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3)화 (63/131)
  • 63화

    그나마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

    이 경우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지나갈 수도 없어 더욱 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고민해 봤자 해결될 건 없지.’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레이스는 물자 보급을 위해 다시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사람들이 힐끗 그레이스의 모습을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종종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무슨 말 하는지 신경 쓰인다.’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게 다 그 소리 때문이야.’

    그런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은데 조금만 방심하면 들리니 점점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도 계급 사회라 그레이스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레이스가 멀리 서 있는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영지 사람들이 벤자민을 붙잡고 연신 감사를 표하는 듯했다.

    벤자민이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다가 고개를 돌렸다.

    “……!”

    방심하던 차에 눈이 마주쳐 버려 그레이스가 빠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까?!’

    아내가 남편을 좀 볼 수도 있었지만, 어째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또 쿵쾅거렸지만 이건 설렘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그레이스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샐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아를 대동한 선발대가 아르델 백작령에 도착했다.

    “이것은 자르테 공작께서 보내온 구호물자입니다.”

    “자르테 공작께서요?!”

    원작에서는 나온 적도 없는 지원 물품 또한.

    그레이스가 자르테 공작의 지원 물품이 원작과 다른 행보라는 것을 아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너, 너무 많아…….’

    원작에서는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로 인해 구호물자가 워낙 부족했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 아리아가 근처 영지에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니냐 물어보며 물자를 구비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중 한 군데가 지켈 남작령이었고.’

    제일 근처에 있는 곳이 지켈 남작령이었는데, 그곳은 매우 많은 물자를 보내 주었다.

    그레이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거였다.

    ‘이번에는 아직 물자를 요청하지 않았는데.’

    아리아가 막 도착한 시점이었으니 따로 물자를 요청할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물자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아리아가 신전의 얼굴 격이고,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후발대로 합류한다는 소식을 선발대를 통해 알았을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주민들의 요청을 전부 무시해 오던 이들이 원작과 달리 갑작스레 이리 많은 물자를 보내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성녀 아리아가 직접 이름을 팔아야 물자를 보낼 줄 알았는데.’

    이상하고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정도면 오는 길에 본 다른 피해 지역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품목을 확인하고 나누도록 하죠.”

    물품은 어찌나 많은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이 중 일부가 지켈 남작령에서 온 거야.’

    상자에 찍혀 있는 직인, 지워진 흔적이 있지만 영주의 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펠튼 공작 부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은 의외로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지.’

    각 귀족의 계보라거나 관계라거나 그런 것들. 사교계에서 활동하지도 않았으면서 관련 지식이나 정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걸 보면 그녀가 똑똑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상자에 있던 흔적을 보면 지켈 남작령에서 온 물건도 맞는다는 거지.’

    자르테 공작이 굳이 지켈 남작령에 들러 상자만 빌릴 필요는 없다.

    “각하, 혹시 지켈 남작령의 물자도 함께 왔나요?!”

    “보고서를 확인해 보니 그렇습니다.”

    “…….”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미심쩍어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지켈 남작령으로 보낸 기사는 어디로 갔나 해서요. 물자를 보내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 또한 복잡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 기사라면 자르테 공작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요?!”

    “예, 지켈 남작령에 있던 자르테 공작이 후원 요청 소식을 듣고 남작령에서 물자 다수를 구매해 후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자를 후원받는 대신, 자르테 공작의 호위를 돕기로 했다고 합니다.”

    벤자민의 손에는 또 다른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그레이스가 보낸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 보낸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제복을 입은 기사가 몇 명 보이네.’

    멀리 있기에 인장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자르테 공작가에 소속된 기사들로 보였다.

    자르테 공작은 물자와 더불어 자신의 기사 몇을 보내었고 펠튼 기사단은 그에 대해 예우를 표했다.

    ‘여기에 기사를 보낸 만큼 호위에 구멍이 생겼을 테니, 어쩔 수 없지.’

