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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9)화 (59/131)
  • 59화

    ‘저 사람이면 따로 일을 부탁해도 괜찮을 거야.’

    현재 이 원정대의 파벌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황실과 펠튼 공작가를 필두로 한 귀족 그리고 신전이었다.

    사실 펠튼 공작가를 귀족파라고 하긴 모호한 감이 있었으니, 넷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레이스가 펠튼 공작가의 기사를 불러 다른 곳으로 보내자 벤자민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기사는 어디로 보내는 것입니까?”

    “아, 미리 언질을 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옆 영지로 보내었어요.”

    “옆 영지라면…… 지켈 남작령이군요.”

    “네.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곳에 아르델 영지민이 도움을 요청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지켈 남작령의 일원이 후에 아르델로 와 원정대를 보필했다.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훨씬 더 뒤의 일이었다. 아마 그때쯤이면 이곳의 오염도는 더욱 끔찍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참혹하기 그지없는데, 이걸 옆 영지에서 계속 몰랐다고? 원정대가 올 때까지?’

    게이트가 아무리 활발해졌다고 해도 외곽에 위치한 땅들은 게이트 소유국보다 더 활발히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켈이나 아르델 둘 다 아직 게이트가 개설되지 않았다.

    ‘지켈 남작령은 영주 대리인이 운영하는 곳이야. 그것도 영주는 여타 귀족이 아니라, 황족이지.’

    실베스터.

    본작의 남자주인공이었다.

    지켈 남작은 실베스터 가진 작위 중 하나이다.

    실베스터는 유일한 현 황제의 아들로서 여러 영토를 하사받았는데, 역마살이라도 낀 건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원작에서는 저주에 걸려 있었다니 그 여파 탓일 수도 있지.’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도 정확히 무슨 저주인지 말하지 않았었다. 그 저주가 남자주인공인 실베스터의 삶을 계속 갉아먹었다고만 묘사했다.

    ‘황태자와 관련 있어서 황실에서 덮어 버린 걸까?’

    “……그런데 이곳의 처지를 보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것 같아서, 혹시 그쪽에도 오염의 여파가 있을지 확인해 보려고요.”

    “하긴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면 주변 땅에도 악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군요. 그래도 지켈 남작령이면 현재 페르디난트가 맡고 있을 테니 지켈 남작령의 주민들에게는 큰일이 없을 거라 믿어야죠.”

    “……?”

    벤자민의 여상한 말 속에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

    “각하, 지켈 남작령의 현 영주 대리를 알고 계시나요?”

    “네.”

    벤자민은 뭐라도 잘못되었냐는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실베스터가 영주 대리인을 고를 적 추천해 준 인재입니다. 작위는 없으나 상당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기에 영지를 관리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 없을 거라 판단했거든요.”

    ‘그러니까…….’

    핑핑 돌던 그레이스의 머리가 뚝 멈췄다.

    따지고 보면 지켈 남작령의 영주 대리인은 벤자민이 꽂아 넣은, 황실의 사람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존재가 아닌가?

    “설마 페르디난트가 잘못되지만 않았기를 바랍니다.”

    그레이스가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벤자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을 뿐이었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제까지 끼워 맞추던 퍼즐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중요한 조각은 없어서 뭔 그림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저녁이 되기도 전, 숲으로 떠났던 학자 무리가 도착해 그레이스에게 보고했다.

    “다행스럽게도 숲은 생명이 풍부해 완전히 죽지 않은 나무가 많았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완전히 죽은 땅이 존재했습니다.”

    “그 부근의 나무에 붉은 리본을 묶어 놓았으니 후에 확인하기 용이할 겁니다.”

    “그렇군요. 수고 많았어요.”

    대충 예상한 보고였다.

    학자들은 이동하며 작성한 간단한 약도를 그레이스에게 넘겼다.

    ‘생각보다 꼼꼼한 이들을 뽑아 주었네.’

    하기야 관리국장은 벤자민 때문에라도 그레이스에게 더없이 잘 보이고 싶었을 테니, 어중간한 인력을 붙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레이스는 이를 어쩔지 잠시 고민했다.

    광산의 존재를 확인하고 매입해 두는 건 미리 절차를 밟는 게 나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후발대가 합류하면 정신없어서 더 복잡해질 테니까.’

    그레이스는 오늘치 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을 끝낸 뒤 숨을 돌리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저 많은 이들 틈에서도 그는 잘만 보였다.

    험난한 길이었기에 옷도 평범하고 특징 없는 밀갈발을 가진 자였으나 누구보다도 잘 보였다.

