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7)화 (67/131)

67화

‘뭐야?’

사람들 너머로 딱 봐도 여주인공이 서 있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은 아우라가 있다더니, 아리아의 주변은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가 보였다.

아리아는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휘둥그레지곤 자리를 다급하게 떠났다.

‘뭐, 뭐야?’

정말로 찝찝해졌다.

“부인, 일이 잘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부인께서 믿어 달라 하셔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멋지게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벤자민이 방긋 웃으며 그레이스의 옆에 나란히 섰다. 보석함은 신전 기사에게 돌려준 듯했다.

보석함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신전 기사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께 무례를 범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

누군가에게 이리 사죄받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사죄의 말로 다 갚을 수 없는 무례임을 압니다. 이는…….”

“괜찮네.”

그레이스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그대는 신전의 명예를 지키는 기사가 아닌가. 지키고자 검을 들었을 뿐이야.”

“…….”

“그저 다음번에는, 검을 들 용기뿐 아니라 검의 방향을 정할 지혜도 갖추길 바라네.”

처음에는 무섭고 억울했다. 하지만 사과를 받고 나니 이전까지의 감정은 전부 사라져 버려 신기했다.

자신이 너무 무른가 싶다가도, 고작 이런 걸로 크게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기도 하고.’

그레이스는 모여 있는 사람을 둘러보다, 난처한 얼굴로 벤자민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을 물러야겠군요.”

“네…….”

귀부인의 처소에 뭐 이리 몰려든 것인지, 물론 그 덕에 범인을 잡기는 했다만 보통이라면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만큼 신전의 위상이 대단하단 의미겠지…….’

성녀의 존재가 대단한 만큼, 신전은 날로 거대해졌다. 그런 신전의 사제가 절도죄로 잡히다니, 큰 소란이 이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이건 좀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쯤, 보리스가 나타났다.

“무슨 소란이 일어났는지 들었습니다, 공작 부인.”

“베네디크 사제님.”

보리스는 창백하게 떨며 로젤리아에 의해 무릎 꿇고 있는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

벤자민 못지않게 늘 다정한 모습으로 소설 속 지분을 차지하던 그였건만, 그 사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찰나지만 무척 싸늘했다.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셨을지, 감히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사제를 잘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이 맞습니다.”

보리스는 머리를 가벼이 숙이며 그레이스에게 사과하곤 신전 내부의 회의를 통해 해당 사제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

‘미묘하네, 이거.’

이렇게 선뜻 고위 사제가 잘못을 인정하고 내부에서 벌을 줄 것이라 하니,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벤자민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보이고.’

옆에 서 있는 벤자민을 보니, 입을 다물고 평소처럼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보상과 내부 처벌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쪽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제국의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

신전은 생각보다 힘이 강대했다. 태양을 집어삼키는 나무라고 불리는 펠튼 공작가라고 하더라도, 감히 신을 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황제는 별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원작에서도 거의 펠튼 공작 부인만큼 비중이 없었다. 그래, 거의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옳았다.

‘아니, 그래도 펠튼 공작 부인보다는 비중이 있었겠지.’

아무튼 여기서 따지고 들어가면 그림이 보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신전에 펠튼 공작가가 항의하면 본인의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사제가 그레이스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고 해 봤자 이슈거리가 되어 ‘왜 그랬을까?’ 하는 또 다른 궁금증을 주며 현재 있는 펠튼 공작 부인을 향한 비호감을 발판으로 ‘그럴 만하지 않았을까?’ 하고 다른 소문으로 와전될 게 뻔했다.

‘완전 지는 승부지 이건.’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스에게 고개를 들라 했다.

“배려해 주어 고마워요. 그럼 후에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어보아도 괜찮을까요?”

“…….”

신전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편들어 주며 약한 처벌로 끝내지 말고, 규율에 맞게 잘 끝내라는 의미였다.

“네, 당연하지요.”

보리스는 초연하게 웃으며 범인을 구속한 신전 기사와 함께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고 했다.

“잠시 기다려 주겠나?”

벤자민이 웃는 낯으로 보리스를 불러세웠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말이네.”

모두의 시선이 벤자민을 향했음에도 그는 초연하기 짝이 없었다.

“예, 말씀하시지요.”

