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8)화 (58/131)
  • 58화

    “각하!”

    “번턴, 수고가 많아.”

    벤자민의 보좌관이었다. 그가 왜 여기 있나, 그레이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미리 가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약 문제가 없으면 길을 따라 내려올 테니 중간에 합류하여 시간을 아낄 수 있고, 문제가 있다면 도움이 급한 순서대로 정리할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벨 번턴은 다행스럽게도 그리 고생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벤자민에게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이 영지의 영지민 수와 급한 환자순으로 정리한 리스트입니다.”

    “수고가 많군.”

    “무엇을요. 이 또한 각하를 보좌하는 일이며, 저는 각하 대신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음에 영광을 느낍니다.”

    “…….”

    그레이스가 힐끗 아벨 번턴을 바라보았다.

    그는 반질반질한 얼굴로 눈 하나 끔뻑이지 않고 말했다.

    벤자민이 하하 웃었다.

    “입바른 소리는 입술 좀 적시고 말하게.”

    “진심입니다.”

    ‘내가 아르델 백작령에 와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랬나?’

    사실 그레이스가 아르델 백작령까지 향하자고 한 것은 꽤 터무니없는 제안일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야 원작을 알고 있으니, 이곳이 오염원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레이스가 모두가 납득할 만큼 논리적인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지만, 괜히 벤자민이 제 말을 믿어 준 것이 기뻤다.

    ‘내 이미지는 대외적으로 좋지도 않을 텐데…….’

    펠튼 공작저 내에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없는 것 같았다. 괜히 그레이스의 마음속 어딘가가 불편하게 뭉클해졌다.

    “그럼, 물품을 배분하고 심각한 환자가 있는 곳은 의사를 먼저 보내도록 해요.”

    “예.”

    “그리고 또…….”

    그레이스는 저 멀리 짐을 꺼내는 이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지질학자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에게는 제가 시킬 일이 있으니, 따로 데려가도 될까요?”

    “예, 부인께서 챙긴 인력이니 그러시죠.”

    “고마워요.”

    “그건 제가 할 말이죠.”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곱슬곱슬한 당근색 머리칼을 한 줌 약하게 쥐며 말했다.

    “부인 덕에 오염의 근간을 더욱 빨리 발견하고 대비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더 늦었다면 이보다 큰 피해가 있었을 겁니다.”

    “…….”

    그레이스는 또다시 마음이 간질거렸다.

    “벼, 별거 아니에요. 각하께서 제 별것 아닌 말에 귀 기울여 준 덕분이죠.”

    이상하게 간지럽고 부끄러운 동시에 불편했다.

    벤자민과 나눈 대화 탓이라 생각한 그레이스는 빨리 그에게서 벗어났다. 벤자민은 순식간에 빈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레이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아무 말 하지 않던 그는 고개 돌려 아벨 번턴에게 말했다.

    “이곳의 인원은 자네가 제일 잘 알 테니, 의사들을 안내하는 역을 맡겨도 되는가?”

    “예, 맡겨만 주십시오.”

    ⋆★⋆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30분.

    해가 지려면 먼 시간이었다.

    그레이스는 지질학자들에게 채비를 단단히 하라 이른 뒤, 팀을 나누었다.

    다수의 인원으로 추려진 팀은 흩어져 마을의 토질을 검사하고, 현 사태에 도움이 될 작물을 고르는 것이었다.

    ‘사실 목표는 다른 거였지만.’

    그리고 제일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광산.’

    아르델 백작령에는 광산이 존재했다.

    하지만 말만 광산이지 무언가 돈이 될 만한 건 나오지 않았다. 품질이 조악하고 빛이 약해 싸구려 보석상에서도 팔리지 않았다.

    ‘아리아가 아르델 백작령을 정화하고 나면, 오염이 오래 진행되어서 신전에서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추가 정화 작업을 해 주겠다고 했고 이곳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어.’

    그래서 당시 원정에 참석했던 사제 중 대표 격에 속하는 이가 그럼 이 땅에 있는 광산을 신전에 기부해 달라 부탁했다.

