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3)화 (83/131)

83화

“범인…… 은 잡으셨나요?!”

“…….”

고삐를 잡은 벤자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레이스는 그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예, 찾았습니다. 그에 관한 처우는 괜찮다면 당신에게 맡길까 합니다. 만약, 버겁다면 제가 해도 괜찮습니다.”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뒤에 있는 마차를 보았다. 펠튼 공작가의 가솔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여기에…….’

어쩐지 린덴 자작령으로 오며 기차에서 읽었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멈추는 기분이 들며 온몸이 서늘해졌다.

‘설마.’

그저 참혹하며 잔인한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서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나요?!”

“……예, 린덴 자작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왜…….”

왜냐고 물어보려던 그레이스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입가를 가렸다.

‘돈 때문인가.’

린덴 자작이 굳이 그레이스를 이용해 납치 소동을 벌일 이유는 돈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스스로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느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엔 껄끄러울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좋은 선택이긴 한데, 머물 만한 곳이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바로 제도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오늘 안에 제도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기에 하루는 린덴 자작 영지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현재 린덴 자작 영지에 고위 귀족이 머물 만한 처소는 없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예, 당신께서 괜찮다고만 하신다면 얼마든지요.”

“……?!”

그레이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끄덕였다. 그러자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에스코트해 말에 태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길은…….’

호수를 가로질러 숲 안쪽으로 향했다. 수풀이 우거져 있었으나 사람이 한때 오갔는지 길이 터 있었다.

‘이 길은 뭐지?’

그레이스는 의아한 시선으로 벤자민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태도였다.

‘익숙해 보이는데…….’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데려간 곳은 숲속에 있는 단란한 주택이었다. 오래된 장밋빛 벽돌로 벽을 세워 인상적이었다.

그레이스를 말 아래로 내려 주며 그가 시답잖은 말을 했다.

“햇볕에 잘 마른 낙엽 같은 색이라, 만지면 바스락거릴 것 같지요.”

“……?”

‘그런가?’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말을 듣고 아담한 집을 바라보았다. 먼저 도착해 있던 공작가의 식솔들이 내부를 일사불란하게 정리 중이었다.

지붕은 짙은 녹색, 벽돌은 장미 혹은 낙엽 색. 오랜 시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지만 담쟁이덩굴이 예쁘게 자라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어여뻤다.

만약 그레이스가 괜찮은 상태였다면 눈에 띄게 감탄할 만큼 그녀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예쁘네요.”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레이스가 한때 벤자민과 이혼한 뒤 홀로 살게 될 집의 외관을 상상한다면 딱 이런 모습이었다.

우연이었겠지만, 자신의 꿈의 집을 벤자민이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기분이 미묘했다.

‘그보다 벤자민은 이전에는 호수를 본 적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그는 이 장소를 꽤 익숙하게 찾아왔다. 한두 번 온 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이 주택 또한 꽤 오래된 외관이었다.

‘펠튼 공작가에서 왜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 있는 작은 주택을 산 거지?’

린덴 자작령에서도 외진 숲속에, 터도 좋지 않아 되판다고 해도 이익을 보기 힘들어 보였다.

‘결혼하면서 나중에 린덴 자작령에 방문하게 될 일을 대비해 사 둔 건가?’

이번 사태로 급박하게 준비한 이의 행동은 아니었다.

“내부가 얼추 다 정리가 된 듯하군요.”

벤자민은 느긋하게 말하며, 앞장서 걸었다. 매우 느린 걸음이라 그레이스는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지붕 아래로 들어가자, 흐릿해지기 시작한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며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가 오네요.”

“천둥이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벤자민이 하늘의 색을 보며 말했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우중충해진 하늘을 보고 더욱 침침해졌다.

‘아침까지는 괜찮았는데.’

마치 자신의 기분과 같았다. 어찌 될 줄 모르고, 휙휙 멋대로 뒤바뀌어서 이리저리 휘둘려서는 엉망이 되어 버리는 그레이스 펠튼.

벤자민은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레이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옷 끝을 잡았다. 한참 말을 고르며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했다.

“……부인, 바람이 찹니다.”

안쪽 벽난로에서 타닥거리며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레이스가 뒤돌았다.

“벽난로에 불을 피워도 괜찮나요?”

