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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2)화 (62/131)
  • 62화

    “……예.”

    벤자민이 작게 말했다.

    그레이스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원석을 보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나 혼자 결심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

    그레이스는 고개를 획 들어 벤자민과 얼굴을 마주했다. 손에 들린 원석이 아니라 그레이스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괜히 찔려 움찔, 상체를 뒤로 물렸다.

    “각하, 제가 조금 미친 질문을 할 수 있어요.”

    “큼, 흠. 일단 말씀하십시오.”

    “이 광산을 매입할 수 있을까요?”

    “…….”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질문을 고민하는 듯했다.

    “나쁘지 않겠군요.”

    “……! 정말요?”

    “예. 이 원석이 나오건, 나오지 않건 광산을 매입한다는 것을 빌미로 오염 지대에 후원할 수 있을 겁니다. 폐광산 재개발하는 사업도 이곳저곳에서 진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원한 바를 차근차근 말했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다른 오염 지대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필요하겠지요. 아르델 백작령이 가장 피해가 심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다른 지역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죠.”

    벤자민의 말이 맞기에 그레이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여기로 오는 길도 군데군데 썩어 가고 있었어.’

    피해 지역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고아원 측 일행이 머물게 될 차밭이 있는 곳도 오염의 영향으로 수확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백작령에서 제법 떨어진 땅이라 오염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곳이야 이제 아리아가 올라오면서 축복을 내릴 테니 상관없지만.’

    “음, 다른 지역 후원이 어렵네요. 그곳은 이동하면서 길게 머무르지 않았으니까요.”

    애초에 피해 지역에 구휼 자금을 주는 건 황실에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가 고민에 빠진 듯하자, 벤자민도 같이 고민해 주었다.

    “가령 이건 어떨까요. 론델 운하와 이어지는 강을 낀 영지 중, 피해가 심한 곳의 주민들을 추려 이 광산 재개발의 일원으로 고용하는 겁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나요?”

    “일자리는 만들기 나름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숙련자가 생기면 제국 곳곳에 있는 폐광산을 재개발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광산 자체가 채굴할 가치가 있다면요?”

    “그럼 매우 좋은 일이죠.”

    벤자민이 산뜻하게 웃었다.

    “만약 없다면 먼저 진행하고, 이후 안건을 황실에 올리면 되겠습니다. 그 외 세부 안건은 저희가 진행하면 사실상 월권 아니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일을 진행시켜 사람들로부터 펠튼 공작가의 위상을 올리고 정작 번거로운 것들은 황실에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벤자민의 미소는 따스하고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내포한 내용은 그의 미소와 거리가 멀었다.

    ‘하긴 그 뒤처리를 우리가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럴 때 보면 벤자민은 호구라고 불릴 만큼 속이 좋은 남자는 아닌 듯했다.

    슬슬 목적이 달성되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벤자민이 앞장섰다.

    그의 걸음은 아주 느렸기에 키 차이가 있음에도 그레이스가 쉽게 옆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저는 종종 걱정이 됩니다.”

    “무엇이요?”

    “부인께서 심성이 너무 고우셔서 후에 그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요.”

    ‘내가?’

    그레이스는 본인이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우유부단에 가까웠다.

    어떤 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것이 ‘심성이 곱다.’라는 말로 포장되니 괜히 양심이 쿡, 하고 찔렸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말이죠. 각하께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아닌가? 이미 만나 봤을지도.

    ‘아리아 밀러.’

    그레이스는 저 말을 뱉자마자 바로 여주인공이 떠올라, 후회했다. 어디선가 또 그녀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괜히 섬찟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쩌면, 만난 적 있을지도요…….”

    그레이스는 괜히 자신감이 사라져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벤자민은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의 숲이라 길이 험하니, 돌아가는 길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레이스가 머뭇거리다가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면,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온화하기 짝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잡힌 손은 약간 빳빳했지만 이내 누그러들었다. 마치 긴장했던 이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듯했다.

    ‘착각일까?’

    만약 벤자민이 긴장했다면, 그 이유가 에스코트의 청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라면.

    그렇다면 좋겠다. 순간, 그레이스는 그러한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바보 같긴.’

