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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2)화 (72/131)
  • 72화

    “어서 오십시오, 손님~. 궁금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계속 제 가게를 기웃거리는 그레이스를 발견한 상인이 미끼를 문 물고기를 본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 열매는 무엇인가요?”

    “아, 이것으로 말할 거 같으면, 아르시아 왕국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름이, 스카샌더라 열매였습니다.”

    “아르시아 왕국에서요? 그러면 멀리서 돌아왔네요.”

    “뭐, 같은 남쪽이니 그리 멀지는 않죠! 이제 서부로 갈 예정입니다!”

    “서부는 저번까지 오염 사태로 술렁이지 않았던가요?”

    그레이스는 스카샌더라 열매라고 불리는 것을 한 알 만져 보며 상인을 떠보았다.

    제국의 민심을 파악하기엔 상인의 눈이 확실했던 탓이다.

    그러자 상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서부로 향하셨다는 건 이미 상인이 아니라도 아는 소식 아닙니까?”

    ‘……음?’

    그렇다고 해도 정화의 진척 상황이나, 영지의 상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는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퍼졌나 보네.’

    정화가 다 끝났지만, 영지의 상태가 꽤나 끔찍해 많은 물자가 필요하다는 정보가 상인들 사이에서 퍼진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다른 비옥한 영지를 두고 서부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상인들에게만 도는 소문이 있거나.’

    상업이란 싸게 산 물건을 비싸게 파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들은 모르는 정보가 필요했다.

    “하나만 섭취해 보아도 되겠나?”

    “부, 부인.”

    그녀는 스카샌더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물론이죠! 독성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아, 이쪽을 드셔 보심은 어떠십니까?”

    그 상인이 건넨 건 건조된 열매가 아니라 싱싱한 쪽이었다. 뿌리째 캐서 마도구로 보존시킨 넝쿨 식물의 모습이 보였다.

    ‘간이 비닐하우스 느낌인가…….’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걱정을 뒤로하고 싱싱한 스카샌더라를 입에 넣자, 오묘한 맛이 입에 퍼졌다.

    “읏…….”

    “부, 부인. 괜찮습니까? 혹시 이상한 것 아닙니까? 아니면…….”

    약간 달면서도 짜지만 신맛이 강하다. 이 특이한 향과 씨앗을 씹으면 쓰다기보다는 혀에 아린 떫은맛이 남았다.

    그레이스는 이 맛을 알고 있었다.

    ‘이거 오미자잖아.’

    갑자기 왜 이게 여기서 나오는데. 잠시 장르 이탈을 한 기분이 들었다.

    “아뇨, 전 이거 좋네요.”

    하지만 취향이긴 했던 터라 계속 입 안에서 씹었다.

    ‘이거 살까?’

    원래의 그레이스 또한 어릴 적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구매하고는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뭔지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데 용돈을 낭비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곤 했지.’

    그레이스는 그 기억 탓에 이 열매 또한 마음에 들지만 살지 말지 망설이게 되었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상인에게 말했다.

    “이 열매를 전부 구매하도록 하지.”

    “……?!”

    “열매 외에도 묘목 전부.”

    “가, 각하?”

    “혹시 따로 키우는 방법이 있나? 안다면 방법을 뒤에 따라오는 이에게 알려 주도록.”

    벤자민은 뒤에 따라오고 있는 아벨에게 손짓하며 다가오라고 한 뒤 그레이스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가, 각하, 그걸 전부 매입하시게요?”

    “여기서는 다르게 부르는 게 좋겠군요. 그 호칭은 너무 눈에 띄니까요.”

    “그러면, 베…… 베니?”

    예전, 가면 축제 때를 떠올리며 그레이스가 호칭을 바꾸자 벤자민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고아원분들이 간 차밭과 아르델 백작령 쪽으로 나눠서 보내 볼까 합니다. 어느 쪽이 키우기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요.”

    ‘이거 갑질 아냐?’

    그쪽 입장에서는 갑자기 후원하고 있는 대기업 회장이 턱하니 뭣 좀 키워 보라고 난해한 걸 주는 격이 아닌가 싶어, 미안해졌다.

    “나름대로 지원 자금을 주는 명목도 되니 괜찮을 거 같습니다. 잘되면 사업 자금도 되고 말이죠.”

    “아아…….”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신경 쓰일까 나름대로의 변명을 말해 주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걸 여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려나.’

    그레이스는 손에는 말린 스카샌더라, 그러니까 오미자가 담긴 봉투를 들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무언가 불편한 게 있나요?”

    “아뇨……. 아무것도.”

    ⋆★⋆

    “어서 오…… 어머.”

    린덴 자작가에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자작 부인은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모습을 드러낸 손님들의 모습에 한 번, 그들의 품에 한가득 들려 있는 물건에 두 번 놀랐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보네요. 해가 지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에요.”