    “보고에 따르면 자르테 공작 측 일행은 급히 남작령을 떠나야 했다고 하는군요. 따로 허가받을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처벌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사가 따로 허가 없이 독단으로 행했지만, 그 덕에 이만한 지원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원작과 다른 전개네.’

    원작에서는 자르테 공작이 서부 오염 사태에 등장한 적 없었다.

    비록 그레이스가 기사를 지켈 남작령에 보냈다고 하더라도, 소설에서는 무려 아리아가 전령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내가 더 빨리 도착해서 자르테 공작이 지켈 남작령을 떠나기 전에 소식을 전해서 그런 건가?’

    그레이스는 원작 전개보다 빠르게 아르델 백작령에 도착했다. 그 탓에 원작에서는 분량이 총 20페이지도 되지 않을 만큼 적은 자르테 공작과 접점이 생긴 것 같았다.

    ‘이건 긍정적으로 봐도 되는 걸지.’

    자르테 공작은 꽤 대단한 입지를 가진 자였으나, 그에 비해 소설에서는 분량이 적은 자였다.

    “아.”

    “왜 그러시나요?”

    그레이스가 외마디 소리를 내자 벤자민이 바로 그녀에게 주목했다. 그에 그레이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올라서요.”

    ‘어쩌면 물어볼 수도 있겠다.’

    자르테는 약제사 연합의 수장이니 톰 버킨을 통해 약을 조사하는 데 실패한다면 자르테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그자에게 선의로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으니 무언가 거래할 요소가 필요하다.

    ‘자르테 공작이 벤자민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르테 공작은 원작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갑작스레 접점이 생기는 건 경계할 만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그가 가진 능력은 현재 그레이스가 처한 상황에 도움이 되었기에, 그녀로서는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라고 받아들였다.

    ‘물론 그 전에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지금쯤이면 재판을 끝낸 지 꽤 지났을 톰 버킨을 떠올렸다.

    ‘톰 버킨과 최대한 빨리 다시 접선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레이스 대신 끈질기게 여러 가지를 조사해 줄 수 있는 손발이 필요했다.

    자신만을 위한 정보망이 필요하니 벤자민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펠튼 공작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위한다고 해도 우선순위는 벤자민의 명령일 테니까.’

    “각하, 이것은 자르테 공작 각하께서 펠튼 공작 부부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레이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고 있을 때, 짐꾼으로 보이는 자가 그레이스와 벤자민에게 다가왔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앞에 서며 말했다.

    “수고가 많군. 하지만 현 사태가 심각한 만큼, 자르테 공작이 준 선물도 기부하는 게 좋겠군.”

    “…….”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레이스가 생각에 빠져 있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벤자민이 물었다.

    그제야 정신 차린 그녀가 끄덕였다.

    “……네? 네, 저도 동의해요. 어차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짐이 늘어나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부인께서도 동의하셨으니, 전부 구호물자를 관리하고 있는 천막으로 운반해 줄 수 있겠나?”

    “하지만…….”

    짐꾼이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자, 다른 이가 이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

    그레이스는 새로이 모습을 보인 인물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

    ‘보리스 베네디크!’

    옆으로 길게 늘여 묶은 백금발에 푸르른 눈을 가진 그는 그야말로 천사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아리아가 왔으니, 이 남자도 왔겠지.’

    아리아가 성녀로서 공식 행사를 할 때면 보리스도 필수적으로 함께했다.

    처음 아리아가 제도로 올라왔을 때, 몇몇 사제들은 아리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보리스는 그녀를 보고 바로 성녀라고 인정하고 지지했다.

    보리스 또한 신전 내에서는 인망 높고 나이에 비해 지위도 높은 사제였다.

    아리아는 성녀이니 언제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당연했으나, 금방 자리 잡은 것에는 보리스의 도움이 컸다.

    ‘원작에서는 항상 친절한 이이기도 했고.’

    그레이스는 힐끗 보리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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