    지금은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울감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가 다정히 대해 주면 괜히 심장이 설레발쳤고, 그 설레발 때문에 괴로워지는 자신이 있었다.

    손을 잡았다고 심장 박동이 전해지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레이스는 그리 안도했다.

    벤자민이 천천히 나아가며 말했다.

    “제가 사람을 엄청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각하께서는 많은 이를 만나시는 게 일이니까요.”

    “예, 그렇지만 정말로 많이 만났습니다. 부인께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요.”

    “제국민 모두를 만나 보았나요?”

    “아뇨. 하지만 그러길 원하신다면 노력해 보지요.”

    벤자민은 이 대화가 뭐가 재밌는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역시 제 부인은 부인뿐이라는 것을 말이죠.”

    벤자민의 고백과도 같은 말에 그레이스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분명 고요한 밤, 숲속이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울 수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미쳤나 봐.’

    자신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고작 이런 말에 낯이 뜨거워질 수 있는 거지? 자문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마음을 접고자 했을 때도 쉬이 접히지 않듯이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그 감정에서 시작된 질문의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의 손은 따듯했다.

    벤자민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차라리 그레이스가 그놈의 원작을 보지 않았더라면, 만약 자신이 펠튼 공작 부인의 몸을 차지해 감정과 기억을 이어받은 또 다른 그레이스가 아니었더라면.

    ‘만약 내가 아리아처럼 예뻤더라면.’

    그랬다면 이 심장 소리에 조금이나마 떳떳할 수 있었을까?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며 마음이 기울고, 혹시 벤자민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샘솟을 때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르는 목소리들이 부추겼듯이.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기에, 추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지 않는가.

    어둠 속, 등불에 비친 벤자민을 보면 한없이 아름다웠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사랑스러웠다.

    그레이스와는 달리.

    ⋆★⋆

    “사람을 추려 보내 보니, 그 광산에서 채굴된 것이 맞았습니다.”

    벤자민은 보고용으로 제출된 몇 개의 돌덩이를 내려다보다가 쿵, 하고 내리쳤다.

    경도가 약한 것인지 그 정도 충격만으로도 쉽게 금이 가 쩌적 하고 갈라져 안쪽 표면이 드러났다.

    “……!”

    그 안에는 어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보석이 숨어 있었다. 벤자민은 이미 보고를 받고 확인을 마친 뒤라, 그다지 놀라지 않으며 설명했다.

    “지금은 밝은 대낮이라 어제처럼 찬란한 색채를 보이지 않으나 빛의 양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레이스가 한번 표면 위에 손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니, 그의 말대로 보석이 띤 빛이 달라졌다.

    그것이 꽤 웃겨 키득거렸다.

    “양이 얼마큼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적절한 값을 매겨 주고 싶은데.”

    “이미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입하는 데에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그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주겠습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고민을 읽은 듯 퍽 듬직하게 말했다.

    ‘한시름 놨나?’

    그레이스가 아리아처럼 오염 지역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었다.

    “일단 가져가서 이것이 마석인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다음에 사용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요.”

    “사실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어요.”

    “벌써요?”

    벤자민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레이스를 보며, 그녀가 무엇을 생각해 두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일단 마석인지 확인하고 별다른 사용 방안이 나오지 않았을 때에나 꺼내겠지만요.”

    “……치사합니다. 궁금했는데요.”

    “어쩌면 공작님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잖아요?”

    “만약 똑같은 방법이라면, 부인의 입으로 듣고 싶은 겁니다.”

    벤자민은 살짝 불퉁해진 채 중얼거리다가 광물 원석을 구석으로 옮겼다. 후발대가 도착할 때까지 선발대가 하는 일이란 피해자들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게 돕는 것이었다.

    ‘그래도 파발을 보냈으니, 아리아가 도착하는 시간이 당겨질 거야.’

    그다음에는 옆 영지로 보낸 기사가 나쁘지 않은 소식을 들고 오면 된다.

    ‘어째 나쁜 소식을 들고 올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지만…….’

    소설을 보다 보면 그런 게 있지 않던가.

    좋은 예감이 들면 생각지 못한 나쁜 일이 벌어지고, 불길한 예감이 들면 딱 맞아떨어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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