    마치 저 하늘 너머에서 지고 있는 햇살이 전부 그를 향해 비추는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는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꼭 쥐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각하, 혹시 오늘 밤에 시간이 있으신가요?”

    잠시 숨을 돌리며 물을 마시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질문에 사레 걸려 기침했다.

    “쿨럭!”

    “가, 각하? 괜찮으세요?”

    기침의 여파 탓인지 벤자민의 뺨과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떠듬떠듬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아주 괜찮습니다. 괜찮다 못해 아주 쾌적합니다.”

    “그, 네…….”

    쾌적하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그레이스는 주변을 쓱 둘러보다가 딴지 거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부인께 내드릴 시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밤에 잠시 정찰도 함께하기로 했기에, 그 시간만 피한다면요.”

    정찰 이야기를 꺼내는 벤자민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었다.

    ‘하긴 지금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는 건 현 선발대의 수장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겠지.’

    숲의 오염 지대를 재확인하는 일은 굳이 벤자민이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노리는 것은 벤자민과 함께 광산을 발견해, 괜한 절차 없이 바로 광산 매입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스가 고민하다 말했다.

    “그러면 새벽은요?”

    “……새벽이요?”

    “네, 각하께서 정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각하와 긴밀히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콰직.

    어디선가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가 소리의 근원지를 보니, 벤자민이 들고 있는 물통이 약간 으그러져 있었다.

    “…….”

    저 사람이 이렇게 힘이 셌던가? 하긴 기사로서의 명성도 있고, 북부 마수를 진압하기도 하니 약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저렇게 한없이 유순한 얼굴을 가진 터라, 그레이스의 안에서 벤자민은 한없이 문학 청년에 가까웠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꽃이나 책을 더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

    아리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 유독 말이 많았던 때는 꽃이나 고전문학에 관한 주제를 꺼낼 때가 아니었나? 아, 그러고 보니 게이트 이야기할 때 즐거워했었지.

    그레이스는 제 생각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벤자민은 얼굴이 붉게 타오른 채 그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최대한 금방 끝내고 부인의 거처로 찾아가겠습니다.”

    “네? ……네.”

    “제가 너무 늦으면 먼저 주무십시오.”

    그레이스는 괜히 침을 삼켰다.

    어째 못 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

    늦은 새벽, 그레이스의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

    “각하?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벤자민은 묘하게 뚱해진 얼굴로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등불을 가져가 대신 들었다.

    “저는 또 긴밀히 할 일이 있다길래, 사적인 담소라도 나눌 줄 알았습니다.”

    “가는 길에 대화하면 되죠?”

    “그건 업무 중 대화 아닙니까? 공과 사는 다릅니다.”

    “원정 중이니, 지금은 24시간 공적인 순간이 아닌가요?”

    “……그으, 건 그렇지만요.”

    ‘신기하네.’

    그레이스가 소설에서 본 벤자민은 흑화하기 전까지는 어른스럽고 여유로웠다. 그런데 지금 또 괜히 말을 늘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토라진 듯 구는 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보다 이 어두운 시간에 숲에 들어간다니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낮에는 다른 일 때문에 바쁘잖아요.”

    “하지만 오염 지역을 보는 것은 낮에 하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벤자민은 영 걱정되는지 계속 말을 덧붙였다.

    ‘그야 그렇지.’

    그레이스라고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벤자민을 따로 끌고 올 만한 시간은 이런 늦은 밤 혹은 새벽뿐이었다.

    다른 때에 불러도 벤자민이야 어떻게든 그레이스에게 시간을 내주겠다만, 그건 원정대의 일원들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뻔했다.

    “그래도 길은 잃지 않을 거예요.”

    “네?”

    그레이스는 의아해하는 벤자민을 뒤로하고 숲 쪽을 바라보았다.

    “리본을 묶어 놓으라고 했거든요.”

    평범한 리본이라면 밤에는 보이지 않을 터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학자들에게 건넨 리본에는 야광도료가 발라져 있었다.

    무색이었지만 밤이 되면 은은한 빛을 뽐내었다.

    이 또한 마도구 공방에서 마석과 야광석을 이용해 만든 제품이었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펠튼 공작가가 마도구 연합의 대후원자이며 지지자였기에 늘 많은 신제품을 미리 제공받고는 했다.

    야광도료 또한 그 신제품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펠튼 공작가가 마석의 대다수를 소유하고 있는 만큼, 마도구사들이 펠튼 공작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긴 하지.’

    그냥 마석도 아니고 최고급 마석은 펠튼 공작가 소유의 땅에서만 났다. 그런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늘 신제품은 펠튼 공작가에 먼저 납품되었다.

    애초에 벤자민이 사적으로 기분이 상한다고 보복할 만한 사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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