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내가 누군지 알고 납치한 거 같은데. 그럼 애초에 내가 여기 방문하는 걸 알고 노린 건가?’
그레이스는 애써 몸을 뒤척였다.
‘설마 원작과 다르게 행동했다고 더 빨리 죽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싫었다.
그레이스는 바깥에 귀를 기울이며 혹시라도 도망칠 수 있는 기회나 방법이 있을까 강구해 보기로 했다.
‘누가 날 구하러 올 거라고 기대하면 안 돼.’
납치당했다는 걸 깨닫자 벤자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기대한 다음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이 가장 큰 법이었다.
소설 속 펠튼 공작 부인도 죽음을 맞이할 때는 혼자였을 테고, 그레이스의 원래 삶에서도 죽을 때는 혼자였다.
누군가를 찾고 싶어질 때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어떤 목소리도 머리에서 속삭이지 않았지만, 이건 그레이스가 알고 있는 진리였다.
⋆★⋆
“마차 검문이 있겠습니다.”
린덴 자작령의 출입구는 완전히 봉쇄되지는 않았지만 마차를 확인하는 경비병의 수가 대폭 줄어 속도가 느렸다.
상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경비병의 친절한 안내를 따랐다.
“죄송합니다. 현재 자작령에 도난 사건이 일어나 경비병 일부를 범인 색출을 위해 보내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다음번 린덴 자작령에 방문할 시, 판매 세액을 감면해 드리겠다는 자작님의 서류입니다. 혹시 내부 마차 검문을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보상 또한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자작령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번 불편에 대한 보상을 해 주겠다고 하자 상인들의 반응은 유해졌다.
경비병들 사이에 낡은 투구를 쓴 미남자가 있었다.
“각하.”
“음, 여기서는 그리 부르면 안 되니 벤자민이라고 부르게.”
“…….”
아벨은 어떻게 제 주인을 이름으로 부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벤자민은 시침 뚝 떼며 지나갔다.
아벨은 대체 왜 제 주군이 굳이 마차를 검문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레이스의 납치가 사소한 일이란 의미가 아니라, 공작인 그가 굳이 검문을 할 필요가 없단 뜻이었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레이스가 납치당했다는 말을 들은 뒤, 아벨이 보기에 벤자민은 그리 큰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천만 젠을 융통해 주겠다고 했지만 아벨에게 자산을 준비하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말 납치범의 말대로 순순히 응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마차 검문이 있겠습니다.”
“예.”
“이번…….”
벤자민은 투구로 외모를 가린 채 일개 경비병인 척, 정해진 멘트를 이어 나갔다.
딱히 이상한 특징을 가진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거, 빨리 가게 해 주쇼! 끅!”
“죄송합니다. 잠시 조사에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던 중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인이 벤자민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손에 술병을 쥔 채 주정을 부리는 그의 마차 내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거친 행색을 보이며 벤자민을 손으로 꾹꾹 밀었다.
아벨은 취한 상인의 무례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벤자민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당신들의 피해 보상이니 뭐니 알 바 아니니까 얼른 통과나 시켜 달라고!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침을 뱉고는 마차 문을 세게 닫았다.
경비병 모두가 눈을 찌푸릴 만한 풍경이었다. 아벨은 마차가 떠나는 걸 보고 기함하며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벤자민은 방긋 웃으며 투구를 벗었다. 밀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조금 전까지 가려져 있던 외모가 드러났다.
그는 아벨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로젤리아 반트린 경에게 저 마차를 쫓으라고 전하도록.”
로젤리아는 지금 벤자민의 명으로 경비대 뒤쪽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
벤자민은 제 코끝을 매만지며 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 마차에 내 부인이 계신다.”
“그러면 각하께서는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비병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전 이런 일에 잘 맞지 않나 봅니다. 이런 모욕을 당하니 좀 그렇군요.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 각하?”
“아벨 번턴, 그대도 따라오게나. 서둘러야 하니 말이야.”
벤자민이 빠른 걸음으로 자신들의 마차로 향하자 아벨이 로젤리아에게 벤자민의 뜻을 전한 뒤 서둘러 그를 쫓았다.
