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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4)화 (84/131)
  • 84화

    린덴 자작은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서 그레이스를 납치한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빚 때문에 영지민이 인질로까지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는데, 이 땅으로 어떻게 순식간에 천만 젠을 벌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레이스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이 쓰라렸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차라리 자작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민망하긴 해도 벤자민에게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한동안 쓰지 않은 품위유지비를 생각해 보면 천만 젠은 얼마든지 융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린덴 자작에게는 아니었다. 천만 젠은 린덴 자작령에게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고, 한 가문…… 더 나아가 영지를 꾸리는 이로서 이만큼 큰 금액을 갑작스레 빌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린덴 자작가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펠튼 공작가에게 도움을 받아왔다. 그레이스가 칩거를 시작한 지 1년, 그동안 자작가와도 연락하지 않았으니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이 더 쉽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린덴 자작을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이번에 린덴 자작령에 도착하고 마차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날, 자작은 벤자민과만 대화하다가도 마차가 덜컹거렸을 때 그레이스부터 걱정했다. 그게 뭐라고 그녀는 계속 마음이 쓰였다.

    ‘그래, 마차 바퀴부터가 문제였던 거야.’

    공작가에서 손님이 오는 데도 준비할 수 있는 마차는 고급은커녕 이음새부터가 헐렁거렸고, 자작은 급하게 돈이 될 상품을 준비하다가 그레이스가 남겨 두고 간 농작물까지 모른 척 건드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게 가난 때문이다.

    린덴 자작령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것에 비해 너무나도 가난했다.

    “돈만 잡아먹는 자식!”

    “못난 놈.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아프지라도 말아야지.”

    “그냥 확 빨리 죽어 버렸으면…….”

    원래 삶, 질리도록 들어온 폭언이 머릿속에 울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레이스는 이런 말을 듣고 자라진 않았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가족에게 애정을 받기는 했다. 그래서 더욱 아플지도 모른다.

    만약 린덴 자작가의 사람들이 원래의 가족과 비슷했으면 그레이스는 이렇게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조금의 애정 어린 기억이 뭐라고, 그녀는 뼈가 사무치게 아팠다.

    ‘뭐가 비슷해.’

    한때 펠튼 공작 부인, 원래의 그레이스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하지만 결국 비슷한 것은 무능하고 못난 취급을 받는다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이 세상엔 그레이스를 사랑해 준 사람이 있었다.

    다시금 청록색 눈에서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끅끅거리느라, 몸은 잘게 떨렸다.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벤자민의 시선은 침전하고, 근처에 서 있던 이들을 멀리 물러나게 했다.

    “부인.”

    “…….”

    “부인, 제가 당신을 잠시 안아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만질 때면 허락을 구하고는 했다. 그레이스는 멈추지도 않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그가 큰 손으로 동그란 어깨를 끌어안고 제 쪽으로 끌어들였다.

    따뜻한 품속에 안기며 숨결이 닿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벽난로의 불길보다 사람의 체온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저는 사실 이 영지에서의 좋은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그레이스가 이 땅에 발을 디뎌 보니 더욱 잘 떠올랐다. 가진 건 작위뿐이라고 할 수 있는 허울뿐인 가문, 린덴가는 제 자식을 잘 보호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은근한 정신적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해 왔다.

    무엇을 해도 이상한 일, 엉뚱한 짓,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치부되어 왔으며 어떠한 것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능한 그레이스’라는 칭호는 결혼한 후 생긴 게 아니라 그저 처음부터, 조금 다른 행동을 했던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작은 마을에서 우스갯소리로 시작되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은 어른의 생각보다 섬세했기에 그 모든 게 씨앗이 되어 마음의 땅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어떤 말을 들어도 쉽게 무너지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영지를 사랑하는 건 왜일까요?”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사랑이 남아 있었다.

    이따금 떠오르는 좋은 기억은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작 부인, 그녀의 어머니는 그레이스가 아플 때면 늘 옆을 지켜 주었고, 생일이 다가오면 없는 살림에도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준비하라 일렀다.

    상인들이 방문하는 시기가 되면, 자작과 다른 자식들 몰래 조금의 용돈을 더 챙겨 주기도 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 다닐 때 다칠까 늘 길을 재정비하고는 했다.

    “나는 도무지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어요.”

    “……그럴 수 있습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그레이스는 결국 돈을 위해 자신을 이용해 납치극을 벌인 이들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다독였다.

    “당신께서는 늘 다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다정해서가 아니에요.”

    그레이스가 린덴 자작가에 어떠한 처벌을 내릴 용기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남들보다 친절하거나 마음이 여려서가 아니었다.

    그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 감정대로 결정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고 나서 후회하면 늦었다. 그레이스는 그저 그것이 두려웠다.

    이미 한번 그레이스의 선택으로 사람이 죽은 적 있었다.

    물론 그 재단사는 많은 죄를 저지른 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 한마디로 인해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가 굳이 톰 버킨에게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러한 사유였다. 한 번의 선택으로 누군가가 쉽게 죽어 나가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자신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는 이유로 원하는 대로 처벌했다가 그레이스는 본인 또한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이 모든 두려움과, 버리지 못하는 사랑이 얽혀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레이스가 린덴 자작가를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그 재단사처럼 죽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힘에 익숙해지는 게 그레이스는 달갑지 않았다.

    ‘그레이스 펠튼, 당신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레이스는 대답이 없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미련했던 여자.

    누구보다도 미련한 사랑을 했던 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을 리가 없었다.

    한 번도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실질적으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이인데도 그레이스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 누구도 그레이스 펠튼, 한때 그레이스 린덴이었던 자의 숨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냥 겁쟁이예요.”

    그레이스는 이 볼품없는 사랑마저 버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남들은 하찮게 여기고, 버리라고 할 측은한 이 감정이 그나마 그녀를 살아가게 한 빛이었다.

    “…….”

    “각하, 죄송해요. 자작령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언젠가 다 갚을게요.”

    그레이스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겨우겨우 쥐어짜 냈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

    “자작가의 빚을 대신 갚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대신 갚게 하는 건 제가 용인할 수 없습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부인, 당신께서는 다정한 사람이 맞습니다. 남들이 무어라고 한들, 당신은 다정하고 강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그레이스는 오히려 벤자민이 이해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다정한 말을 해 주는지.

    그의 호의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혼란스럽고 울적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갈무리한 생각을 말했다.

    “그럼, 자작가의 빚을 펠튼 공작가에서 대신 사 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린덴 자작가에서 갚게 해 줄 수 있을까요?”

    “그건 가능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도에 린덴 자작가를 위해 공작가에서 준비한 저택이 있으면 사용을 못 하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펠튼 공작가에서는 린덴 자작가가 언제든지 제도에 진출할 수 있게끔 제도에 작은 저택을 준비해 놓았었다.

    이의 유지비 또한 펠튼 공작가에서 지불하고 있었으나 한번 제도 진출을 시작하면 주기적으로 제도로 올라와 머물러야 했고, 그만한 유지 비용이 없었던 린덴 자작가는 차일피일 제도 진출을 미루고 있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처벌이 되었다.

    저택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린덴 자작가에게 ‘이번 빚을 갚음으로써, 펠튼 공작가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마 빚은 르마네티 남작에 의해 생겼을 거예요.”

    “저번에 부인에게 들은 이름이군요.”

    “나중에, 르마네티 남작을 조사해.”

    그날 밤 글로리아가 그레이스에게 한 이야기는 이 납치 자작극에 대한 조언일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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