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9)화 (79/131)

79화

“보러 가고 싶어요?”

“예, 제가 호수 구경을 참으로 좋아해서요.”

“딱히 볼 것도 없을 텐데요.”

“한 번만요. 린덴 자작령의 호수를 눈으로 직접 본 적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벤자민이 린덴 자작령을 와 봤자 몇 번이나 와 봤겠는가, 와도 잠깐 자작저를 들르는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꽤 익숙하게 벤자민을 이끌고 호수 쪽으로 향했다. 벤자민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인께서는 이 길이 익숙해 보이십니다.”

“어릴 때 호숫가에 자주 갔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놀림받을 때면 몰래 호수로 도망치곤 했다. 호수는 매우 드넓어, 구석진 곳으로 가면 숲에 인접해서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꽤 익숙하게 호수로 다가가 손을 담가 보았다. 소매와 드레스 밑단이 젖어 들었다.

“꽤 아름답죠? 제가 자신할 수 있어요. 호수는 많지만, 린덴 자작령에 있는 호수만큼 아름다운 곳은 찾기 어렵다고요.”

“……자신할 만하군요.”

호수 위 윤슬이 은은한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찰랑거렸다. 벤자민은 호수의 풍경을, 정확히는 호수를 바라보는 그레이스를 한눈에 담은 채 서 있었다.

“역시, 린덴 자작령에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다소 성가신 일이 있었습니다만.”

벤자민이 슬며시 웃었다.

‘그 성가신 일이 어제 있던 온실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레이스도 애써 웃어넘겼다. 그 정도는 그냥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글로리 언니가 말한 르마네티 남작에 대해서는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알아봐야겠어. 아직까지는 별일 없으니까 괜찮겠지.’

이 모든 생각이 그레이스에게 있어 커다란 변수가 되리라곤, 당시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

“자작령에 며칠 더 머무르는 게 당신께 더 좋았을까요?”

호숫가를 둘러보다 다시 시내로 나온 뒤, 벤자민이 물었다.

‘3일 뒤 다시 돌아가는 계획이었던가.’

확실히 오랜만에 방문한 것치고는 머무는 기간이 짧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이것도 벤자민의 일정을 고려하면 많은 시간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부 원정이 길었으니까요. 각하께서도 제도에서 예정된 회의가 있지 않나요?”

“음…….”

벤자민은 부정하지 못하고 침음만 흘렸다.

‘내가 그걸 모르겠니.’

원래의 펠튼 공작 부인이라면 모르겠다만, 그레이스는 ‘성녀의 소원’ 애독자였다. 게이트 폭파 사건은 없었기에 원정 직후 긴급 회의는 없었겠지만 다른 일이 널려 있었다.

‘원정 후에 가뜩이나 협회와의 미팅과 귀족 회의가 있었는데 긴급 회의까지 열려서 녹초가 되었다고 했거든.’

그레이스는 바쁜 와중에도 그녀가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해 시간을 내준 것이다.

‘뭐, 원작과 달리 긴급 회의가 사라져서 여유로워진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여유로운 것이었지, 시간이 많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저도 제도로 다시 돌아가고 싶고요.”

“진심이십니까? 원하신다면 일정을 수정해 더 머무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사교계 활동을 다시 해 볼까 한다고요. 가족들을 간만에 만나 반갑기는 하지만…… 그리 긴밀하게 지낸 친구도 없거든요.”

‘한 달은 족히 넘었으니, 톰 버킨의 재판도 끝나고 신전의 도움으로 풀려났을 테니까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고향에 대한 애틋함뿐 아니라 거북한 감정도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레이스의 입장으로서는 린덴 영지를 빨리 떠나는 게 나았다.

‘르마네티 남작에 대해서도 물증은 없으니까, 벤자민에게 조사를 부탁할 순 없어.’

파르머 백작이 르마네티 남작과 동일 인물이더라도 글로리아의 남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글로리아에게 해가 갈 수 있었다.

‘골치 아프네.’

어느덧 점심을 지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자작가로 돌아가던 중 그레이스가 고민에 빠져 걸음이 느려지자 벤자민이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식당을 예약할까요?”

“갑자기요?”

“만약 부인께서 다른 곳에서 식사하길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준비하라, 아벨에게 이르겠습니다.”

벤자민은 지난번, 린덴 자작가의 첫 만찬 때 있던 일을 신경 쓰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는데.’

벤자민이 나서서 편을 들어 준 덕인지 그레이스는 썩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버트의 사과를 받았을 때 이상하리만치 무거워졌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 식사에도 무슨 문제가 없으면 글로리 언니도 나오겠지.’

