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6)화 (86/131)

86화

“윽.”

검은 안개는 꿈틀거리며 그레이스를 향했다. 그레이스는 뒤로 주춤하려다가 버티고 천천히 다가가 손을 뻗었다.

‘기분 나빠.’

다행스럽게도 어떠한 감촉도 느껴지지 않지만, 검은 안개가 닿는 순간부터 천천히 우울하고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뇌에 물이 먹은 것처럼 먹먹해졌다. 그레이스는 이 감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와 흡사해.’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포기하지그래? 어차피 실패할 거. 뭐 하러 해?>

<맞아, 결단도 제대로 못 내리는 네가 이런 걸 할 수 있겠어?>

“……읏.”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떼고 도망치고 싶었다. 온갖 불안하고 무섭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 돼.’

그녀는 우울한 생각에 휘둘리고는 했다. 하지만 이 우울의 원인을 깨닫자 더 이상 여기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실패할지 안 할지는 해 봐야 알지.’

그레이스는 우울에 먹히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떠올렸다. 정원에 벤자민이 적어 둔 꽃의 팻말, 새롭게 들인 커피의 향,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신이 스스로 해내기 시작한 모든 것들.

“……!”

그때, 그녀에게서 청록색의 빛이 미약하게 흘러나오며 검은 안개를 집어삼키고 흐트러트렸다.

“이건……?”

점점 안개가 흩어지며,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잊혔던 기억이었다.

“뒤에 숨기고 있는 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로요?”

“…….”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께서 기뻐할지 모르겠어서.”

⋆★⋆

벤자민은 뒷짐 진 손을 그레이스에게 내보이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그레이스의 곁을 떠나지는 않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별관을 살피던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살폈다.

“그럼 계속 안 보여 주실 건가요?”

“그건, 아니고…….”

잔뜩 망설이는 그의 얼굴은 눈썹도 팔자로 찡그려졌다. 영락없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 같았다.

“실망, 하지 않으실 겁니까?”

“실망 안 할게요.”

“진짜로요?”

“네, 진짜로요.”

“진짜입니까, 부인? 진짜로요?”

벤자민이 연신 그레이스에게 캐묻자, 그녀가 괜히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뭐, 노력할게요.”

“부, 부인…….”

그레이스가 심술궂게 반응하자 벤자민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멀리 서 있던 사용인들이 작게 키득거렸다.

저 소공작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은 소공작 부인이자 그의 아내인 그레이스 펠튼뿐이었다.

벤자민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어 보였다.

“이건……?”

그는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영 민망했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슬쩍 빼 들었다.

“초, 촌스럽죠? 분명 구매할 때는 예뻐 보였는데 말입니다.”

거리, 축제의 불빛 아래에서 볼 때는 저보다 영롱할 수가 없었다. 축제의 열기는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벤자민 또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저렴하고 약간 촌스러운 반지의 붉은빛에 홀려 버렸다.

그레이스는 반지에 박힌 유리알의 색을 빛에 비추어 보았다. 붉은색은 빛을 비추자 주홍과 황금색을 넘나들었다.

“예쁜걸요.”

“아, 아닙니다. 이런 것보다는 부인의…….”

벤자민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지의 너비를 가늠하다 제 새끼손가락에 쏙 끼워 맞췄다.

“여기에 딱 맞네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려고 하셨나요?”

“끄응…….”

소공작 부인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반지를 낀 채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그레이스를 보며, 그가 짧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귓가의 붉은색이 뺨의 끝까지 퍼져 나갔다.

“……이런 반지보다도 부인의…….”

⋆★⋆

끔뻑.

그레이스는 더 이상 검은 연기를 뿜어내지 않는 침대 앞에서 눈을 끔뻑이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덜덜 떨렸다. 연기를 쫓아내는 데에 정체불명의 힘을 쓰느라 지친 것 같았다.

‘정체불명…… 이지만, 사실 이 힘 그거랑 비슷해.’

아리아의 신성력과 비슷했다. 신전의 사제들에게도 신성력은 있지만 성녀에게 비견할 바가 안 되었다.

‘아리아의 신성력에서는 빛이 났지만, 사제들의 신성력에서는 그런 빛을 본 적 없었다.

