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거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일반 제국민은 할 수가 없으니까 논외고.’
애초에 저주 매개체가 터진다는 설정이나 정보를 접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실베스터의 저주를 아리아가 풀 수 있는 건 특이한 케이스였어. 사람의 몸에 직접적으로 저주가 걸린 것도 특이했으니까.’
그런 저주는 제국은커녕 전 세계를 뒤져 보아도 실베스터 단 한 명뿐이었다.
아리아는 생각에 잠긴 그레이스를 빤히 바라보다 뒤늦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날, 부인의 안개가 흩어진 걸 보았는데…… 여기서 다시금 뵈었을 때는 다시 안개에 둘러싸여 계셨어요.”
“……네?”
계속 똑같이 ‘네?’ 하고 반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다른 반응은 없었다.
“……황태자 전하의 저주는 악화된 적이 없어요.”
“…….”
“한 번에 풀리지는 않았지만, 점점 완화가 되는 게 눈에 보였거든요. 하지만 공작 부인의 경우에는 완전히 저주가 풀렸는데 오늘 다시 보니까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그래서 비슷하다고 하신 거군요.”
“네.”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럼 나,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애초부터 저주에 걸려 있었다는 건가?’
저주에 걸려 있었기에 그런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편안해지기는 했다. 우울감이야 저주만을 탓할 수 없었지만, 그 외의 이해 불가능했던 심각한 사태들은 어쩌면 저주 탓일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저주가 아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우울하겠지만.’
그레이스는 또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가, 아리아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이걸 저에게 말씀해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무언가를 제안하기 위함인 걸까? 어떤 제안일지, 그 제안에 따라 향후 그레이스가 하게 될 일이 정해질 터였다.
하지만 아리아가 꺼낸 건 제안이 아니었다.
“……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요.”
“……?”
‘이건 또 뭔 소리래.’
“혹시 신성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원작에서 등장도 한 번 한 적 없는 인물에게 신성력이 있다니…… 그레이스는 입을 떡 벌릴 뻔했다.
‘성녀는 사제들보다 압도적으로 신성력이 높아서 오염도에 민감한 만큼, 신성력에도 민감해. 그러니까 이걸 착각하진 않을 텐데.’
그레이스는 아리아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신성력은 마력과 비슷하게 후천적으로 발현하는 기운이 아니었다.
‘단순히 신성력이 있다는 것과 성녀의 자질은 다르지.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도 성녀 앞에서는 나서지 못할 정도니까. 그런데 성녀와 비슷하다니?’
린덴 자작령은 신전도 그만큼 작아 거의 장식 수준이었기에, 정식으로 사제를 만나고 싶으면 마차를 타고 큰 영지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성장하면서 옆 영지의 신전을 들렀던 적이 종종 있었지만, 신성력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다.
또한 성녀가 이미 존재하는 현재, 다른 성녀가 나타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내가 빙의해서 그런가?’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그녀가 빙의함으로써 나타난 차이점.
“…….”
‘하지만 만약, 나에게 그 차이점으로 인해 신성력이 생긴 게 맞는다면 그때 그 까만 조약돌이 저주의 매개체였다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이미 그걸 없애고 나서 정원에 있는 모든 조약돌을 갈아엎었는데도 비슷한 상황이란 건 별관 전체가 위험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별관이 꺼려진 이유가 저주의 매개체가 별관 이곳저곳에 있어서라면, 말이 되기도 하네.’
그걸 알아낼 방법을 모르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레이스는 한숨을 내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은 힘을 쓰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안다고 하니, 물어볼 수도 없겠네.’
그레이스는 제 앞에서 눈치 보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역시.’
아리아는 원작에 나오는 묘사 그대로였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
그레이스는 어쩌면 수상쩍게 보일 수도 있음에도 조언해 준 아리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성녀님, 황태자 전하와 많이 가까우신가요?”
“네?! 아, 네! 많이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친구라…….’
그레이스는 아리아를 도와주기 위하여 약간의 힌트를 주기로 했다.
“저는 예전부터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어, 공작 각하를 알아갈 때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었답니다.”
물론 약간의 거짓이 섞이긴 했다만, 아리아가 알 턱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말에 담긴 의미가 중요했다.
