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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9)화 (69/131)
  • 69화

    원작의 벤자민은 아리아와 실베스터의 달밤의 밀회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떠났다. 그 묘하게 씁쓸하면서 외로운 묘사는 장장 한 페이지에 걸쳐 묘사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남긴 딱 한 마디를 그레이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부럽군.”

    ‘이번에도 그런 감정일까?’

    한 페이지 내내 읽는 사람도 동화될 만큼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었기에, 신경 쓰였다.

    그레이스는 힐끗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리아와 실베스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벤자민의 시선은 그레이스가 아니라 아리아와 실베스터를 향하고 있었다.

    ‘음……?’

    다만, 그레이스는 뭔가 다른 기류를 느꼈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걸 보고 있는 느낌인데.’

    소설처럼, 묘하게 씁쓸하고 외로운 듯한 표정. 하지만 그것은 아리아와 실베스터를 향한 시선이면서도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그녀는 입을 달싹였다.

    ‘애초에 원작에서는 게이트 폭파 사건이 일어났고, 아리아에게 이에 대해 위로를 받으며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깊은 감정을 갖게 되지만 그 일도 없는 일이 되긴 했지.’

    그것 때문에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레이스는 끄덕이며, 벤자민의 옷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녀님께 인사드려도 될까요?”

    “……!”

    그레이스가 먼저 아리아에 대한 주제를 꺼내자 벤자민은 꽤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다지 부정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벅찬 얼굴이었다.

    이제까지 기다려 온 것을 드디어 마주한 사람. 그레이스는 오히려 그런 표정을 마주하니 숨이 턱 막혀 왔다.

    숨이 막힌 원인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지금 닥친 감정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럼 가지요.”

    “네.”

    그레이스는 망토에 달린 인식 저하 마도구인 펜던트를 떼 냈다. 둘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아리아와 실베스터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며 두 사람이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잠시 산책을 하던 중, 인기척이 느껴져서요.”

    물론 그레이스는 일부러 아리아를 마주치기 위해 원작 정보를 활용해 쫓아온 것이다.

    “……죄송해요. 혹시 방해가 되었을까요? 금방 지나갈게요.”

    하지만 그걸 굳이 정정해서 말해 줄 필요도 없었고, 이렇게 말하면 아리아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라고 하고 천천히 즐기다 가라고 하겠지.’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 때문에 불편해지는 걸 싫어하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지는 아리아의 반응은 그레이스의 예상과 상당히 달랐다.

    “아, 아뇨!!”

    “…….”

    “부디 있다 가세요!”

    더 적극적이었다.

    ‘이걸 좋게 생각해야 하나……?’

    아리아는 매우 적극적으로 둘, 아니 그레이스에게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눈을 반짝이며 상기된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적극적이고, 호의적일 이유가 있나 싶었다.

    원정대에 또래 여성이 그레이스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신전 내부에 더 많았다.

    아까 전까지의 애틋한 분위기는 어디 가고, 아리아는 그레이스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라는 오라를 내뿜었다.

    사교계에서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면 생각 하나 숨기지 못해 손해 볼 타입이었다.

    ‘바로 말을 못 하는 이유는 옆에 있는 실베스터와 벤자민 때문인가?’

    아리아는 그레이스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실베스터와 벤자민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이 비밀스러운 내용인 듯했다.

    ‘나랑 나눌 만한 비밀이 있던가…….’

    원정에 참여한 뒤로 아리아가 일방적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둘이 직접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넌지시 말했다.

    “각하, 성녀님께 궁금한 게 있어 그런데 따로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까요?”

    “……?”

    “후발대셨으니까요.”

    “아, 그러십시오.”

    그레이스가 차밭으로 간 고아원 사람들에 관해 물어볼 것이라 추측한 벤자민은 선뜻 끄덕였다.

    딱히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그레이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만큼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수도 있다.

    ‘아리아가 그들과 교류했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가능성은 높지.’

    애초에 고아원 일행은 원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후발대로 오기로 한 펠튼 기사단들이 그들을 호위해 데려오기로 했다.

    ‘공작저에 머무는 동안 고아원 아이들이 기사들과 꽤 친해진 거 같거든.’

