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8)화 (68/131)

68화

⋆★⋆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고, 해결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투성이인데 뒤쪽에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

기분 탓인가? 싶다가도, 몇 번 반복되니까 이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대체…… 왜?’

아니, 진짜 왜?

‘왜 자꾸 아리아가 날 보고 있는 거지?’

아리아는 기회만 있으면 멀리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거 같은데, 동선이 겹치거나 시간적 여유가 되면 아리아는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건가?’

하지만 매번 말은 걸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레이스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빙의한 지 꽤 시간이 지난 그레이스는 이쯤 되면 그런 전개인가 싶어졌다.

‘빙의하고 나서 알고 보니까 원작의 여주인공 성격이 나쁘다, 뭐 이런 전개야?’

그래서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주목받으니까 짜증 나서 견딜 수 없을 것 같고, 그런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건 그레이스 내면에 있는 못된 면모가 바라는 아리아의 모습이다. 아리아는 상냥한 사람이 맞다.

‘소설 속에서는 아리아의 내면도 다뤘으니까, 그건 절대 부정할 수 없거든.’

외모가 안 되니 성격이라도 깎아내리려고 한 걸까, 추접하다고 생각하며 자조하던 그녀는 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안 되겠다.’

계속 저렇게 자신을 쫓아다니니 그레이스는 아예 대면할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가급적 비공식적으로.

⋆★⋆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아리아를 만나려고 하는 거지…….’

그레이스는 인식 저하 마도구가 달린 망토를 걸치며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자신과 달리 매우 아름다운 그녀를 마주해 봤자 이제야 꽤 고요해진 마음이 다시 물결칠 뿐이었다.

벤자민과 아리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던 날 충동적으로 이혼하자고 했고, 이후로도 아리아를 볼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리아의 탓이 아니긴 하지만.’

기분이 영 껄끄러웠다.

그레이스가 아리아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면 ‘신전이 그다지 선한 집단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소설에서 하도 아리아가 평화롭고 행복해서,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아리아…… 친구가 없지 않나?’

그레이스가 내용을 잘못 떠올린 게 아니라면, 아리아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다. 있더라도 세력이 큰 사람은 없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더라도 아리아 개인의 힘은 딱히 없었다.

그나마 힘이 되어 줄 이는 실베스터나 벤자민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비약이 심한가?’

그레이스는 다소 불안해졌다. 제 코가 석 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옆에 어린아이가 꽃밭인 줄 알았더니 불꽃밭에서 노닐고 있는 것 같으니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나?’

그레이스는 혹시 몰라 챙겼던 인식 저하 마도구를 매단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오늘은 아르델 백작령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리고 아리아를 만날 수 있는 날이고.’

그레이스가 아리아를 비공식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주해 봤자 그레이스만 물어뜯기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리아는 다른 곳에서 뜯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아리아를 향한 부정적인 소식은 그녀의 귀에 단 하나도 닿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쉬쉬하고 말 것이라는 게 그레이스의 평가였다.

성녀의 능력은 성녀의 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었기에, 아리아를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아리아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의 안전과 관련이 있으니 당연한 거지.’

원래 이렇게 몰래 처소를 떠나는 건 안 될 말이었지만, 그레이스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천막 뒤편을 들춰 밖으로 나서면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경계가 허술할 줄 알았지.’

마지막 날은 오염의 근원을 말끔하게 지워 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다만 이건 원작에서의 이야기였고, 이번에는 자르테 공작에게서 온 지원 물자 덕에 파티의 규모가 커졌다.

‘그러고 보니 옆 영지에 보낸 기사도 잘 돌아왔지.’

옆 영지 영주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들 또한 오염지 때문에 대처가 늦었다는 사과가 담긴…… 뒷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습을 급히 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건 아마 아르델 백작령의 오염에 관해 보고하지 않고 무시한 후폭풍을 피하고 싶었던 거려나.’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뒤늦게서야 많은 인원을 대동해 아르델 백작령의 낙후된 건축물을 보완해 주었으니까.

‘일단 이건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아니고.’

