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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5)화 (85/131)
  • 85화

    “네. 언니가 말해 준 이름인데, 그때 낌새가 이상했어서요. 하지만 이유를 몰라서, 바로 말하지 못했어요.”

    그레이스가 빚을 사 와서 대신 갚게 하라고 시킨 것도, 차용증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정말로 르마네티 남작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벤자민의 성격상 그에 대해 조사해 볼 확률이 높았다. 그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일 테니까.

    그레이스는 힘없는 목소리로 벤자민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다치지 않았으니까 되었습니다.”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덧 벽난로 속 장작의 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며, 잉걸불만이 장작에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벤자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품에 잠든 여성을 내려다보고, 굽이진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에 엮었다. 오늘 하루 동안 있던 일이 많이 고되었는지 어느새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밖에서는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서 천둥이 내리쳤다. 천둥이 칠 때마다 여인이 몸을 움츠렸지만 깨어나진 않았다.

    “……저는 정말로 그것이면 됩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말을 그가 중얼거렸다.

    ⋆★⋆

    해가 뜨자마자 영지를 떠나 제도로 올라왔다.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원정과 달리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친다.’

    그레이스는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녀들이 그레이스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왜 눈치를 보나 싶지만, 어쩔 수 없지…….’

    린덴 자작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정보가 퍼졌을 게 뻔했다. 입이 가볍다고 질책할 수도 없었다. 그레이스의 최측근에서 시중드는 자들이니 말실수를 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다시금 린덴 자작령을 떠올리다가 울적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차라리 해야 할 일을 떠올리기 위해 그레이스는 뭉그적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일단 톰 버킨이 왔는지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고 그사이에 저택을 수색해 보자.’

    죽을 만큼 우울하지만, 진짜 죽지 않으려면 움직여야 했다. 그레이스는 부조리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밖에서 머물다 오니까 알겠어. 확실히 별관에 들어오니까 머리가 더 무겁고 우울해져.’

    자작령에서 겪은 일 때문에 생긴 우울감과는 궤가 달랐다. 누군가가 억지로 늪에 빠트리는 기분이었다.

    계속 저택에서만 머물렀으니 몰랐던 일이었다. 이번에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초석을 쌓기 위해 아직 풀지 않은 개인 궤짝을 열었다.

    ‘여기 뒀을 텐데.’

    작은 궤짝 안에는 그녀가 린덴 자작령에서 가져온 일기장과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녀가 찾던 것은 상자, 정확히는 상자 속의 내용물이었다.

    상자를 챙긴 뒤,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샤를 후작가에게 미리 선물로 보낼 천 몇 필의 요청과 톰 버킨에게 전할 글귀를 적은 뒤 샐리를 불렀다.

    “샐리, 이 편지를 전해 주어야 할 곳이 있단다. 주소는 뒤에 적혀 있고.”

    “네, 마님. 금방 다녀올게요.”

    “음, 아니야.”

    그러며 그레이스는 돈주머니를 샐리의 손 위에 얹어 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내가 또 우울해하고 있어 너희가 고생이 많아. 간식이라도 사 와서 다 같이 나눠 먹으며 쉬려무나.”

    “마님……!”

    “나는 오늘 별채 내부를 산책할 테니, 걱정 말고.”

    “네!”

    샐리는 감동받은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이러면 오늘 별채 내부를 돌아다니는 인원은 별로 없겠지.’

    돌아가면서 추가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될 테니, 그레이스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상자를 열었다.

    달칵, 소리가 나며 그 안에서 빛나는 펜듈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받을 줄이야…….”

    사실 아리아는 헤어지기 전 이 펜듈럼을 그레이스에게 쥐여 주었다.

    다이아 형태의 금속 틀 안에서 동그란 구슬이 황금빛으로 일렁거렸다. 따스하고 신성한 빛은 꽤 친숙하게도 느껴졌다.

    ‘성녀의 신성력을 담은 건가?’

    그레이스는 처음 보는 물건을 손안에서 굴려 보다가 추를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아리아는 이것을 그레이스에게 주며 저주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근원을 찾아도 어떻게 처리하냐가 문제인데.’

    아리아는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 차마 묻지도 못했다.

