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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0)화 (80/131)
  • 80화

    사람을 화가 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고 그중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말을 할 듯 말 듯 감질나게 하자 호기심이 동했지만, 윗사람이라 추궁하지 못하는 하녀들의 눈빛에서 애가 타는 게 보였다.

    “아가씨, 서부 원정 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혹시 다른 이들이 아가씨를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설마! 우리 아가씨는 지금 공작 부인이신데!”

    조금 전에 자신들이 은근히 비웃었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 하녀들이 그레이스를 크게 두둔했다.

    정말로 그레이스를 비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라면 절대 듣지 못할 다른 세계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건데.”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는 시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린덴 자작령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연락을 했었잖니? 그래서 내가 몰래,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뒀었어…….”

    사실 그런 선물은 단 하나도 준비해 두지 않았다. 영지 방문 당시 벤자민이 자작에게 건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말이지, 원정 중에 무슨 작은 사고가 일어났었는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는지 내 실책이라면서 소지품 검사를 하더라고. 아, 그래도 누명이라고 밝혀지긴 했어! 지, 진짜로!”

    아르델 백작령에서 있던 이야기였다. 가짜 도난 사건으로 사제가 그레이스에게 덤터기를 씌우기 위해 위증을 했던 일을 살짝 비틀어 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다소 험하게 다루었는지 물건 몇 개가 망가져서…….”

    그레이스는 정말 애석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가씨, 제대로 항의하셨어요?”

    “아가씨가 그러셨겠어? 마음이 얼마나 여리신 분인데. 예전부터 그러셨잖아.”

    “…….”

    하녀들의 답답해하는 말을 가만 듣던 그레이스가 살짝 정보를 더 곁들여 주었다.

    “어쩌겠어, 잘못하면 각하께서 신전과 척을 질 수 있는데.”

    “……!”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모든 정보를 다 흘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말실수한 척 입을 가렸다.

    서부에서 있던 일은 신전 내부 규율에 따라 해결한다고 해도, 공작가에서 제대로 된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벤자민이 따로 찾아가겠다고는 했으나, 거기서 정확히 어떻게 수습될지 그레이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대로 묻힐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결정이 미뤄졌으니 신전 측에서 묻기 위해 수를 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걸 내가 두고 볼 줄 알아?’

    죄 없는 그레이스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자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할 겸 그날의 사건을 살짝 퍼트리기로 했다.

    ‘어차피 지들이 저지른 잘못인데 항의해서 뭐 어쩌겠어.’

    그레이스는 힐끗,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제각기 표정이 조금씩 달랐는데 이야기를 듣기 전처럼, 그녀를 무작정 무시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약간의 동정 어린 얼굴도 있었지만, 지금은 저 동정도 이용하는 게 이로웠다.

    “그래서 모두에게 줄 만한 선물이 없어서 고민을 해 봤는데, 너희에게만 특별히 내 장신구를 나누어 줄까 해. 어때?”

    그레이스의 발언에 모두가 숨을 약하게 들이마셨다. 공작 부인이 갖고 있는 장신구면 아무리 작아도 최고급이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오늘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비밀이야. 알겠지?”

    자고로 ‘비밀’이라는 건 퍼트려야 제맛이니까.

    “네……!”

    “그럼 단장을 도와드릴게요.”

    “……아,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 수 있지만 나머지 단장을 도와줄 수 있을까? 향수는 저기 있는 분홍색으로 부탁할게.”

    그레이스는 옅은 장미향이 나는 향수를 택하고, 파티션 쪽으로 향했다.

    ‘뇌물, 아니 선물까지 줬으니 나에게 유리하게 퍼지겠지.’

    ⋆★⋆

    “…….”

    벤자민의 옆에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아벨이 힐끗,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늦으시는데.’

    제가 모시는 주인의 아내이자, 공작가의 안주인인 그레이스 펠튼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지 한참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귀족 여성의 옷은 갈아입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그레이스의 옷은 그녀의 취향 탓에 화려한 장식이 거의 없던 편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소요 시간이 짧았지만, 남성에 비하면 길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일반적인 귀족 여성의 치장 시간을 한참 지났는데.’

    어찌나 오래 걸리는지 벤자민은 기다리는 동안 신문을 훑어보고도 시간이 남아 자작저의 문을 뒷짐 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흠.”

    “각하.”

