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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0)화 (60/131)
  • 60화

    ‘음, 아냐, 사적으로 보복할지도 몰라. 후반부 전개를 생각하면.’

    저 사람이 늘 좋은 낯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레이스가 벤자민을 곁눈질로 바라보다가 말았다.

    “낮에 각하와 제가 둘 다 숲으로 이동하면 이목이 숲 쪽으로 쏠릴 거예요. 그리고 안전을 위해서라며 구휼 작업에 힘써야 하는 원정대의 일부가 함께하겠죠.”

    “음…….”

    “숲 쪽에 어떤 짐승도 없는 것은 이미 다른 이들이 확인했어요. 짐승의 흔적은 사냥꾼만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짐승은 인간보다 감이 좋기에, 살 수 없는 곳이거나 위험하다 판단되면 거처를 옮겼다.

    오염의 근간인 아르델 백작령 쪽에 짐승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레이스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 벤자민은 끄덕였다.

    “보고가 오면 확인해야 하는 것은 맞으니 말입니다. 성녀께서 오기 전에 다 정리해 두면 빨리 끝낼 수 있겠죠.”

    벤자민은 결국 납득했다는 듯 끄덕이며 그레이스와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설마 이 숲에서 갑자기 죽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아.’

    벤자민과 단둘이 어둑한 숲으로 들어간다니 조금 무서워졌지만, 이 세상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한 명이 벤자민이었다.

    이 원정대에 벤자민만큼 강한 사람은 없을 테니, 맥락 없이 벤자민의 흑화가 오늘로 당겨지지 않는 한 그레이스는 안전했다.

    숲 안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숲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보였다.

    “야광도료를 발랐군요.”

    벤자민은 등불로 숲의 길을 밝히며 그레이스를 에스코트했다.

    생각보다 강한 위력을 가진 야광도료를 보며,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전에 위력을 확인했을 때는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커튼을 친 정도는 그리 어둡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

    “고질적인 문제인, 잘 묻어나는 것만 해결하면 좋게 사용할 수 있겠군요. 기존 염료를 만드는 방식과는 사뭇 달라서…….”

    ‘게이트만 좋아하는 게 아닌가 보네.’

    벤자민은 야광도료에 대해 설명하며 리본을 빤히 바라보다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각하는 마도구 자체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

    벤자민은 그제야 자신이 마도구에 대해 쉼 없이 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도구는 제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신성력처럼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도, 편리함은 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시간을 단축시키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죠.”

    그는 앞에 장애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그레이스를 이끌었다.

    “그래서 펠튼 공작가는 대대로 마도구 개발을 지원하며, 황실과 협력하여 마도구를 저렴하고 균등한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 중에 있습니다.”

    “하긴 너무 비싸면 귀족만의 수단이 될 테니까요.”

    “예, 제국의 땅은 넓습니다. 귀족보다도 평민의 수가 훨씬 많지요.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보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탓에 황실에서 매해 열리는 대회의에는 늘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하지만요.”

    “음…….”

    세금이라, 그레이스는 아이젠 제국의 세금 구조를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소득에 대한 세금이 있었으나, 귀족에게는 그 외에도 다른 세금 체제가 더해져 지불해야 할 금액이 더욱 높았다.

    모든 귀족이 부유한 것은 아닌지라, 소득의 일정 비율을 지불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만을 가질 이들은 있었다.

    ‘가령 더 적게 내는 이들이 이 체제로 인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거나 그런 거.’

    “그렇군요. 그래서 마도구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려면, 품질이 균등하고 처음부터 문제가 없게끔 개발해야겠네요.”

    “네, 그래서 이미 세상에 나온 마도구들도 계속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가령 게이트라거나요.”

    “많이 고민하고 있네요.”

    “뭐, 그래도 저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사업가라는 말을 듣고는 하니까요.”

    “다른 분들이라고 하면요?”

    “신전이라거나 자르테 공작이 대표적이죠. 신전은 늘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자르테 공작을 필두로 한 약제사 연합은 제국 세금으로 대다수의 금액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는 ‘그런가?’ 싶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니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셋 다 비슷한 거 아닌가?’

    신전이 기부금으로 운영된다고 하지만 성녀는 늘 제국에서 태어난 만큼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의 본산인지라 매해 황실과 여러 부유한 귀족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았다.

    그리고 자르테 공작이 운영하고 있는 약제사 연합이 세금으로 운영되어 가격을 저렴하게 측정한다고 했지만, 이는 마도구 연합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었던 탓이다.

    현재 마도구들은 모두의 삶에 끼어 있었는데, 이는 세금으로 운영되어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내가 뭘 알겠냐만. 애초에 이 제국에서 약은 어느 정도의 가치인 거지?’

    신전에서도 병을 치유할 수 있지만 의사도 존재하고 약도 따로 존재한다.

