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자작가 일원 중 누가 꾸민 일인지에 대해서까지는 감을 잡지 못했지만…… 일단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니 두 분을 함께 불렀습니다.”
“그, 무, 무슨 소리신지 잘…….”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자작.”
벤자민이 하하 웃음소리를 내었지만,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굳이 협박장을 신문지로 오려 붙인 것은 제 발 저린 행동이죠. 주변에 글씨체를 알아볼 수 있는 이가 많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벤자민의 지적에는 허점이 존재했으나 그는 태연히 말을 덧붙였다.
“…….”
“더군다나 현재 린덴 자작저 근방은 펠튼 공작가의 기사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입자의 흔적은 없고, 집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이는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죠.”
설마 황실이나 신전 높은 곳에서 제 부인의 목숨을 노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벤자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기만 했다.
“……그, 그게.”
“자작저에 자작가의 마차가 오가는데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수상한 사람을 본 적 없냐고 물어도 다들 모르겠죠.”
범인은 자작가 내부의 사람이니까.
벤자민은 말을 삼키며 그를 직시했다. 그는 그레이스가 납치당했다고 외칠 때보다 더 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 외의 증거를 더 말씀해 드릴까요?”
벤자민의 입꼬리는 더 이상 예의상으로도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스가 읽었던 신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음, 잔인한 사건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하지만 잔인한 것보다, 납치 사건이 있었는데…….”
그레이스의 뒷말은 마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끊어져 이어지지 못했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와 기차에서도 내내 함께였기에 신문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가족이 납치범이었던 사건이었지.’
벤자민은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아닙니다.”
자작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제, 제 소행이 맞습니다.”
“여, 여보!”
“왜 그러셨습니까?”
무슨 사유가 있었든 간에 벤자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린덴 자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기를 당해 자작령에 큰 빚이 있습니다. 천만 젠, 정도…….”
“…….”
“영지민 중 일부가 인질로 잡혀 있어,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제게 돈을 빌려 달라 말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벤자민은 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딸에게 부탁하기엔 영주와 아버지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았습니까?”
“…….”
“이 계획은 자작과 자작 부인만 알고 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상 저 혼자 알고 있었습니다!”
벤자민은 그를 보던 시선이 가늘어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군요.”
“아, 아닙니다. 정말로. 만약 처벌할 거면 저만 하십시오.”
“린덴 자작, 뭔가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만 처벌의 내용은 가해자가 고를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자비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입니다.”
벤자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평소의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놀랄 만한 모습이었다.
‘가족 모두가 범행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부인께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레이스를 구출하고 나면 이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해 주어야 한다. 린덴 자작을 처벌하든 말든, 그녀는 사건 경위에 대해 알아야 하니까.
또한 그레이스가 원하는 처벌이 있을 수도 있다.
펠튼 공작가에게 천만 젠은 언제든 융통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천만 젠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린덴 자작은 벤자민이 그레이스의 몸값이 천만 젠인 것을 알게 되면,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던 간에 남편이자 가주로서 값을 지불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벤자민 펠튼의 성품이었다.
벤자민은 협박장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렸다.
천만 젠을 준비할 것. 동행 없이 혼자.
‘신문을 오려 붙인 탓에 문장이 부실하지만, 맥락 자체는 알 수 있지.’
‘동행 없이 혼자’에서 ‘혼자’가 칭하는 인물은 벤자민이 아니라 자작이었다. 천만 젠을 벤자민에게서 받으면 자작은 받은 돈을 숨기고 빈 가방을 가져가 교환하는 척하고 그레이스를 데려올 계획이었을 것이다.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집안은 어째 좋게 생각하려다가도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부인께서는 늘 가문에 대해 좋게 말하시곤 하지만.’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서류, 받고 싶으십니까?”
“……아닙니다.”
받고 싶다고 말하면 자식을 가지고 장사하는 몰염치한 인간이 되는 상황이었다. 영지민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식을 데리고 납치극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차후 부인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벤자민은 자작 부부를 응접실에 남겨 두고 방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길버트가 파리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가?”
“……아, 닙니다.”
벤자민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보였다. 길버트는 고개를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버트는 이 일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않는 방관자였다.
‘글로리아, 부인의 언니 되는 자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군.’
이 난리 통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오히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벨 번턴, 펠튼가의 사람들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 이르도록.”
“알겠습니다.”
벤자민은 서둘러 말에 오른 뒤 그레이스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
“……윽.”
마차가 연신 덜컹거리자 온몸이 쑤셨다. 그레이스는 눈을 찌푸렸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 진짜 이러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레이스가 있는 곳은 두껍게 방음 처리가 된 덕분에 바깥소식을 알 턱이 없었다.
바깥소리를 접할 수 없는 그레이스는 점점 두려움에 잠겼다. 어둡고 고요한 이곳은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히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그레이스는 산소가 부족하다는 착각이 들어, 머리가 핑글 돌았다. 공포로 인한 패닉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쿵, 쿵. 하고 다급한 듯한 울림이었다.
‘뭐, 뭐지?’
그레이스는 달아오른 눈을 뜬 채 어두운 시야를 두리번거렸다.
어둠밖에 없던 곳, 그 어딘가에서 옅은 빛이 틈을 가르며 그레이스가 익히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벤자민은 정말로 겁에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그레이스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에, 부인. 이게…… 이게 무슨. 괜찮으십니까?”
그레이스는 마차 의자 안에 숨겨진 공간에 갇혀 있었다.
로젤리아는 달리는 마차를 기습하면 그레이스가 다칠까 봐 마차가 설 때까지 뒤쫓았다. 마차가 선 곳은 어느 오두막 앞이었다.
납치범들을 전부 기절시켜 제압한 뒤 오두막을 샅샅이 수색하고 마차의 짐칸까지 조사했으나 그레이스가 발견되지 않아 모두가 아연실색해 있던 상황이었다.
마차 아래에 빈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수색에 더욱 시간이 걸렸다.
벤자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레이스를 묶고 있는 모든 끈을 풀어 주었다.
“많이, 많이 두렵진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제가, 그, 제가 다 설명해 줄 테니…….”
“…….”
짧고 통통한 손이 아름다운 사람을 향했다.
당근색의 구불거리는 머리가 나부끼며, 작은 체구의 동그란 여성이 남성을 끌어안았다.
“고, 고마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웅얼거리며 그에게 고백했다. 눈에 한가득 고인, 터트리지 못할 눈물 때문에 온 얼굴이 뜨거웠다.
“구, 구해 주러 와서 고마워요. 나 진짜 무, 무서웠어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 그래도요.”
그레이스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되어 본 적 없었다. 사실, 이대로 벤자민이 자신을 포기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어.’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향해 종종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을 지어 보여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다정히 굴어도 원래 그런 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버려지면 비참하니까.’
하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의 등을 떨리는 손으로 겨우 쓰다듬는 벤자민의 온기를 느끼면서 그가 절대 그런 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절대로 아내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유리 인형을 다루듯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은 그녀의 몸을 조심히 추스르며 마차 밖으로 이끌었다.
“마차는 좀 그러실 테니, 말을 타고 이동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벤자민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물어보며 그레이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괜찮아요. 그렇게 지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좁은 공간에 잠시 동안이나마 갇혀 있었던 그레이스는 차라리 탁 트인 공간에 있는 게 편했다. 그녀는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계속 그레이스의 얼굴에 염려 가득한 시선이 닿았다.
“……각하.”
그레이스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말을 끌어오는 벤자민을 불렀다. 그는 말고삐를 잡은 채, 그녀의 부름을 받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