’

“축제 중에는 들뜬 사람이 많아, 그 틈에 있다 보니 제 기분 또한 좋아지더군요. 밤사이의 불빛이 반짝여 아름답기도 하고요. 저는 놀러 나온 것이 아니었음에도요.”

“…….”

“그래서, 그곳에서 이 반지를 발견하고 당신이 떠올라 구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지를 내려다보던 벤자민의 시선이 그레이스를 담았다. 반지를 내려다볼 때는 공허했던 눈동자가 평소처럼 온화하고 다정한 이의 빛으로 변해 있었다.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무엇을요?”

“……빛에 비친 당신의 머리카락을요.”

누군가는 붉은색, 누군가는 진저, 누군가는 벽돌이라고 비유하고는 했던 그레이스의 머리칼은 주황색이었다.

그 누구도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칭찬 한번 해 준 적 없는 헝클어진 당근색 머리카락.

“하지만 부인의 머리카락이 더 아름답습니다.”

‘아닌데…….’

그레이스는 헝클어지기 쉬운 제 머리카락보다, 반지에 박힌 유리알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는 아름답다는 말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레이스의 기억을 살펴보아도, 자신의 원래 기억을 훑어보아도 단 한 번도 아름답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조차도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 기억 못하는 걸 수도 있지.’

그레이스가 연기를 쫓아내고 떠올린 기억도 벤자민의 말을 떠올리려는 순간 뚝 끊기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름 이해가 갔다.

어쩌면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기억 못하는 시간 중,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이따금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어쩌면 원작에서는 그레이스의 칩거가 계속 이어져 지친 나머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기울었지만, 내가 빙의하면서 이렇게 틀어진 걸지도 모르겠어.’

세세한 건 다르지만 원작 소설에 있던 사건이 결국엔 일어나는 걸 보면 소설 내용을 아예 없던 일 취급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즉, 벤자민도 원작의 벤자민과 동일 인물이니 아리아를 향해 얼마든지 원작에서의 감정 및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이건 그저 첫 번째 가설이고.’

그리고 그레이스는 또 다른 가설을 세웠다.

소설에서는 아리아 밀러, 여주인공의 주변에는 그녀만을 위하는 사람이 가득하고 그녀의 기사들이 한가득하다고 했다.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 관찰하며 깨달은 점은 서술로는 얼마든지 독자를 속여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리아가 믿는다면 소설에서는 그게 진실처럼 보이게 꾸밀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소설 내용을 더듬어 보면, 소설 속 아리아의 친구라고 볼 수 있는 귀족 친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 그나마 귀족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게 벤자민 펠튼이었다는 점. 그레이스는 여기에 주목했다.

‘그 뒷배경에 벤자민이 압력을 넣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레이스의 주변 인물이라면 몰라도, 아리아는 벤자민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몇몇 귀족가야 주춤하겠지만, 그뿐이다. 아리아는 유일한 성녀고 신전의 상징이기에 신전 측에서 항의하면 펠튼 공작가의 명예가 실추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렇게 되면 벤자민이 무엇을 잃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후보군은 하나였다.

‘신전.’

성녀를 감히 상징으로 삼고, 그녀의 주거지를 책임지는 존재. 그들이라면 성녀의 주변 인물들도 은근슬쩍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이 성녀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니 대놓고 행동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벤자민은 어떤 목적 때문에 아리아에게 접근했을 거야. 신전에서도 벤자민쯤 되는 귀족을 대놓고 건들 수는 없으니까, 일정 범위까지는 허용했을 테고.’

그 결과가 ‘성녀의 소원’ 같은 구도였다.

사실 벤자민은 아리아를 통해서 얻고 싶은 게 있고, 신전은 아리아가 귀족과 친해지는 것을 꺼렸다.

‘그렇다면 벤자민이 얻고 싶었던 건?’

그녀의 시선이 별관 쪽으로 향했다. 기분 나쁜 기운의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 그레이스의 완쾌?’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성녀인 아리아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었기에 이 생각도 타당했다. 하지만 별관 가구 일체를 주문한 자가 벤자민이었기에, 이게 또 정답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웠다.

또한 그레이스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벤자민 펠튼은 마지막에 뜬금없이 흑화해서 최종 보스가 되는가?

‘게다가 마지막에 아리아한테 뜬금없이 이상한 말도 하고 말이야.’

작가가 갈 데 없는 서브남주를 퇴장시키기 위해 희생시킨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사실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한 말만 떠올리면 ‘가설 1’이 더 그럴싸했다.

‘저 안개를 다 물리쳐서 기억을 모으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어쩌면 그레이스가 떠올리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가 섣불리 옆에서 다소곳하게 에스코트하는 남자를 찔러보았다가는 뭔가를 뱉기는커녕 입을 싹 닫을 게 뻔했다.

벤자민 펠튼은 그런 남자였다.

‘소설 속에서는 흑막이 되기 전까지는 아리아에게 상냥하기만 했는데.’

오히려 그레이스가 알아가는 벤자민은 정말 ‘흑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성격과 흡사하지 않나 싶었다. 자신을 에스코트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자, 그는 평소와 같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 진짜 흑막이 맞았던 걸지도.’

제 남편을 믿어야 하는데, 그레이스는 오히려 그를 알아갈수록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이면 ‘제법 그럴 수 있을지도…….’라는 의견으로 기울어져 갔다.

‘물론 이제 이 사람이 날 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거 외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가 보기에 벤자민 펠튼 이 사람은 정말 다정하고 알기 쉬운 사람이었으나, 진짜 속내를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나도 숨기는 게 있지만.’

벤자민은 늘 의문스러운 구석을 남겨 두는 자였다. 그레이스의 행동을 막은 적은 없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레이스의 행동을 미리 주시하고 전부 틀어막을 힘을 가진 이 또한 벤자민 펠튼이었다.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던 벤자민은 빤히 닿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각하, 있잖아요.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혹시 조만간 황실에서 열릴 연회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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