“신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매번 그 감사함을 표하지만 부족한 것 같아 고마운 만큼 미안하기도 하고.”

“…….”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모두의 시야에서 가리듯 앞에 섰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신전 측에서 기부금 관련으로 논의할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조만간 찾아가도록 하지.”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벤자민의 경고를 못 알아듣는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보리스는 미소로 답했다.

“……예, 그럼 근시일 내에 연락드리도록 하지요.”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군.”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가 신전기사들과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인파가 흩어지며 그제야 조용해졌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큰일을 겪은 부인의 곁에 있어 드리고 싶지만 실은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를 걱정하는 듯, 벤자민이 말했다.

“……아.”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가겠다고 했을 때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녀의 기색을 알아챈 그는 걸음을 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아니, 그, 그게…….”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왜 잡았을까, 그레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고마워요.”

“…….”

“저를 믿어 주어서.”

목이 조금 메었다.

방금 그 자리에서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게 고마웠다. 이 말을 하려고 붙잡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벤자민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말했다.

“당연한 겁니다. 가족이잖습니까.”

“…….”

그럼 가족이 아니면 믿지 않게 될까요? 이걸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나는 애초에 진짜 그레이스, 펠튼 공작 부인도 아닌데.’

그걸 알면 당신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까? 저 다정한 눈이 금방 싸늘하게 식어 버릴까.

애초에 왜 저렇게 다정하게 바라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눈이 내가 그레이스라서가 아니길 바란다면 이기적인 거겠지.’

이상한 마음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레이스의 몸에 들어와서 벤자민을 향해 호감을 넘어 사랑을 품게 된 것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

마음이 무겁고, 공기도 따라 무거워졌다.

그레이스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으, 아까 성녀님께서 저를 바라보던 것 같던데…… 우연일까요?”

“성녀께서요?”

벤자민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레이스를 보다가 뭔가 짐작한 듯했다.

“제가 부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서 알아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론델 운하에서 부인을 보기도 했을 테니까요.”

‘론델 운하에서는 못 봤을 텐데.’

그레이스는 론델 운하에 갔을 당시에 보닛을 푹 눌러 썼었다. 게다가 꽤 멀리 떨어져 있던 거리였고 정식으로 인사받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내 복장이 검소하긴 해도 품질은 좋으니 귀부인인 건 알았을지도 모르겠어.’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제 부인에 대해 말할 때, 절대 외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레이스가 잘 알고 있었다.

‘원작이 그랬어, 원작이.’

원작에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에 그레이스는 한번 물어보았다.

“저의 외관에 대해 설명드렸었나요?”

“……! 그건…… 말한 적 없군요.”

“그렇군요.”

역시나 원작대로 말했다.

‘입 안이 쓰다.’

‘그렇다면 그저 소란 때문에 바라본 건가?’

그레이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일단 그건 급한 게 아니니, 벤자민을 밖으로 배웅했다. 일단 쉬고 싶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

광물 시연의 연출, 톰 버킨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그 이전에 린덴 자작령에 들를 텐데 린덴 자작가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을지, 조만간 작물 공방 파업 사건이 터질 텐데 잘 무마할 수 있을지…….

‘그리고 신전이 딱히 선한 건 아니야.’

사람이 모여 집단이 되면 당연히 모두가 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생각하기를,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섰다.

구호를 위해 험지로 달려온 공작 부인을 도둑으로 몰려고 하다니.

‘이거랑 비슷한 일이 원작에서도 있었거든 분명.’

아리아가 신전에 소속되어 잘 어울리지 못했을 적, 아리아의 물건이 도난당했었다.

도둑질한 사람은 어느 귀족가의 영애였고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아름다운 성녀를 시기하여 벌인 일이라고 결론짓고 끝냈다.

‘하지만 신전 측에서는 성녀의 자비라며, 해당 레이디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이 일을 회상한 이유는 단순히 이번 일과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소설은 전부…… 아리아 위주로 쓰여 있잖아.’

만약 정말로 그 범인도 억울했다면? 그 사실이 아리아의 귀에는 닿지 않은 거라면? 그레이스는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잠깐만.’

그러면…….

‘벤자민이 흑화한 이유가 아리아를 향한 집착적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뭐 때문에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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