    벤자민은 ‘사업가’ 소리를 듣는다고 했지만, 저건 필시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그는 늘 약한 세력의 편에 서 있는 이라는 묘사가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은, 벤자민이 잇속을 챙기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는 거잖아.’

    원래라면 다른 이들 사정은 고려치 않고 비싸게 판매할 수도 있던 것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임에도, 신전이나 약제사 연합과는 다른 식으로 운영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니.

    ‘펠튼 공작가의 힘은 막강하지만, 막강한 힘에 비해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미지가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자르테 공작 또한 조연으로서 몇 번 소설에 모습을 비출 때마다 그리 두려운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실베스터에게 한없이 상냥한 작은 아버지였다.

    오죽했으면 실베스터가 아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황위 계승권을 내려놓자, 어쩔 수 없이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대신 계승권을 받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해서 황제가 되는 게 희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르테 공작은 애초에 황위 싸움이나 권력에 관심 없는 인물이란 묘사가 있었다.

    현 황제와도 쌍둥이였는데 황태자가 결정되기도 전부터 현 황제를 황태자로 책봉시켜 달라 선황제에게 간청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왜 이 나라 공작들은 동네북인 이미지지?’

    동네북이 아니면 주인공들의 사랑에 역경이 되어서? 그런 것치고 벤자민은 나중에 커다란 역경이 되기는 한다.

    “아, 이곳이 끝인가 봅니다.”

    벤자민은 마지막 리본이 있는 자리에 다다라 주변을 훑었다.

    그레이스는 손에 쥔 약도와 비교해 보고, 마지막 장소에 다다랐음을 확신했다.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알 정도로 땅이 죽어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죽은 땅을 본 적 있나요?”

    “종종 마수를 토벌하다 보면 죽은 땅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 땅은 성녀께서도 정화하지 못하나요?”

    “그런 것으로 압니다. 그 사유로 증원을 요청했는데, 신전에서는 불가능하다 답했고 펠튼 공작가에 있는 기록을 살펴보니 실제로 그러했으니까요.”

    “기록도 살펴보셨군요.”

    “예. 신전에서 이것저것 거절당하다 보니 가끔은 확인하게 되어서요.”

    ‘이건 좀 의외다.’

    벤자민은 꽤 신실한 신자였기에 그들이 말하는 건 군말 없이 믿을 거라 생각했다.

    ‘하기야 매번 안 된다고 하면 궁금해지기도 하겠지.’

    그보다 그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것저것 거절당했다는 건, 뭘 부탁했다는 거지?’

    거절당할 만한 일을 주기적으로 요청했다는 건가? 그 벤자민 펠튼이? 성녀와 독대라도 하게 해 달라고 했나?

    그레이스는 궁금했지만 이건 사생활 영역이었기에 차마 묻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오염된 땅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문을 열었다.

    “여기에 사람이 오가는 길 같은 흔적이 있어요.”

    “……? 그러게요.”

    그레이스가 가리킨 방향 쪽을 본 그는 등을 아래로 밝혔다. 낡고 썩어빠진, 작은 철 부품을 발견한 그가 말했다.

    “레일을 설치했던 자재가 남아 있습니다.”

    “이 공간에 레일이라면, 광산에 설치해 둔 걸까요?”

    “아르델 백작령에 광산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말이죠.”

    ‘그야 당연하지, 폐광한 지 한참 됐으니까.’

    사람이 오가지 않으면 그곳은 잡초 등 식물들로 뒤덮인다. 그래도 이미 터를 다졌던 땅이라 그런지 레일이 설치되어 있던 곳은 나무가 자라나지 않았다.

    벤자민은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최근에 사람이 오간 흔적이 있군요.”

    “……네?”

    그레이스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

    “사람이 오간 흔적이요?”

    “예, 시가 꽁지가 있습니다. 시가는 피우기 전에 끝을 자르거든요.”

    벤자민은 아래쪽에 있는 시가 꽁지를 툭툭 건드렸다.

    “부인께서 데려온 지질학자는 아닐 겁니다. 시가는 원정에 챙겨 올 만한 물품이 아닐뿐더러,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연구 대상이 오염될까 봐 근처에서는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

    “…….”

    “나무 판자도 시간이 지나면 썩는데, 시가 꽁지가 여전한 걸 보면 이곳을 오간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요.”

    벤자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누가 있는 건 아니겠죠?”

    “예, 얼마 전에 누가 다녀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죠. 만약 있었다고 해도 낮에 학자들이 여기까지 온 소리를 들었으면 지금쯤 거처를 옮겼을 겁니다.”

    그는 등불을 어둑한 길목 쪽에 비추었다.

    “그래도 한번 가 보는 게 낫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옆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네.”

    무서워졌다. 그레이스는 괜히 밤에 가자고 한 게 아닐까 후회가 막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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