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5)화 (75/131)
  • 75화

    “……일단 혹시 모르니 부인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요.”

    집의 주인은 자작이었으나, 아쉬운 것 또한 자작이었다. 그는 이 수프에 있는 농작물로 벤자민에게 투자를 받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했다.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린덴 자작령에까지 들리는 소문 속에서는 그레이스의 입지가 애매했건만, 벤자민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전혀 아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린덴 자작은 벤자민의 태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적어도 제 딸이 펠튼 공작가에서 괴롭게 지내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방장을 불러오게.”

    린덴 자작이 집사를 시켜 주방장을 불러오자, 나타난 것은 총주방장이 아니라 그의 제자였다.

    그는 이런 자리에 혼자 불려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색한 얼굴로 쭈뼛쭈뼛, 모자를 손에 쥔 채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방장은 어딜 가고 그대가 여기에 나온 거지?”

    “그, 그것이…… 주방장님이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져, 급히 귀가했습니다”

    ‘역시나.’

    그레이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작에게 보고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 오늘 큰 손님이 오신다고 하여 큰 소란이 일어날까 봐 미처 보고드리지 모, 못했습니다.”

    만약 다른 귀족 가문에 펠튼 공작 같은 거물이 방문했다면 당연히 귀빈 접대를 담당하는 한 축인 주방장의 갑작스런 부재를 가주에게 알렸겠지만, 벤자민은 지금 가주의 사위로 자작가를 방문한 것이다. 이에 조용히 넘어가기를 택한 집사의 선택이 빚은 일인 것이다.

    ‘아마 주방장은 이 수프를 먹고 탈이 났을 거야. 하지만 주방장은 만찬에 나오는 모든 음식을 맛보았을 테니 원인이 뭔지를 알지 못했을 거고.’

    그리고 맛을 볼 때는 많이 섭취하지 않는다. 그리 심각한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 그저 컨디션 난조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수프 안에 있는 분홍색 건더기와 이파리를 스푼으로 떠 보았다.

    “이 재료가 주방에 남아 있으면 가져올 수 있겠나?”

    “……네.”

    오랜만에 돌아온 아가씨가 남편의 위세를 업고 유별나게 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그레이스는 심각한 낯으로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이파리를 갈아 넣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내온 재료를 본 그레이스는 자신이 생각한 게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바브.’

    이 제국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식재료 중 하나로, 샐러리와 비슷한 외관을 가진 식물이었다. 잘 익을수록 분홍색을 띠며 톡 쏘는 신맛이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였다면 그레이스가 이렇게 저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루바브는 뿌리는 약용으로 쓰이고 줄기는 식용으로 쓰이지만, 이파리에는 다량의 독성 성분이 들어 있었다.

    ‘루바브의 이파리에는 옥살산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원래 세상의 기억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그레이스가 처음 루바브의 모종을 상인에게 샀을 적에는 이파리의 위험성에 대해 들은 적 없었다. 상인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판 것인지는 이제 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방장이 이것의 이파리를 섭취하고 나서 호흡을 어려워하고 구토 증상을 보이지 않던가?”

    “…….”

    그레이스의 질문을 받은 자는 외부인, 벤자민의 시선도 있던 터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그 태도에서 답이 나왔다.

    ‘이 세계의 루바브도 똑같은 거지.’

    “그, 그 채소로 인한 결과라고 속단하기에는 이른…….”

    “맞군.”

    수프의 맛을 본 게 총주방장만은 아닐 테니, 한둘 정도 더 몸이 안 좋다는 자가 나왔을 것이다. 재료의 신선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새 재료로 다시 준비한 수준이었겠지.

    “이것의 이파리에는 독이 들어 있네. 혹시 모르니 지금 당장 구토제를 준비해 오고, 새로운 식사를 준비해 오도록.”

    “……네.”

    일단 여기까지 말한 그레이스는 한시름 놓고 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되었겠지?’

    그런 그레이스에게 벤자민이 물었다.

    “부인께선 어찌 이 식물에 대해 그리 잘 아시는지요?”

    “……네?”

    벤자민은 수프 접시를 옆으로 슥 밀어 두고, 양손을 겹쳐 잡은 채 그녀를 직시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 작물은 이번에 린덴 자작령에서 재배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부인은 근 1년간은 제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그렇죠?”

    “그러니, 어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식당 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돌았다. 그레이스는 이 식당 내에서 편안한 사람은 벤자민뿐일 거라 확신했다.

