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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7)화 (87/131)
  • 87화

    “마님, 들어갈게요.”

    그레이스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샐리가 심부름을 마치고 도착한 듯했다.

    샐리는 품에 직물 공방에서 받아 온 작은 원단과 선물 상자를 든 채 들어오다가 그레이스의 상태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마, 마님! 괜찮으신가요?!”

    “아, 괘, 괜찮아. 갔다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다른 아이들을 불러서 욕실에 물 좀 받아 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샐리는 후다닥 물건을 구석에 정리해 두고 욕실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맡기라고 했지만, 본인이 할 요량이었다.

    ‘부지런도 하지…….’

    그레이스는 그러고 보니 그 기억 속에 샐리는 없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빙의한 후, 늘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가 샐리였기에 기억 속에 그녀가 없는 건 꽤 신기했다.

    ‘그 뒤에 온 건가? 그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청 친근하게 굴었던 거구나.’

    그리고 그 뒤, 욕실에 들어갈 때까지 그레이스는 다른 한 가지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레이스와 벤자민이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그 기억 속, 두 사람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사용인 중 누구도 현재 마주친 적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마님, 여기 직물 공방에서 받아 온 것입니다.”

    땀을 씻어 내고 나온 그레이스의 앞에 보드라운 원단과 선물 상자가 놓였다. 그레이스는 원단의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특별한 손님이신 마님께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

    남들이 듣기엔 그레이스가 공작 부인이기에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저 말에서 의미를 읽었다.

    ‘톰 버킨!’

    그레이스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며 포장을 풀었다. 안에는 큰 리본 장식이 붙은 장갑이 들어 있었다.

    “어머, 사랑스러운 장갑이네요.”

    “그러게, 답신을 보내야겠구나.”

    그레이스는 장갑의 매무새를 확인하는 척하며 촉감을 확인했다. 겹쳐 있는 가죽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서재로 갈까? 샤를 후작가에도 편지를 보내야 하니까. 젖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 차도 부탁할게.”

    “모셔다드릴까요?”

    “별관 내부인걸. 혼자 갈 수 있어. 먼저 가서 차를 준비해 줘.”

    그레이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샐리를 먼저 내보냈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그녀는 바로 약 봉투를 숨겨 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 조사할 수 있어.’

    침을 꿀꺽 삼키며, 약 봉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서재에는 그레이스 펠튼 단 한 명뿐이었다. 혹시 창 너머 본관 창 쪽에서 무언가 보일까 커튼까지 내렸다.

    서재 내부에는 연기를 뿜어내는 가구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이유가 있나 싶어 두리번거리다가도 그레이스는 일단 본 목적을 완수하기로 했다.

    “……이 리본을 풀면 되나?”

    톰이 대놓고 장갑을 뜯게 장치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 추측한 그레이스는 장갑에 달려 있는 커다란 리본 장식의 끝을 당겨 풀었다.

    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입구의 털 장식이 아래로 떨어지고 바느질한 이음새가 느슨해졌다.

    그레이스는 그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작게 접어 넣은 편지를 빼낼 수 있었다.

    혹시 누군가가 내용물을 확인할 불상사를 대비해 부피감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문장은 최대한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길게 쓸수록 종이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걸이의 행방을 알려서 무사히 빠져나왔고, 이후 해야 할 일을 알려 달라…….”

    톰은 그레이스의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남자였다. 정보의 출처에 대해 묻는 성직자들의 질문에 톰은 자신이 기자 시절 이곳저곳 들쑤시며 얻은 정보에 여러 은어가 섞여 있었는데, 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목걸이에 대해 알아내었다고 거짓 진술을 올렸다.

    ‘머리가 좋네…….’

    암시장 사람들이 쓴 은어가 처음엔 무슨 내용인지 몰랐으나 사제들을 보고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보고하자, 찜찜해하면서도 목걸이를 찾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톰 버킨이 말한 곳에는 실제로 암시장이 있었고, 몇 가지 은어는 암시장 사람들이 쓰고 있던 게 맞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상 앞에서 맹세를 올린 의식 때문에 더 신뢰가 갈 수밖에 없고.’

    애석하게도 그 맹세는 신전에게만 불리한 내용이지만.

    그레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전 사람들은 목걸이를 찾았다는 기쁨에 취해 그 맹점을 당장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눈치챌 테니, 그전에 톰 버킨의 거처를 이동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버킨가 사람들도 보호해 줘야 하는데.’

