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1)화 (71/131)
  • 71화

    “부인,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얼른 기차를 타러 가고 싶네요.”

    그래, 그레이스는 인정했다. 이건 좀 창피하다.

    사실 펠튼 공작가의 위상에 맞지 않게 자신이 좀 못난 게 아닌가 싶어 자괴감이 들 뻔했는데, 다들 그런 그녀를 무슨 금은보화라도 되는 양 에워싸서 보호하려 드니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았다.

    오죽하면 그레이스는 현재 앞 옆 뒤, 어디를 둘러보아도 기차역 내부를 온전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왜 이 정도까지 하는 거야?’

    “……샐리, 있잖니.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이신가요?”

    “말씀만 하십시오, 마님!”

    “급한 것이라면 저에게 맡겨 주셔도 괜찮습니다.”

    “마님, 유사시를 대비하여 하나뿐인 하녀는 옆에 두고 남아도는 기사를 부려 먹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샐리를 불렀을 뿐인데 주변 기사들이 모두 아우성이었다.

    그레이스는 눈물 났다. 그들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몰랐던 탓이다.

    원래부터 펠튼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레이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지난 원정 중 신전 측 사제가 그레이스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벤자민까지 왜 이러는 건데!’

    사실 기사들보다도 벤자민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어찌나 빨랐는지, 샐리보다도 답을 먼저 했다.

    그레이스는 제 머리 색보다도 더욱 새빨개진 채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고, 신문…… 한 부만 사다 줄 수 있겠니, 샐리.”

    그녀는 지금 당장 신경을 돌릴 수 있는 물건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

    린덴 자작령.

    그곳을 설명하자면, 아름다운 호수가 하나 있는 작은 영지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호수 외에는 특색이 없다. 호수 자체도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허울 좋은 전설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전설도 사실 우스갯소리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뭐였더라…… 그래, 무슨 병이든 치료해 준다는 전설이었나?’

    그레이스가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이런 쓸데없는 기억을 더듬으며 감상에 잠긴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신문은 다 읽은 지 오래였으며, 이제 막 린덴 자작령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울렁거려.’

    그레이스는 린덴 자작령에 도착할 때 어떤 기분일지 두려웠다. 낯선 땅에 도달한 기분일까 무서웠고, 여행지에 도착한 기분일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 기분은 정말 그런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한 경치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립고 애틋한 땅,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글픔이 깃들어 있었다.

    ‘기억 때문인가?’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익숙하고, 애틋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레이스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대신, 린덴 자작령을 바라볼 뿐이었다.

    작디작은, 발전이 더딘 영지.

    그럼에도 펠튼 공작 부인, 원래의 그레이스가 린덴 자작 영애이던 시절부터 사랑했던 땅. 작지만 그만큼 토지가 비옥하고, 햇살이 잘 드리우는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이제까지 한 번도 린덴 자작령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정작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니 그리움이라는 것이 마음에서 사무쳐 넘쳐흘렀다.

    “자주는 오지 못했지만, 올 때마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멍하니 린덴 자작령을 보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벤자민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레이스가 아연히 말했다.

    “……네, 무척이나요.”

    이미 린덴 자작령 사람들은 펠튼 공작 가문의 방문을 고지받아 준비된 상태였다. 영지의 성문 앞에 서 있던 린덴 자작이 활짝 웃으며 둘에게 다가왔다.

    “공작 각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레이스, 너도 고생 많았다.”

    “무엇을요. 자작, 말 편히 하십시오. 장인어른 아니십니까.”

    벤자민은 방긋 웃으며 린덴 자작에게 예를 표했다. 린덴 자작은 자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두 사람을 태우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는 길에 할 것도 없는데 지루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괜찮았습니다. 부인께서도 괜찮았지요?”

    “아, 네. 저야 신문을 읽었으니까요.”

    어째서인지 그레이스가 신문을 받기 전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했다만,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받기는 했다.

    ‘십자말풀이나 숫자 퍼즐 게임 페이지가 있어서 그거 하다 보니까 시간이 가기도 했지.’

    그것 외에도 꽤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사건도 많았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사건까지 묘사되어 있어, 그레이스는 적잖이 충격받았다.

    “……음, 잔인한 사건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하지만 잔인한 것보다, 납치 사건이 있었는데…….”