    “보통 만찬회의 메뉴는 주방장이 조리하지만, 메뉴의 지정은 주인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식자재 또한 자작 부부께서 승인하신 것일 텐데…… 어째 부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화, 화났나?’

    벤자민은 늘 그렇듯 다정한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말했지만 어째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레이스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예전에 온실에 심어 보았던 것 중 하나라서요.”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린덴 자작 부인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 그레이스가 예전부터 꽃구경을 좋아해, 종류도 잘 모르면서 이것저것 사 오곤 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 온 게 무엇인지 물어보곤 했죠. 안 그러니, 글로리아?”

    “네, 기억나요. 참 사랑스러웠죠.”

    “…….”

    그레이스는 힐끔, 린덴 자작 부인과 글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말 추억여행에 빠졌다기보다는 나름대로 열심히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벤자민은 별말을 얹지 않고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웃는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제대로 안내를 드려야 했는데, 최근 공작가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 보여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즘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

    그레이스는 이쯤에서 길버트가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벙 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작물을 온실에서 처음 발견하고 상품화하기에 나쁘지 않은 품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종자로 대량 재배에 나선 것입니다.”

    길버트는 그리 말하고서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덤덤하고 올곧은 시선은 무언가 섬찟했다.

    어릴 적, 그레이스가 놀림 받을 때 길버트가 외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네가 심어 놓은 작물인 줄을 미처 몰랐구나. 미안하다, 그레이스.”

    “……!”

    길버트에게 사과를 받을 줄 몰랐던 그레이스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작 이런 사과가 무엇이라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한 사죄였음에도 말이다.

    “괘, 괜찮아요. 가문에 도움이 되면 저야…… 좋고요.”

    그레이스는 말하면서 제 말이 어법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지는 않는지 걱정되었다.

    조금 전까지 루바브의 어디가 문제였는지는 또렷하게 잘만 말했으면서 길버트에게 사과를 받을 때에는 왜 당당하지 못한지 모르겠다.

    ‘내가 그레이스가 아니라서 그런가?’

    사과는 그녀가 받아야 마땅한데, 빙의된 자신이 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조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직감했다. 지금 여기에 앉은 게 원래의 그레이스였어도 저와 똑같이 행동했으리라는 것을.

    길버트가 사과한 것은 그저 후계자로서의 마땅한 행동이었다. 가문 내에서 자작 다음으로 높은 위치이지만 자작은 아닌 그가 사과함으로써, 자작이 사죄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주지만 가주가 사과한 것은 아니니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 준 것이다.

    ‘애초에 사돈 사이고 고의가 아니니까 이런 걸로 큰 문제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그레이스는 속이 갑갑해졌다. 잠시 후, 구토제가 전달됐다.

    ‘입맛이 없어.’

    그레이스는 구토제가 든 병을 만지작거렸다.

    저택에서 먹은 것, 오는 길에 벤자민과 노니며 먹은 것까지 전부 게워 내도 오늘 남은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속이 갑갑했다.

    사과하는 길버트에게 당당하게 괜찮다며 눈을 마주하지 못한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은 몇 가지 기억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특히나 놀림받거나 무시당하는 기억이 많았다. 영주의 딸이었음에도 아무런 후환이 없어, 영악한 아이들이 신이 나 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확실하지.’

    순수하다고 해서 착하단 건 아니니 말이다.

    ‘길버트…… 오빠가 나한테 사과할 줄이야.’

    그레이스는 결국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는 힘이 쭉 빠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방금 방에서 가져온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것에는 별의별 기록이 다 들어 있었다.

    “……흠.”

    린덴 자작 부인은 워낙 유별나 종종 자녀의 일기장을 찾아 읽곤 했다. 그래서 펠튼 공작 부인은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일기장을 나누었다.

    ‘발견되기 쉬운 가짜 일기장, 그리고 숨겨져 있지만 찾기 쉬운 가짜 일기장…… 마지막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진 진짜 비밀 일기장으로 말이지. 진짜 철저하고 복잡하게도 살았어.’

    그리고 이게 진짜 비밀 일기장이었다.

    가짜 비밀 일기장을 찾으면, 그걸 찾은 린덴 자작 부인도 ‘아이가 그러면 그렇지 뭐.’ 수준으로 넘어가며 만족하리란 걸 어렸던 펠튼 공작 부인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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