여하간, 다들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상황을 잘 해결했기에 웃고 떠들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음울한 낯을 갖고 있던 이들도 밝은 모습으로 어울리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이 시간을 나누어 순찰을 돌아다녔지만 이날 밤은 모두들 들떴고 그 덕에 보완이 느슨해졌다.

‘아니, 보통 이럴 때 더 보완이 철저해져야지 정상 아냐?’

절도 무고 사건도 있었기에 원작과 달리 보초가 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허무하리만치 무사히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며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날 밤, 아리아와 실베스터는 파티에서 빠져나가 단둘이 숲에 들어간다. 거기서 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감정적으로 더 깊게 교류한다.

‘이미 한번 숲속을 들어가 봐서 길을 알지.’

낮과 밤의 숲은 분위기가 다른 법이다. 그레이스는 그 특수성 때문에 이미 밤의 숲도 다른 핑계로 들러 본 참이었다.

그때는 야광 리본을 길잡이 삼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인적이 드문 숲은 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아리아와 실베스터는 강이 이어진 호수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어.’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 죽은 땅인데 호수가 있을 수 있나?’

물론 다 말라 가서 약한 물줄기만 겨우 이어져 있는, 밑바닥이 다 보이는…… 호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상태였다.

‘하지만 물이 흐른다는 건 완전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잖아.’

땅의 죽음에는 단계가 있다. 오염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면 수맥이 메말라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그레이스는 이 모순을 발견하고 눈을 찌푸렸다.

‘그렇다는 건 지금 단계의 아리아도 얼마든지 정화가 가능하단 거 아니야?’

성녀가 무엇이든 정화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의 아리아는 아니었다. 신전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원작을 아는 그레이스는 신전보다도 잘 알았다.

“흠…….”

하지만 정화가 가능하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성녀의 힘은 신전의 위상인데, 성녀의 힘을 아껴서 어디에 쓰겠나.

‘해결된 건 없는데 문제만 우르르 튀어나오네…….’

골이 아팠다. 신경 쓰이는 것을 하나 없애러 찾아가는 길에 다른 신경 쓰이는 게 튀어나왔다. 그레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숲 안으로 들어가 귀를 기울이니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

죽음뿐인 숲속에서 유일한 생명이 흐르는 소리를 쫓아가면, 달빛이 비추어진다.

“…….”

그레이스는 달빛 아래 서 있는 남녀 한 쌍을 바라보았다.

‘와…….’

순간, 저래서 남녀 주인공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너무 아름답다.’

예술가가 이 풍경을 보았으면 영감을 얻어 평생의 걸작을 만들어 내었을 만큼, 완벽했다.

아니, 완벽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서로를 향한 갈망이 눈에 한가득 담기다 못해 뚝뚝 흐르면서도 입 밖으로 한마디도 뱉지 못해 표정이 더욱 애틋했다.

그러면서도 손끝을 약하게 옭아맨 채 서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서로 좋아하는데.’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오해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관계. 그것이 현재 아리아와 실베스터였다.

그레이스는 이렇게 다른 사람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릿하고 애틋한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싶으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저 둘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대했다면, 벤자민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아리아와 실베스터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아리아가 이 영지의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을 돕고 싶다는 이야기.

실베스터가 돕겠다며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다는 사실상 고백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다음.

그레이스가 다음 장면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딜 가셨나 했더니, 이런 위험한 곳에 계셨습니까?”

벤자민의 목소리였다.

“……!”

‘어떻게 온 거지?!’

그레이스는 분명 벤자민이 여기 오지 못하게 수를 써 뒀다. 애초에 그레이스의 처소에 인원수가 적을 수 있었던 이유는 로젤리아에게 미리 언질을 두었던 덕이다.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잠을 잘 테니, 시끄럽지 않게 처소의 경비 인원을 최소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남는 인력은 벤자민에게 붙여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벤자민이 혼자 있으면 정치적인 목적으로 접근할 이가 많을 테니 말이다.

‘분명 벤자민은 지금쯤 펠튼 기사단이랑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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