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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3)화 (73/131)

73화

“그으, 냥 침대에서 같이 자면 되잖아요.”

“……!”

그레이스는 혀를 씹을 위기를 넘기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벤자민은 그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네?!”

그가 다시금 물었다.

“그, 그러니까…… 서, 선 같은 거 그어 두고! 자면 되잖아요!”

웃기는 꼴이었다.

그레이스에게는 제대로 된 기억이 없지만, 2년차 부부였다. 물론 동침 한번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부부였다.

그럼에도 둘은 침대를 같이 쓴다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소리를 높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크고 빠르게 뛰었다.

“그, 그건 그렇습, 습니다만…….”

“그, 그렇죠?!”

벤자민은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목뒤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침음을 삼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으, 호, 혹시 제가 자, 잠버릇이 있다던가 해도 괜찮습니까?!”

“가, 가령…… 어떤?!”

“…….”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더욱 빨개진 그는 툭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잠버릇 없습니다!”

“……각하?”

벤자민이 순식간에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레이스가 놀라 주춤했다.

“있어도 없는 겁니다! 아무튼요!”

“네, 네…….”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음흉한 속내라도 들킨 소년처럼 얼굴을 붉힌 벤자민은, 제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을 자각한 것인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등을 대었다.

“그, 그것보다 저택 내부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 나쁘지 않겠네요. 네, 그래요.”

그레이스 또한 조금 전의 대화로 이상하게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기에 환기가 필요한 참이었다.

부부가 고작 침대 나눠 쓰기로 이렇게 난리 났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우리 둘밖에 없어서 다행이다.’

다른 하인이나 기사들은 방 근처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진짜 뭔 난리니…….’

그레이스는 벤자민과 함께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걸을 때마다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정말 기억 그대로야.’

남의 기억을 엿보는 것일 뿐인데 누군가가 숨겨 둔 보물을 찾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보세요, 여기 홈이 보이죠?”

“그러게요. 이런 흠집을 고치지 않았다니…….”

벤자민은 말을 아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키를 기록한 거예요. 오빠랑 언니랑 제가요.”

“형제분들과요?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네, 당연하죠. 언니는 왼쪽, 오빠는 오른쪽에서, 전 가운데로 홈을 파 넣었거든요. 이거 보세요.”

그레이스는 가운데 홈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현재의 그레이스보다 낮은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부인의 키보다 낮군요.”

“아, 그때 혼났거든요. 저택에 자국을 남긴다고요.”

“부인께서도 어릴 때 절대 혼나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의외입니다.”

“각하께서는 전혀 혼나지 않으셨나 봐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레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벤자민을 보다가 풉 웃었다.

“각하께서 먼저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언제 말입니까?”

“부인께서‘도’라고요. 당신께서 혼나지 않았으니, 그리 말한 거 아닌가요?”

벤자민은 그제야 자신의 표현법을 깨닫고 끄덕였다.

“제 불찰이군요.”

“뭘 그렇게까지 말해요. 예상대로인걸요. 당신은 예전부터 지금 그대로였을 거 같아요.”

“사실은 아주 되바라진 청년이었을 수 있습니다. 막 삐딱하고, 못되고, 세상을 비틀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 말입니다.”

“에이…….”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믿을 걸 믿어라.’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반응은 뭡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벤자민은 제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그레이스를 향해 영 불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밖에 있던 그 유리온실은 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까?”

“관리할 만한 인원이 없어서 그래요.”

“정원사는 있지 않습니까?”

린덴 자작가의 정원은 넓진 않아도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실력 좋은 정원사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레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 명뿐이라서 거기까지 관리하기에는 손이 부족했거든요. 예전에는 그래도 제가 들르긴 했지만요. 가 볼래요?”

“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궁금했구나.’

그런 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다만 벤자민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반짝였다.

“그, 그렇게 기대할 건 없어요.”

“네!”

“진짜로요.”

“알겠습니다!”

“실망하셔도 저는 몰라요?”