글로리아는 그레이스에게 이상한 조언을 한 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는 그녀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쩐지 의미불명의 폭탄을 던진 글로리아를 보는 게 찜찜해졌다.

“좋아요. 하지만 잠시 저택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도 될까요? 호숫물에 젖어서 물 냄새가 날까 걱정되어서요.”

“냄새가 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신경 쓰여서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체향에 신경 쓰는 편이었기에 약간의 물 냄새도 타인에게 역한 냄새로 느껴질까 걱정되었다.

“부인께서 정 신경 쓰이신다면 그러시지요.”

벤자민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그의 보좌관인 아벨을 불러 린덴 자작령에 있는 평이 좋은 식당을 찾아가 자리를 예약하라 명했다.

‘샐리는 편지를 직접 보내러 가서 자리를 비웠으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걸 다른 하녀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겠구나.’

본디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도움받는 것을 꺼렸으나 여긴 린덴 자작령이었다. 펠튼 공작가까지 따라오지 않았으나, 어린 그레이스를 돌봐주던 이들이 남아 있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마중 나온 하녀들을 보고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말했다.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그럼 마차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펠튼 공작가의 하녀들은 그레이스에게 매우 친근하게 말을 거는 편이었는데, 린덴 자작가의 하녀들은 말수가 적었다.

오죽하면 드레스 룸으로 이동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어 그레이스는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옷을 고를 때쯤이 되어서야 하녀들이 입을 열었다.

“공작가에서 맞춘 옷치고는 장식이 적군요.”

“천은 고급이지만 아가씨께서는 공작 부인이 되셨는데 말이에요.”

“혹시 품위 유지비를 제대로 지급해 주지 않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레이스는 어째 하녀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만약 공작가의 하녀가 한 명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복장 터졌을 상황이었다.

“옷의 품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좀 크지 않을까요?”

‘딱 맞겠지.’

원정을 떠나기 전, 조금 컸을 때 샐리가 맞춰 수선해 주었다. 그리고 저 하녀들의 염려는 사실 무례에 가까웠다.

린덴 자작가의 하녀들은 그레이스를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무시했다.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츠려지려던 몸을 애써 펴냈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릴 적과 지금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답이 딱 나왔다.

‘가십지네.’

그레이스가 얼마나 무능한 공작 부인인지에 대해 자극적으로 적혀 있는 제국의 가십지. 귀족들도 읽지만 그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떠드는 건 평민이었다.

원래부터 또래들에게 괴롭힘당해도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공작 부인이 된 후에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건 그런 성향이 쭉 이어졌다는 반증이었다.

자작가에서 일하는 이들은 어지간하면 토착 영주민들 중에서 뽑는다. 펠튼 공작가라는 높은 가문과의 연줄이 생겨 드디어 자작령이 성장할까, 하고 누구보다 기대하고 있던 영주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고 나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답답해졌을 테고, 그 불똥이 나한테 튄 거지.’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형태였다. 거기에 가십지라는 장작까지 더해지니 그레이스에게 부정적 감정을 표출해도 된다고 판을 까는 꼴이었다.

“잘 맞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지금의 그녀는 재단사를 만났던 날처럼 기분이 나쁠 때도 아니었고, 굳이 린덴 자작가의 식솔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서 잘못 대했다가는 자작 부인이 하녀들의 편을 들 수 있었고, 자작 부인이 그레이스의 편을 들어준대도 저들이 앙심을 품을 수 있었다.

‘화가 나서 가십지에 제보를 할 수도 있으니.’

넘어갈까?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공작가로 돌아가니 상관없을 거라 여기던 그레이스는 생각을 바꿨다.

‘여기서 처신을 잘하면 가십지의 소문을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제국의 가십지는 제도에서 만들어 뿌린다. 즉, 린덴 자작령의 입소문이 가십지의 발행 속도보다 빠르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지금 린덴 자작령은 상인이 오가는 시기였기에 소문이 퍼지기 딱 좋았다.

‘흠.’

“하지만 너희에게는 맞지 않을 테니, 그건 미안하구나. 이런 게 아니라 다른 걸…….”

“……?”

그레이스가 한 손을 뺨에 사뿐히 올려 둔 채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실 말이지, 아니야. 이런 건 말하면 안 되지.”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아니야. 이건 원정 동안 있던 일인데, 별로 좋지 않은 일이거든. 소문나 봤자 좋지 않은 일이라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