“각하, 왜 납치범을 쫓지 않고 자작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납치된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고, 구출할 능력이 있으면 바로 그쪽으로 가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가?
아벨의 질문에 벤자민은 부드러운 입매를 잠시 굳히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범인은 빨리 잡을수록 좋으니까.”
영 불유쾌한 목소리였다. 그 자신 또한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한 태도였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있을 마차가 간 방향 쪽을 무거워진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거두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니라 뒷모습만 보더라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
아벨은 그에 대한 의문을 접고 벤자민에게 다른 질문을 하였다.
“그보다 마님께서 저 마차에 있다고 확신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차에 다다라 아벨이 문을 열어 주자, 벤자민이 탑승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아벨이 탑승하고 문을 닫고 나서야 설명했다.
“술이네. 거래를 위해 다음 영지로 떠나야 하는 상인이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술을 마실 리가 없거든.”
“하지만 납치범이 술을 마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술 냄새가 마차 안에는 가득한데 입 안에서 나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나?”
벤자민이 피식 웃었다.
“술을 마차에게 먹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대신 장미향이 나더군. 벤자민은 그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그 향은 벤자민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레이스는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즐겁거나 무언가 기대하는 일을 목전에 두면 장미향 향수를 고르곤 했기에 모를 수 없었다.
“…….”
“저 상인, 아니 저자는 그냥 빠르게 검문을 통과할 방법을 찾은 것뿐이야. 목적지가 영지 밖이었으니 어떻게든 나가야 했겠지.”
영지도 작고 오가는 이들의 수가 많지 않은 만큼 검문소의 개수가 많을 필요가 없다는 게 역대 영주들의 의견이었다.
‘출입구를 한 군데만 더 늘려도 지금보다는 발전하기 쉬웠을 것을.’
그는 역대 영주의 생각이 어리석다 판단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들의 선택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왜 각하는 자작저로 향하십니까?”
“그야…….”
벤자민은 말하려다가 뜸을 들였다. 그는 잠시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레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기분일지 그로서는 감히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범인을 만나서 이야기하기 위함이네.”
⋆★⋆
벤자민이 돌아오자, 자작저 내부는 온통 술렁였다. 벌써 그레이스를 찾아 돌아왔나 싶었지만 그의 옆에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벤자민은 방에서 서류를 한 장 챙긴 뒤, 응접실로 와 린덴 자작가의 집사에게 말했다.
“린덴 자작과 자작 부인을 뵙고 싶군.”
“그 두 분은 현재…….”
“내 아내에 관한 일 때문에 나를 보기 껄끄러우시겠지. 하지만 납치범과 천만 젠의 보상에 관한 일이니 꼭 오라고 전해 주게나.”
“…….”
“자칫하면 부인께서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전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벤자민은 집사가 떠나는 걸 보고 응접실 상석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았다. 중앙 홀에 걸린 초상화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린덴 가문의 가족이 그려진 초상화가 이곳에도 걸려 있었다.
‘더 어려 보이는군.’
이곳에 걸려 있는 초상화 속 그레이스는 더 밝게 웃고 있었다. 벤자민은 턱을 괴고 어린 그레이스를 잠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다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벤자민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며 평소와 같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벤자민이 자연스럽게 옆쪽 소파에 손짓했다. 마치 이 저택의 주인 같은 행동이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겠지만요.”
“…….”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벤자민은 제가 들고 있는 서류를 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이번에 부인 덕에 싸게 거래한 광산에 관한 서류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천만 젠,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수익을 볼 수 있지요.”
광산에 내장된 원석이 그의 생각만큼 많으면, 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벤자민은 그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다.
“하지만 곧 부인을 안전히 모셔올 수 있을 테니, 납치범이 제시한 천만 젠을 굳이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벤자민의 말에 자작 부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마치 공기가 부족한 방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 가는 사람들 같았다. 납치된 딸을 찾은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궁지에 몰린 사람의 태도였다.
“네. 다행이죠?”
벤자민은 방긋 웃으며 서류를 흔들어 보이다가, 자작 부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