    ‘내가 미쳤지.’

    그걸 물어봐야 했는데. 정말 제대로 하는 일도 없지. 그레이스는 또 습관적으로 자책하려다가 그만뒀다.

    “……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펜듈럼의 추가 작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추의 공명이 커지는 자리를 찾기 위해 조금씩 움직였다.

    ‘복도에 아무도 없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레이스는 다른 공간을 누비며 추가 공명하는 위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관도 아닌 별관이 쓸데없이 커다래서.’

    별관이라고 이름 붙은 건물임에도 거대해 기록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반쯤 겨우 한 그레이스는 서재에 틀어박혀 자신의 기록을 훑어보았다.

    ‘이거 특징이 너무 이상한데.’

    어디선가 강해지는 구간은 있었지만, 공명은 어디서나 했다.

    ‘이건 마치…….’

    빠직.

    “……?”

    펜듈럼 안에 있는 구에서 빠직, 하고 커다란 금이 하나둘 일어나더니 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자, 잠깐……!”

    그레이스는 당황한 나머지 손에서 떨어트려야 하는 것을 양손으로 꽉 쥐어 버렸다.

    황금빛 모래가 바람에 나부끼듯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레이스의 머리가 맑아졌다. 그녀는 손안에 있는 펜듈럼을 내려다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구슬은 불투명한 돌조각처럼 변했다.

    하지만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건 다른 것이다.

    ‘이 안개는 뭐지?’

    그레이스의 눈에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안개가 꾸물거리며 그녀의 다리를 붙잡으려고 했다.

    “헉!”

    그레이스가 팔을 휘휘 내저으며 안개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이 안개는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순식간에 사라진 안개는 서재 문 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는 서재 밖을 뛰쳐나가 조금 전까지 둘러보았던 곳을 다시 살폈다.

    “……이, 이게 뭐지?”

    펜듈럼이 유독 심한 공명을 한 곳마다 검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는 가구가 하나씩 존재했다.

    그레이스는 검은 조약돌을 떠올렸다.

    ‘그래, 그거……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불온한 느낌을 뿜어내는 검은 조약돌. 그것은 검은 안개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비슷했다.

    ‘이제까지 이런 곳에서 살아왔단 말이야?’

    대체 언제부터 이런 안개에 둘러싸여 있던 거지? 숨이 막혀 왔다. 그레이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레이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자, 집사가 걱정스레 다가왔다.

    “마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 집사. 그, 그게.”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별채의 가구를 어디서 샀는지 알 수 있을까?”

    “별채의 가구 말입니까? 마님께서 쓰시는 가구는 전부 주인어른께서 관리하십니다.”

    “……각하, 께서 말이지.”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검은 안개가 꿈틀거리며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것은 이상하게 다른 사람은 노리지 않고 그레이스만을 집어삼키려는 듯 행동했다.

    그레이스는 겨우 쌓인 벤자민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바깥에 있는 하얀 조약돌도 마찬가지인가?”

    “예. 주인어른께서 급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고마워.”

    그레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밖에 나가 확인해 보았다.

    ‘없어.’

    새롭게 깔아 둔 하얀 조약돌에서는 어떠한 기운도, 안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니까 이제 알겠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레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내가 별채의 가구를 전부 새로 사서 바꾼다고 해도, 정말 안전할까?’

    이 하얀 조약돌은 갑작스레 그레이스가 다쳐 급하게 교체하느라, ‘누군가’가 술수를 쓰지 못한 것일 수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이곳에도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그레이스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가 그걸 부수지 않았나?’

    어쩌면, 이 안개를 그레이스가 없앨 수도 있다.

    ‘사실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했었으니까.’

    그녀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꽉 쥐었다.

    “……하, 한 번만 해 보자.”

    실패하면 어쩌지? 그레이스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실패하면 도망치면 되지. 까짓 거 눈에 보이니까 이제 무, 무섭지도 않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본관 쪽 건물을 봤다. 검은 안개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둑어둑한 별관을 보다가 벤자민이 있을 본관을 보니 아주 천국같이 보였다.

    ‘좋아, 가자.’

    그레이스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침실이었다. 침대에서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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