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니야, 그건 좀 이상해. 자르테 공작의 원조가 아니더라도 만약 도둑이 있었다면, 충분히 다른 물건도 훔치고자 했을 텐데?’
갑작스레 쌓인 물건을 보고 없던 욕망이 부추겨졌나? 이것도 찜찜했다.
“현재 성녀께서는 어디에 있지?”
“성녀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함께 강 쪽을 보러 가셨습니다. 하여, 저희는 성녀님께서 이 사태를 아시기 전에 범인을 잡아 사태를 정리하는 게 목적입니다.”
아리아의 능력은 그녀의 감정과 깊이 연관 있었다.
그래서 아리아의 감정에 부정적인 동요가 일어나기 전에 처리하려고 하는 이들의 마음을 그레이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럼 내가 협조할 수 있는 일이 있겠나?”
“…….”
그레이스의 질문에 기사가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의 처소를 조사하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신전 기사 또한 이 행위가 얼마나 큰 무례인지 아는 듯했으나,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례합니다! 지금 마님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기사의 질문에 샐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레이스가 샐리에게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님을 의심하는 것은 공작가를 의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트린 경?”
그의 말을 들은 것인지 로젤리아는 영 불쾌한 얼굴로 신전 기사와 대치했다.
“저희 또한 마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몰라 여쭙는 것뿐입니다.”
“다른 천막, 이 영지 전체를 모두 조사한 것도 아니면서 마님의 처소를 조사하겠다는 말이 의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상하군요.”
“…….”
“바, 반트린 경, 나는 괜찮네. 정말로.”
분위기가 어째 험악해졌고 그레이스는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 탓 같아…….’
“후발대의 천막 위치가 내 처소와 근처이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겠지.”
“마님…….”
샐리는 제가 다 억울하다는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로젤리아가 신전 기사를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만약 마님의 처소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그때는 마님께 사죄드리도록.”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사는 그레이스를 향해 묵례했다. 샐리는 영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천막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 뒤를 그레이스와 로젤리아가 따랐다.
‘도둑이라, 원작에는 없었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미안하네.’
아리아는 워낙 심성이 고우니 선물받은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걸 알게 되면 자르테 공작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뭔가 단서 같은 거라도 얻을 수 없으려나?’
그레이스가 끄응, 앓으며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중 앞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음?”
“네?”
그레이스와 샐리 둘 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보석 목걸이였다.
“이 목걸이입니다!”
“확실히 저 목걸이는 마님의 것이 아니기는 한데…….”
‘아니 저게 왜 여기에서 나오는데?’
어째 불안한 기분이 든 그레이스가 뒤를 돌아보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헉.”
모든 이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쏠려 있었다.
“공작 부인, 이 목걸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 나는 모르는 일이네. 나는 샐리와 함께 식량을 나누어 주러 돌아다녔어…….”
분명 솔직히 말하고 있는데도 거짓을 고하는 아이처럼 말끝이 흐려졌다.
“맞아요! 마님께서는 종일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전에도 성녀님의 물건을 훔치려고 한 영애가 있었습니다. 그 영애 또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곧 범인임이 들통 났죠.”
‘알고 있어, 그것도 원작에서 나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짜 아닌데.
그레이스는 억울했다.
자신이 아무리 변명해도 펠튼 공작가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레이스가 먼저 도착해 선의를 베풀었다고 해도, 아리아와 그레이스 중 인망이 더 높은 이는 당연히 아리아였다.
‘만약 펠튼 공작가에서 가문의 힘으로 무마한다고 해도 사람의 입을 타고 퍼지는 소문을 전부 막을 수는 없어.’
그러므로 최대한 빨리 억울함을 밝혀야 했지만, 그레이스는 그 방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고 벌벌 떨려왔다.
‘역시 괜히 왔나 봐.’
머릿속 소리들이 말할 때 들을 걸 그랬다. 그런 후회가 들 때, 벤자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인?”
“……!”
“펠튼 공작님을 뵙습니다. 다름 아니라, 사라진 성녀님의 물품이 공작 부인의 처소에서…….”