    “밤의 풍경도 아름다웠을 텐데 아쉽습니다.”

    “…….”

    “시간은 많을 테니 후에 천천히 즐겨 보시지요.”

    그레이스는 제 품에 들려 있는 꽃다발을 끌어안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린덴 자작 부인은 벤자민과 인사를 나누다가 그레이스에게 상냥히 웃어 보였다.

    “잘 지낸 것 같구나. 꽃을 좋아하는 것도 여전한 것 같고.”

    “……네.”

    린덴 자작령이 넓지 않은 만큼, 자작가의 정원 또한 그러했다.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

    오죽하면 자작가의 본저택이었음에도 다른 귀족들의 별장보다 현저히 규모가 작았다.

    “…….”

    그레이스의 시선은 저택의 뒤편에 있는 낡은 유리온실에 닿았다. 오랫동안 사람이 관리하지 않았는지 정체 모를 식물들이 뒤덮여 있는 지저분하고 작은 건물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음, 어머니…… 각하와 저는 장터에서 이것저것 먹고 와서 저녁을 늦게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어머, 그러니? 그럼 만찬 시간을 조금 미루도록 하마.”

    린덴 자작 부인은 그만큼 시간이 늘어났으니 만찬을 더욱 완벽히 준비하겠다며 웃어 보였다.

    “방을 안내해 주마. 집 내부는 크게 바뀐 것 없으니,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편히 둘러보렴.”

    “그래도 되나요?”

    “그럼, 너도 각하께서도 우리 가족인데.”

    ‘가족…….’

    그레이스는 가족이란 단어를 입 안에 굴렸다. 묘하게 까끌거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 계단 위에 거대한 초상화가 보였다. 린덴 자작가 전부, 시집을 간 딸 모두가 그려져 있는 것이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청혼받기 전에 그린 것으로 보였다.

    ‘새로 그리지 않았나 보다.’

    아름답고 완벽한 언니 오빠 옆에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서 있는 그레이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초상화 속에서 아버지가 그레이스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는 언니와 손을 잡고 있었지만 어째 보기 거북했다.

    ‘자격지심 같은 거지.’

    결국 그레이스는 시선을 거두고 앞장서는 어머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벤자민과 나란히 서 그녀의 안내를 따라가던 그레이스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음?’

    지금 그레이스는 벤자민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건 매우 당연한 상식이었는데.

    ‘잠깐만.’

    보통 부부가 손님으로 찾아오면 방을 하나만 내준다.

    “공작가에 비하면 누추하겠지만, 부디 편히 쉬다 가세요.”

    “……아닙니다. 정말 좋아 보이, 큼, 보이는걸요.”

    “……음.”

    당연하게도, 침대도 하나다.

    그레이스는 힐끗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서 있는 벤자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

    어째 그레이스의 얼굴도 새빨갛게 익는 기분이 들었다.

    둘 사이의 오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린덴 자작 부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나자, 적막만이 흘렀다.

    “…….”

    “…….”

    그레이스의 심장이 제멋대로 뜀박질했다. 어색해서 죽을 거 같고, 이 침묵을 어떻게든 깨부수고 싶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벤자민이었다.

    “그, 자작 부부나 집사에게 말해 방을 하나 더 달라고 할까요?”

    “……아뇨.”

    그레이스는 작게 대답했다. 결코 벤자민과 같은 방, 침대를 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방이 부족할 거예요.”

    “……음.”

    자작가의 방은 그리 많지 않았다.

    펠튼 공작가에서 데려온 인원에 현재 시기가 시기인지라 맞이할 손님들의 수까지 고려해 보면 빠듯하다 못해 부족한 수준이었다.

    벤자민도 자작가의 규모를 생각하다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각하가 소파에서 주무시기엔 짧고 좁을 텐데요.”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알죠.”

    “한번 대보실래요?”

    벤자민은 성큼성큼 소파로 가 누웠다. 그러나 약간 짧아 몸을 구부정하게 해 누울 수밖에 없었다.

    폭 또한 편히 눕기에는 약간 좁아, 누워서 잔다면 뒤척이기에도 불편해 보였다.

    그레이스는 소파 등에 기댄 채, 벤자민이 약간 불편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대보지 않아도 안다니까요.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인의 말이 늘 옳은데 말이죠.”

    벤자민은 약간 민망한 표정이 된 채, 상체를 일으켰다. 그레이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소파에 누울까요?”

    “아뇨! 그건 안 됩니다! 몸이 상할 겁니다!”

    “그러는 각하께서는 소파에 눕겠다고 하셨으면서.”

    “……그, 그거랑 이거랑 같지는 않습니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벤자민은 계속 쩔쩔매는 얼굴로, 다르다고 웅얼거렸다.

    소설 속에서는 늘 어른스럽고 다정했는데. 그레이스는 그런 벤자민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리숙하게 구는 벤자민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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