    그 대가족을 전부 어디에 수용하냐가 문제지. 그레이스는 그에게 약을 조사시키기 위해 약 봉투와 ‘약 성분 조사’라고 적힌 쪽지를 장갑에 넣어 다시 리본을 묶었다.

    리본을 묶자 감쪽같이 전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잠시 손가락으로 입가를 두드리다가, 지폐 몇 장을 편지 봉투에 넣어 봉한 뒤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은 이거지.’

    샤를 후작가에 보낼 선물. 그레이스는 보들보들한 천을 바라보며 끄덕였다.

    베이비 샤워에 가져갈 선물은 따로 준비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녀는 벤자민의 인맥으로 방문하는 사람이었다. 본디 베이비 샤워는 임산부 쪽의 손님으로 채워지는 만큼, 벤자민의 인맥이란 상당히 예외적인 존재였다.

    ‘한마디로 부인 측 손님이 아니라 남편 측 손님이란 거지.’

    가뜩이나 소문도 안 좋은데, 뜬금없는 손님이라 더 미운털 박히기 쉽다는 뜻이었다.

    그레이스는 최근 본인이 꽤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의 인식이 바뀐다고 믿진 않았다.

    원래 사람이란 존재가 자기 믿고 싶은 것만 믿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고, 편한 대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편이었다.

    ‘웬일로 민폐나 안 끼쳤네, 두고 보자, 정도의 흥미나 생겼다면 다행이지 뭐.’

    만약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 만큼 한 번 한 번의 기회가 귀했다.

    “이 공방이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사람들이 센스가 좋아.”

    아이를 가진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은 옷감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보내 준 것이다. 아기 옷을 지어 만들기에도, 아이를 낳은 뒤 얼마 되지 않은 여성의 옷을 지어 만들기에도 딱 좋은 재질이었다.

    그 사람의 취향도, 체형도, 아이의 성별도 모르는 시점에서 옷을 완성해서 보내는 것은 과한 행동일 수 있었다.

    샤를 후작가 정도면 늘 맡기는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물밑에서 말이 나오고 있을 시기고.’

    조금 규모 있는 창고를 소유한 귀족 가문이라면 누구나 옷감을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직물 공방의 파업 사태가 큰 사건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디자인과 옷감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직물 공방과 드레스 숍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즉, 커다란 직물 공방은 유명한 드레스 숍 여러 곳과 공생 관계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거대한 담합을.’

    이렇게 가격을 조작도 하고, 작은 가게가 좀 잘될라치면 큰 공방에서 훼방을 놓았다.

    드레스를 만들 수 있는 인재는 한정되어 있었다. 한때 귀족가에는 모두 침모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상업이 발전한 후로는 외부 상점에서 주문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개인 옷감으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상점이 보유한 옷감을 섞어서 쓰지……. 개인이 보유하는 건 유행을 타지 않는 거나, 그만큼 귀한 것들이 주류고.’

    그런고로, 이 보들보들한 천은 딱 시기가 좋은 선물이었다. 이 천 외에도 공방 측에서 선물의 의미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무늬의 푸른 천 또한 보내왔다.

    솔직히 그레이스의 마음에 쏙 들기는 했으나, 페리윙클 블루는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기도 했기에 이 또한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선물로 보내기로 했다.

    ‘마음에 들어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첫 만남 때 그녀가 원하는 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흠흠~~.”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를 소후작 부인과 부부 사이에 태어날 아기를 축복하는 편지를 한가득 쓰고 각자 주소까지 야무지게 적은 뒤 기지개를 켰다.

    커튼을 쳐 둬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거두어 보니 어느새 석양이 지기 직전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평소에 산책하던 시간을 넘겨 버렸다. 그녀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길거리에 나가면 자주 보이는 갈색 머리지만, 그레이스는 저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벤자민?’

    벤자민은 잠시 휴식 시간이 난 건지 느지막이 정원을 걷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부근을 빙글빙글 돈 지 꽤 된 건지 발자국이 둥글게 패여 있었다.

    그레이스는 설마 그가 자신의 산책 시간에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저러고 있는 건가 싶어 눈을 굴렸다.

    ‘설마.’

    하지만 저건 아니라고, 착각이라고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확연했다.

    그는 그레이스가 산책할 때 가장 처음 지나가는 길목 쪽에 원형으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

    그리고 벤자민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딱.

    “…….”

    “…….”

    침묵이 돌았다.

    애초에 여기서 뭐라고 말한다고 소리가 닿을 거 같진 않았지만 둘 다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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