    그레이스가 읽은 내용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마차가 덜컹거리며 내부가 심하게 흔들렸다.

    “……다, 다치지는 않았니?!”

    자작은 몹시 당황하며 매무새가 흐트러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마차가 흔들리자마자 벤자민이 잡아준 덕에 그레이스는 멀쩡했다.

    “네, 각하 덕분에요.”

    “무슨 일인가요? 혹시 마차가 고장난 겁니까?”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붙들고 있던 손을 빨리 떼 내고 창밖을 살폈다. 자작령 내는 평소보다 마차가 붐비는 상태였다.

    자작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시기가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린덴 자작령 내를 활발히 이동하는 때라서 사람이 붐빕니다. 그레이스도 어릴 때 이 시기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렇지?”

    순간적인 사고로 인해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자작이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끄덕였다.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상인도 있었으니까요.”

    “그래, 너는 그때마다 쓸데없는 것을 사고는 했지.”

    “…….”

    “부인께서 무엇을 샀을지 나중에 직접 들어 보고 싶군요.”

    “……그래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말이 그저 인사치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에 정말 하나하나 말해 주었다가 제가 우스운 꼴이 되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그럼요.”

    그러나 벤자민은 진심인 듯 느리게 끄덕이다가, 마부석 방향을 두드렸다.

    “마차가 여전히 덜컹거리는군요. 조금 전 일로 바퀴가 느슨해졌나 봅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 벤자민이 먼저 내려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자작가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거 상점가를 구경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벤자민을 내려다보았다.

    “싫으십니까?”

    “아,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갑작스러워서요.”

    “대화가 나온 김에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부인께서 이맘때 흥미를 갖는 물건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벤자민이 방긋 웃었다.

    “눈여겨보면, 다음번에 제가 부인께 점수를 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점수를 그렇게 따시려고요?”

    그레이스는 괜히 샐쭉하게 물어보았다. 벤자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궁금하시면 제 손을 잡아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

    그레이스는 결국 벤자민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거절할 생각도 없긴 했다.

    마차가 미묘하게 덜컹거려 불편하기도 했고, 현재 상인이 많이 모인 철이라 궁금하기도 했던 탓이다.

    ‘지금이 딱 그 시기였구나.’

    린덴 자작령은 매해 주기적으로 상인이 길게 머무는 때가 있었다. 그때가 린덴 자작령이 돈을 버는 대목이었고, 축제였다.

    ‘린덴 자작령 영주민들도 대체로 가면 축제보다 이 시기를 더 좋아했지.’

    인프라의 차이가 만들어 낸 인식 차이였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을 거예요. 제도에서 열리는 축제에 비하면 규모가 작거든요.”

    “북부의 밤보다는 즐겁겠지요.”

    “그렇게 말하면 조금 반칙 같은데요, 각하.”

    “하하.”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린덴 자작령은 남서부에 위치한 땅이었다. 꽤 후미진 곳에 있어 상업의 요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큰 상단의 갑질을 운 좋게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덕에 특이한 물건을 갖고 있는 상인이 많다고 해야 할지, 수요가 없는 물건을 떨이판매하려는 상인들이 많다고 해야 할지.’

    그 모든 것이 얽히고 얽혀 린덴 자작령은 상인들의 거래가 비교적 활발해도 영지의 발전은 느렸다.

    ‘차라리 호수에 얽힌 전설을 잘 팔아서 관광 사업을 하는 게 돈을 잘 벌겠네.’

    아무튼 린덴 자작령은 운이 좋게도 서부 오염 사태에 얽히지 않아, 땅은 여전히 생명력이 넘쳤고, 영지민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그건 정말 다행이지. 린덴 자작령의 유일한 장점이 토지니까 말이야.’

    그레이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근처에 있는 가판대로 다가갔다. 주인은 잠시 안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근처에 있는 것을 가리켰다.

    “각하, 이걸 보세요.”

    “무엇입니까?”

    “음, 보니까 열매를 보존식으로 만들어 둔 것 같아요. 모종이나 씨앗도 파는 것 같고요.”

    보존식으로 파는 걸 보면 이 지역이나 날씨에서는 팔기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어째 낯이 익어 보이는데.’

    그레이스는 분명 이 몸의 기억이나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열매였는데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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