“네, 청소를 말끔히 해 두었으니까요.”

벽난로는 굴뚝까지 먼지를 깨끗이 치워 두지 않으면 불을 피울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불을 피운 벽난로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깔끔해…….’

미리 도착해 청소를 했다고 해도 일행의 대다수는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의 솜씨로도 이만큼 정리가 가능하다는 것은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이 주택을 청소하는 이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불이 일렁거리는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전 여기가 좋은 것 같아요.”

그레이스는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제야 온몸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으며 우울감이 드리웠다.

그녀의 옆에 벤자민 또한 천천히 앉았다.

“……부인께서 지금 듣기 버거우시다면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괜찮아요.”

언제 듣더라도 그저 맞을 매를 미루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지금 듣는 게 낫다. 그레이스는 먹먹해진 머릿속으로 그리 판단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시중을 드는 이가 따듯한 차를 두 잔 내려 두는 소리, 염려가 가득 실린 그의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한 진실을 알려 주는 소리가 뒤엉키고 불이 타는 소리가 모든 시간을 서서히 태워 냈다.

“……해서,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처벌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처벌의 수위를 정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경우에는 조금 특수했다. 가족 간의 범죄였던 탓이다.

역시나 그레이스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아버지가 벽난로 앞에서 저와 언니를 품에 안고 동화책을 읽어 주신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해 준 적이 있던 말이었다. 그는 뜬금없이 시작된 그레이스의 말에 의아한 기색을 표하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다.

“그날은 비가 엄청 오고, 천둥이 세게 치는 날이었어요.”

마치 오늘과 비슷한 날이었다. 아침에는 맑았는데 갑자기 비가 세차게 퍼붓더니 밤부터는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와 글로리아는 둘 다 천둥소리가 무서워 잠을 자지 못했고, 린덴 자작은 두 딸을 위해 일을 미뤄 두고 벽난로 앞에 앉아 여러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자작 부인은 아픈 길버트를 돌보아야 했던 탓이다.

“사실은, 나는 그 동화를 정말 싫어했어요. 애들이 그 동화를 안 뒤로 저를 놀리곤 했거든요.”

“…….”

“제 머리카락은 어머니나 아버지 둘 다 닮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사실 진짜 딸은 마귀가 훔쳐 가고 저는 마귀가 두고 간 자식이 아니냐고 괴롭히고는 했어요.”

그레이스의 머리카락은 외할머니에게서 내려온 유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고, 그저 놀리고 싶었을 뿐인 아이들은 알아도 다른 이유로 놀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님과 형제들에 비해 못난 외모를 가진 순박한 아이였으니 더욱 괴롭히기 좋은 타깃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초반에는 그레이스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했으나 괴롭힘이 계속되자 그들도 지치기 시작해, 그냥 무시하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어른들에게 방치된 그레이스가 점점 반응을 하지 않자, 아이들은 시시하다며 ‘시시한 그레이스’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길버트 오빠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걸 외면하고는 했지만, 사실 뒤에서 날 괴롭힌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 때리고는 했어요.”

길버트는 답지 않게 다쳐서 돌아오는 날이 있곤 했다. 경악한 자작 부인이 아무리 캐물어도 입을 삐죽 내밀기만 하고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서는 그레이스를 도와주지 않았고, 늘 뒤에서 그레이스를 괴롭힌 애들에게 보복하곤 했다.

과거를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그레이스의 입이 잘게 떨려왔다.

그레이스의 방은 가장 구석에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가장 부끄러운 아이라 숨겨 둔 게 아닐까 싶었겠지만, 사실 외부인이 오가는 걸 마주칠 때 스트레스받는 그레이스를 위한 자작 부부의 배려였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레이스를 사랑했다.

그레이스는 그들에 의해 자존감이 깎이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졌다. 목소리가 떨리고 머리에 뜨거운 열기가 몰려왔다.

“이 사랑은 천만 젠짜리였던 걸까요?”

그레이스 펠튼, 내가, 이 여자가 한평생 린덴 자작가에게 받아 온 사랑이, 준 사랑의 가치가 결국은 천만 젠이었던 걸까 싶어서.

‘내가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아무리 그녀의 기억을 가졌다 해도, 그레이스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것을 빼앗아 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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