“절대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레이스는 그가 왜 이렇게까지 바깥에 있는 작은 온실을 기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안내하기 위해 바깥으로 이동했다.

바깥에 있는 유리온실은 가까이 가니 더욱 너저분했다. 일전에 방문했던 샤를 소후작 부인의 온실이 떠올라 더욱 초라해 보여 민망했다.

‘아직도 그냥 열리려나?’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살짝 녹이 슬어 마찰음이 들렸지만, 쉽게 열렸다.

그레이스는 이 자작가의 식솔 중 그 누구보다 온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온실은 그레이스의 할머니가 가꾸었던 공간이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대대로 가꾼 온실이지만, 대가 끊겼지.’

그 원인을 말하자면,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의 손재주가 애매했고, 딱히 예쁜 꽃을 심어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부적격자에게 넘어가 망한 거지.’

이 온실은 그레이스의 할머니가 돌보다가, 바로 어린 그레이스가 물려받았다.

‘그 이유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딱히 현명한 선택 같지는 않아.’

그레이스는 참담한 마음으로 온실 내를 둘러보았다.

온실 내부는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보여 주기 민망할 정도네요…….”

“아무도 돌보지 않은 땅은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생명력이 넘쳐 보기 좋아 보입니다.”

‘이런 꼴을 보고도 칭찬 한마디를 건네다니, 대단하네…….’

그레이스가 애써 웃어넘기려고 하자, 벤자민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중 무엇이 부인이 가꾼 겁니까?”

“이미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저쪽 구역이에요.”

벤자민은 바로 끄덕이며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레이스가 말한 방향으로 향했다.

“음? 부인, 이쪽을 와 보십시오.”

“뭐라도 발견했나요?”

“이 온실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고 하셨죠?”

“네.”

“……그러면 뭔가 이상하군요.”

벤자민은 발끝으로 톡톡, 한 부근을 두드렸다.

‘이건……?’

“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파헤친 지 얼마 안 된 흔적이 온실에 남아 있었다.

“혹시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음, 아니요.”

설령 기억이 온전하다고 하더라도, 2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온실의 구역을 완벽히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안다고 해도 가져간 것이 부인이 키운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요.”

“설마 제 것을 가져간 거겠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다른 목적이 있었겠죠.”

“하필 부인의 온실이 파헤쳐진 것이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실이라고 할 수 있나, 이걸.’

잡초밭이 된 이 장소는 온실이라기보다는 밀림이라는 말이 더욱 적합했다.

벤자민은 파헤쳐진 부분과 나머지 구역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를 바라보다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방금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다른 게 자라났을 수 있지만요.”

“……! 어떻게 말입니까?”

“기록이요. 제 방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레이스 펠튼, 그 시절에는 그레이스 린덴이었던 이 여자는 예전부터 지독하게 기록하길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

그레이스의 방은 2층 동관 복도 맨 끝 안쪽에 있었다. 사람이 제일 오가지 않고, 어찌 보면 으스스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깨끗하군.’

방의 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레이스가 출가하면 바로 창고로 쓰거나 다른 목적으로 바꿀 줄 알았건만, 가구 배치는 그녀가 출가하기 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그레이스가 읽었던 책들은 모두 사라진 후였다. 다른 곳에 팔거나 기부, 혹은 버린 듯했다.

‘아니지, 결혼하면서 가져갔겠지. 보통은 그러니까, 응. 그게 맞지.’

그레이스는 너무 자연스럽게 버렸을 거라는 생각을 정정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텅 비었군요.”

“제가 결혼하면서 많은 것을 치웠을 테니까요. 그래도 가구는 그대로 두었다는 게 신기하네요.”

“가족들이 쓸쓸했겠습니다.”

“……그랬을까요?”

그레이스는 린덴 자작가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다. 언니도 이젠 결혼해서 출가했지만, 당시에는 약혼한 사람도 한 명 없던 채였다.

‘그래서 다들 엄청 놀랐던 것 같아.’

원작에도 없던 그레이스의 감정이다. 기억이 대강 있으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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