    그레이스는 단순히 펠튼 기사단원들이 아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원정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이 있으니 눈에 띄었을 거야. 아리아는 약자를 반드시 챙기는 타입이니까. 벤자민도 그걸 잘 알고.’

    실제로 그 이야기가 목표는 아니었지만, 좋은 핑계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멀리 가진 마십시오.”

    “네, 저쪽에 가서 말할게요.”

    그레이스는 근처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며 아리아와 이동했다.

    “……음.”

    조금 멀어지자, 실베스터와 벤자민은 빤히 이쪽을 바라보다 두 사람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저쪽도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한데 들리지는 않네.’

    그렇다는 건 이쪽의 대화도 저기서는 잘 들리지 않을 거란 의미겠거니, 하며 그레이스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단 모른 척해 볼까.’

    대뜸 요즘 왜 지켜봤냐고 물어보면 경계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레이스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했다.

    “계속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직접 만나 뵙지 못하여 안타까웠어요. 한데, 마지막 밤에라도 만나 뵙게 되어 기쁘네요.”

    “……!”

    그레이스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하자, 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입이 간질간질한 듯했다.

    ‘왜 말을 안 하지? 하면 안 되는 건가?’

    혹시 내가 너무 설치나? 그레이스는 불안해졌다.

    자신이 오판을 내리는 것인가, 하고.

    “……혹, 제가 지금 성녀님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면 금방 떠나겠습니다.”

    “아, 아뇨!”

    아리아가 급하게 부정했다.

    입을 합, 다물더니 이를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양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왜 그러지?’

    소설 속 아리아는 소심한 성정이라고 묘사된 적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아리아의 표정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될 텐데…… 왜 나를 닮은 거 같지?’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이 아름다운 여성이, 왜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 같을까. 그레이스의 입 안이 바짝 말라 가는 듯했다.

    “친해지고 싶었어요!”

    “……네?”

    그러나, 아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부인과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 본 적 없었지만…… 그렇지만,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

    아리아는 이제야 속에 있었던 말을 내뱉은 듯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그레이스는 그녀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심히 당혹스러웠다.

    “그, 그리고 이것 때문에 뵙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사실, 더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네……?”

    “혹시 무언가에 주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나요?”

    “……?”

    이건 정말 이상한 질문이었다.

    ‘뭔 병원에서도 안 할 질문 같은…….’

    그레이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버버거렸다.

    “그, 수상하거나 나쁜 짓 하려는 게 아니고요!”

    “네.”

    아리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며, 눈을 굴렸다.

    “실비, 황태자 전하와 비슷해 보여서요.”

    “……!”

    보통 오염이나 질병의 근원은 성녀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주는 성녀의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아리아가 보기에, 저주에 걸린 실베스터는 검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재 아리아의 시점에서 그레이스 또한 검은 안개에 싸여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게 나랑 친해지고 싶은 이유가 되지는 않을 텐데.’

    친해지고 싶다기보다는,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게 맞았다.

    ‘……잠깐.’

    아리아는 그레이스와 실베스터가 비슷해 보인다고 했지, 똑같다고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의미였다.

    “비슷해 보인다는 건 무슨 의미죠?”

    “론델 운하에 도착했을 때, 오염이 느껴졌어요. 그건 보이지 않아도 심각하면 느껴지니까 바로 신성력을 풀었고요.”

    그레이스는 그날 본 황금빛 알갱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저는 멀리 계신 부인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안개가 흩어지는 게 보였어요.”

    “……네?”

    이건 그레이스가 알고 있는 설정과 달랐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저주의 경우에는 특히나…….’

    여기까지 생각한 그레이스는 이 소설의 설정을 떠올리고 의문이 들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접촉이 불가피하다고 했지만, 애초에 사람의 몸에 직접적으로 저주가 걸린 경우는 실베스터뿐 아니었나?’

    저주를 푸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럴 경우엔 저주를 건 물건을 찾아 없애야 했다.

    애초에 이건 마법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레이스는 별관에 있던 검은 조약돌이 저주의 매개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단순히 부수는 게 아니라 마법사를 불러서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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