    하지만 곧 식당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정 안 되면 시간을 미루는 게 어떨지, 아벨이 제안하려고 할 때 자작저의 문이 쾅! 하고 큰 소리와 함께 열렸다.

    “주, 주인어른, 고정하십시오!”

    “집사! 어, 얼른 사람을 모으게! 얼른!”

    “……?”

    “각하,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내가 직접 가지.”

    벤자민은 아벨을 무르고 먼저 다가갔다. 자작은 힘을 헉헉 몰아쉬다가 벤자민이 다가온 것을 보고 그의 옷을 꽉 잡았다.

    “제, 제 딸이……! 그레이스가 납치당했습니다!”

    “……네?”

    늘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던 벤자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인께서 저택에서 납치당했다, 이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믿을 수도 없는 재앙을 맞닥뜨린 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찰나가 지난 후, 그는 멈춰 있던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생각을 마친 듯,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는 모습에 주변에 있는 자들은 섬찟함을 느꼈다.

    벤자민은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린덴 자작에게 질문했다.

    “납치당했다, 라고 말한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요. 협박장이라도 있었습니까?”

    벤자민의 질문에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쥐고 있던 카드를 벤자민에게 보여 주었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다 구겨져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벨이 그 카드의 특이성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글자를 전부 신문에서 오려 붙였군요.”

    “…….”

    벤자민은 카드를 뒤집어 뒷면과 앞면을 몇 번 대조해 보다가 끄덕였다.

    “자작, 일단 자작령의 모든 출입을 봉할 수 있을지요.”

    “그,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작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리자, 벤자민의 뒤에 있던 아벨이 눈을 찌푸렸다.

    오히려 벤자민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자, 자작령은 외부 상인이 가장 활발하게 오가는 시기입니다. 납치범을 자극하면 안 되기에 납치에 대해 알릴 수 없는 지금, 아무런 사유도 알리지 않고 출입을 봉하면 린덴 자작령에 대한 신뢰가 떨어집니다.”

    “……일리가 있군요.”

    린덴 자작령은 특출난 수입원이 없는 땅이었다.

    “그, 그리고 납치범이 제시한 모, 몸값이 무, 무려 천만 젠입니다. 부끄럽게도, 린덴 자작가에는 바로 그만큼 융통할 여유가 없어 납치범에게 다른 거래를 제안해야 하기에 지금 상인들에게서 신뢰를 잃으면 안 됩니다.”

    천만 젠은 자작가 1년 치 예산이었다. 그마저도 넉넉할 때를 상정한 금액이니 린덴 자작령이 얼마나 가난한 영지인지 알 수 있었다.

    “…….”

    벤자민은 린덴 자작의 말을 듣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가지 제안했다.

    “그러면 펠튼 공작가에서 천만 젠을 대신 지불하도록 하지요.”

    곁에서 듣고 있던 아벨은 어떻게 하면 그 돈을 최대한 빨리 융통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대신, 다른 제안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가끔 벤자민을 보필하다 보면 불안해지고는 했다.

    그는 종종 사람 좋은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의문스러운 행동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성문 경비병의 복장을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

    ‘여긴 어디지?’

    좁고 어둡고, 불편하다.

    ‘분명 벤자민이랑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잠시 저택에 들렀는데…….’

    그 뒤로 기억이 없다.

    그레이스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눈과 입 또한 가려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작스럽게 납치라니. 인생이 정말 박복했다.

    몸 자체에 아픈 곳은 없었다.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 게 아니라 약물을 사용한 듯, 머리가 몽롱하기는 했다.

    “으음…….”

    그레이스는 애써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포를 짓누르며 사고를 이어 나갔다.

    ‘르마네티 남작이 배후인 건가?’

    지금 상황에 떠오르는 건 그자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레이스는 하녀들에게 은근슬쩍 광산에서 발견한 새로운 보석을 보여 주며 더 이상 쓰지 않는 장신구를 나누어 주었다.

    ‘그다음에는…….’

    옷을 갈아입었고, 벤자민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향했다. 하녀들을 회유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려 더 이상 그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뒷정리를 맞기고 혼자 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린덴 자작저에서 나고 자랐기에 내부를 훤히 꿰고 있어 혼자 다녀도 길을 헤매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건가?’

    그레이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자작저 내부에 납치범이 잠입했다는 의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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