아리아에게서는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방금 본 색은 그게 아니었어.’

하지만 아주 낯익은 색이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더 이상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침대를 바라보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거울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느새 식은땀에 절여져 있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내 눈동자 색이랑 닮았어.’

그 빛의 이채는 그레이스의 눈동자 색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눈을 데굴 굴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흘러 들어온 기억 속에서 본 반지가 있는 장소였다.

여전히 반지는 보석함, 숨겨 놓은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처음 봤을 때는 왜 이런 반지가 여기에 있는지, 왜 반지를 보니 갑갑한 기분이 드나 싶었는데 이젠 깨달았다.

‘잊힌 기억이야.’

이 몸의 모든 기억을 물려받았지만, 기나긴 우울감 때문이었는지 혹은 아리아가 말한 저주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1년의 공백은 뚜렷했다.

저주를 물리치자 제일 먼저 해당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속에 충만한 기분이 차오르는 걸 보아 원래의 그레이스, 당시에는 소공작 부인이었던 그녀는 당시의 일을 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듯했다.

‘그리고 그건 그 1년 중 있던 일이 확실해.’

그레이스는 여기서 ‘혹시’라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나도 아리아, 성녀와 비슷한 신성력을 쓸 수 있나?”

아리아의 펜듈럼이 깨지면서 신성력이 흡수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신성력을 흡수한다고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신성력을 흡수할 수 있는 도구는 소설에서도 본 적 없었다. 소설의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지 않더라도, 그런 내용이 있었더라면 보는 순간 떠올라야 했다.

‘흡수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쓸 수는 없을 텐데.’

누구나 신성력을 흡수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마도구사가 마력으로 마도구를 만드는 것처럼 신성력을 응용하는 직업이 생겨나서 세상의 구조가 조금 바뀌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빙의자라서 그런 건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중에도 성녀가 있는 세계관에 회귀, 빙의, 환생하면 본디 성녀가 아니었음에도 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내용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본인이 그것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성녀…… 의 이미지랑은 전혀 안 어울리지만 말이야.’

유리알이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픽,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지만 전처럼 무거운 숨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기억 속에서와 같이 반지를 한번 새끼손가락에 끼웠더니 약간 작아 새끼손가락 끝의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그레이스의 손가락이 그때보다 살이 오른 탓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빠졌으니까 다행이다.’

예전이었으면 반지가 전부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렸을 그레이스였지만, 오늘은 그나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레이스는 몸 안에서 느껴지는 신기한 감각에 손을 쥐었다 폈다. 아까 검은 연기를 몰아내며 뿜어졌던 빛의 원천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연속으로 쓰는 건 무리인 거 같아.’

처음 써 본 거지만 이상하게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힘을 쓰고 호흡하는 듯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나마 침대의 안개를 물리쳐 침실 내부에는 기분 나쁜 기운이 덜하다는 것에 안심했다.

처음에는 본관 쪽에 방을 내 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했지만, 그건 좋지 않은 수라고 결론지었다.

‘이 저택에 이런 물건을 가득 채운 건 내부 사람일 가능성이 있어. 아니더라도, 내부 소식을 외부에 흘릴 가능성이 있고.’

그런데 만약 그레이스가 본관 쪽으로 이동한다면?

그레이스의 변화를 눈치채거나,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이 불온한 물건들까지 이동시킬 수 있었다.

‘차라리 이 힘을 어떻게든 회복해서 하나씩 물리쳐야겠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안개를 쫓아낼 때마다 그레이스는 어떠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안개에 휩싸여 살아온 시간 동안 그레이스는 수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온 듯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누군가가 두텁게 쌓은 듯한 지독한 우울감도 옅어졌다.

그레이스는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정말 이상했지.’

기억에서 본 그레이스는 늘 우울하고 소심하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벤자민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레이스가 초반에 벤자민에게 거리감을 둘 때, 모두가 의아하게 볼 만했는데도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별관에 벤자민을 출입 금지한 것도 지금의 내가 아니라, 원래의 그녀라는 건…….’

기억 속에서 그에게 그토록 친근하게 말을 걸던 여자라는 건가? 그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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