‘아리아가 알아낼지 모르겠지만.’
“더없이 소중한 친우를 사귀게 되어 심장이 이리 뛰는 줄 알았지요.”
“…….”
“아, 이건 각하에게는 비밀이에요. 여자들끼리의 대화니까요.”
성녀, 아리아의 능력은 행복을 느낄수록 극대화된다. 하지만 원작이 전개되고 실베스터와 교감을 하면서 드러나는 진실이 있었다.
사랑.
진부하지만, 너무나도 명확한 이야기.
사랑을 하면 성녀의 능력은 더 강해졌다.
‘행복보다 사랑이 더 강한 감정인가?’
그레이스는 그것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그레이스 또한 벤자민을 짝사랑하고 있지만 마음이 편안하거나 행복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소원’에서는 행복 위에 사랑을 두었다.
그레이스는 소설의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아리아는 그레이스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밀이라는 것은 이해한 듯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네!”
“그리고, 음…… 나중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레이스의 예의상 인사말에 아리아가 매우 밝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저도요. 부인을 계속 뵙고 싶었는데, 계속 타이밍이 안 맞았거든요. 그래서 황태자 전하한테 부탁하려던 참이었어요.”
‘어떻게 부탁하려고?’
그레이스는 이 질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실베스터는 벤자민 옆에 서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삐딱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벤자민을 보고, 아리아와 따로 떨어지기 위해 마련했던 변명을 떠올린 그레이스는 합류하기 전 서둘러 물었다.
“참! 호, 혹시 펠튼 기사단과 함께 있던 이들을 보았나요? 여성들과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을 텐데.”
“아, 알아요. 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요.”
아리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밭으로 이동한다기에 도와드렸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이동하는 길에 좋은 일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고자 차밭에 약소하나마 축복을 내렸어요.”
“…….”
그레이스는 어째 자신이 노린 것보다도 거대해진 스케일에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지나가는 길에 내린 축복이 아니라, 아예 들러서 내린 축복이라.’
신성력의 질이 다르다는 의미다.
그레이스는 내년부터 나올 찻잎의 질이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점을 치지 않아도 예견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레이스는 내년보다도 지금 당장 닥친 문제가 중요했다.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것들.
가령, 원작에서 펠튼 공작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낸 ‘원인 불명의 병’은 실베스터와 비슷한 저주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약.’
그레이스의 이 모든 증상이 저주 때문이었다면, 대체 처방해 주는 자는 왜 그레이스에게 계속 그 약을 먹인 것일까?
그리고 벤자민은 그 약이 정말 효과가 있다고 믿은 걸까?
‘머리 아프네.’
첩첩산중이다. 그레이스는 머리를 짚었다.
⋆★⋆
“조심하십시오, 부인. 마차 턱이 높습니다.”
“고마워요.”
그레이스는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벤자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원정을 끝마친 뒤, 전에 얘기했던 대로 펠튼 공작가 일행은 원정대에서 빠져나와 린덴 자작령으로 향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다시 마차로 갈아타면 됩니다. 제도 쪽에서 출발한 일행이 린덴 자작령에 먼저 도착했을 테니, 마중 나온 이가 있을 겁니다.”
“오래 걸릴까요?”
“게이트만큼은 아니겠지만, 금방입니다.”
린덴 자작령은 상당히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벤자민은 그것이 신경 쓰였는지, 그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각하. 전 괜찮으니까요. 그보다 기차를 타야 한다면서요? 그럼 얼른 가야죠. 언제 출발하나요?”
“아, 시간 맞춰 가야 합니다. 얼른 가시지요.”
그레이스의 말에 퍼뜩 정신 차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많은 걸음 소리가 기차역 내부에 울리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
“뭐야? 어디 기사단인가?”
“세상에, 저건 펠튼 공작가 아냐?”
“진짜? 무슨 일로?”
“그, 서부 오염…….”
많은 이들이 서부 오염 사태니, 펠튼 공작가니 하며 쑥덕거렸다. 그레이스는 기사단 사이에 숨겨진 듯 쏙 박혀 숨죽이고 있었다.
이걸 무섭다고 해야 할지, 창피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얼굴을 내밀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