“경.”
신전 기사의 설명을 썩둑 자른 벤자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지금 경에게 물은 게 아니고 부인에게 물었네. 대화에 끼어들지 말게나.”
“…….”
“부인,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제 거처에서 자르테 공작이 성녀에게 준 선물이 발견되었어요.”
“혹시 짐을 옮기다가 잘못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 건…… 몇 개만 남겨 두고 물자로 운용하기로 했으니까 품목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거든요.”
겨우겨우 목에 힘을 주어 소리 냈다. 그레이스는 한 글자 한 글자 뱉으면서도 숨이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믿어 줄까?’
보통 때라면 거처를 지키는 기사가 빼곡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갑작스레 추가된 물자 때문에 이를 배분하기 위한 일손이 부족했다.
어차피 위험 세력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레이스 또한 밖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공작가의 기사들을 일손이 모자란 쪽으로 보내고 거처를 지키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했기 때문이다.
“전에도 성녀님을 시기한 영애가 성녀님이 하사받은 장신구를 훔쳤다지?”
“맞아, 얼마 전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어, 어쩌지.’
그녀의 의지가 푹 하고 꺾여 들어갔다.
“부인.”
“…….”
“부인, 제가 부인의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벤자민의 그림자가 그레이스에게 드리워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시야에 담겼다.
그레이스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벤자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숙여 눈을 마주치려 했다.
“부인, 말씀해 주십시오. 부인은 안 하셨지요?”
“……네, 저는 안 했어요.”
‘따뜻해.’
맞잡은 손을 보자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나를 믿어 줬어.’
하지만 믿어 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간 생겼을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기울어져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 벤자민을, 그리고 목걸이 상자를 들고 있는 기사의 손과 구호물자들을 정리해 쌓아 놓은 곳을 바라보았다.
“…….”
그다음 모여 있는 이들을 훑어본 그레이스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안 했어요.”
“네, 믿습니다.”
“증명할 수 있어요!”
그레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들어간 손의 힘만큼이나, 그레이스의 목소리도 강직해졌다. 벤자민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절 믿어 주실 수 있나요?”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이 끄덕였다.
“늘 그렇듯이요.”
그레이스의 외침에 주위가 동요했다.
‘목적은 모르겠지만, 범인은 내부에 있어.’
범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레이스의 처소에 목걸이를 숨겨 놓았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레이스의 처소는 이번에만 경비가 허술했던 거지, 평소에는 그녀의 지위에 걸맞게 기사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만약에 틈이 있었다면 경비 교대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일전에 교대 시간에 맞춰 기사들에게 간식을 챙겨 준 적 있었기에, 그레이스는 오후 교대 시간을 알고 있었다.
‘아직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리 평소보다 경비가 허술하다고 해도 지키는 자들이 있으니 흔적 같은 걸 완벽하게 갈무리하지 못했을 테고.’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혼자 자리에 없다면 의심을 사기 쉬우니 범인은 분명 이 부근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외부인의 소행이라면 골치 아프겠지만.’
이건 ‘혹시’ 하는 가능성에 기대해 거는 도박이었다. 그레이스는 불편한 마음을 꾹 누르며, 신전 기사에게 물었다.
“경, 그 물품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알려 줄 수 있나?”
“이곳에 있었습니다.”
신전 기사가 가리킨 방향은 딱히 놀랍지 않은 장소였다. 그레이스의 짐을 쌓아 둔 곳으로, 한눈에 발견하기 좋은 위치였다.
‘내부 소행일 가능성이 높을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보라고 전시해 둔 수준의 위치 선정이었다. 피해망상이 쌓인 게 아닐까 싶었지만 보통 쎄한 감각은 믿어서 손해 보지 않는다.
“…….”
그레이스는 고개를 쓱 돌려, 구경꾼이 몰려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엄청 많이 모였구나.’
그레이스는 힐끗, 로젤리아에게 눈짓했다. 로젤리아는 그레이스가 보낸 무언의 신호를 알아채고 구경꾼들이 서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