    사실상 처치 곤란이었던 광산을 받겠다고 한 것이었기에, 이것은 미담으로서 알려졌다.

    정작 아리아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몇몇 이들은 아리아를 칭송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리아가 성녀인 만큼, 신전의 상징이니까 그렇게 된 거겠지.’

    이 광산은 폐광된 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래서 원작에서 신전이 광산을 요구했을 때 백작령의 영지민 중 어린 축은 처음 듣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나이가 좀 있는 자들만 놀랐다.

    ‘내가 신전의 사람이었다면, 토지가 되살아난 후 처음 재배하는 농작물 일부를 기부해 달라고 할 거야. 그게 아니라면 똑같이 힘든 처지의 사람을 도와 달라고 하거나.’

    그편이 좀 더 신전의 위상을 살리기 용이했다.

    광산이 처치 곤란인 건 맞았지만, 신전이 소유한다고 해서 치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또한, 옮길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기에 관리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다.

    그레이스는 차라리 광산을 펠튼 공작가에서 매입해 그 돈을 서부 사람들 대신 기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면 신전을 향한 찬사 어린 시선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만약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지면 그대로 아르델 백작령 주민들에게 기부하여 한동안의 자금으로 쓰게 하면 되니까.’

    다만, 그러려면 그레이스가 광산의 존재를 알아야 했다. 그곳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발길이 끊긴 장소였기 때문에 뜬금없이 그녀가 말하면 다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광산과는 상관도 없는 지질학자를 길잡이 역으로 꾸렸다.

    그녀는 구석에 있는 죽어 가는 숲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광산은 특히나 땅이 다 죽어 버려 아리아도 정화할 수 없다고 했거든.’

    땅이 죽으면 정화 작업을 한다고 해도 그 위에서 죽은 것들은 되살릴 수 없으며, 다시금 생명을 움트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지질학자를 데려온 명목상 이유는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땅 혹은 식물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숲을 둘러보아도 의심의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숲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허가되지 않겠지만.’

    저 안에 위험한 짐승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죽어 모든 생명이 살아가기 힘든 곳인데 덩치 큰 맹수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후 정화를 마친 아리아와 실베스터가 밤에 담소를 나누는 장소가 저 숲 안쪽이었다.

    벤자민은 아리아와 실베스터가 숲속의 아직 마르지 않은 호수 앞에서 대화 나누는 걸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음.”

    또 그에 대한 묘사를 떠올리니 그레이스는 마음이 쿡쿡 박히며 불편해졌다. 이렇게 벤자민이 아리아를 향해 미련 넘치는 감정을 가진 묘사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읽을 당시에 자신이 왜 그리 부정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기분이 복잡할 때는 역시 일하는 게 최고지.’

    원래 생에서도 몸이 좋지 않아 늘 침대 위에만 앉아 있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도 들고, 점점 몸이 안 좋아지기 마련이다.

    “마을의 토질을 검사하지 않는 분들은 숲을 부탁드려요. 나침반은 챙기셨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셔야 해요.”

    “네.”

    “그리고 이 리본을 받으세요. 특이점이 있는 구역에 묶어서 표시해 두고 돌아오는 길에도 띄엄띄엄 묶어 주세요.”

    그레이스는 붉은색 리본을 학자들 손에 잔뜩 들려 주며 말을 이었다.

    “안쪽에 짐승은 없겠지만, 만약 세 분이서 가기 꺼림칙하시다면 저쪽에 있는 붉은 머리의 기사님께 부탁드리면 호위를 붙여 줄 거예요.”

    로젤리아는 이번 원정대에서 펠튼 공작가에 차출된 기사단원의 대장 역을 맡게 되었다.

    ‘차출되는 인원도 전부 공작가의 기사들이니 좋지 않은 시선도 덜 받겠지.’

    아무래도 지질학자는 예정에 없던 인원이었다. 벤자민이야 미리 들었지만, 갑자기 끼어든 인원을 타 원정대 일원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챙겨 온 게 그 펠튼 공작 부인이라면 더 그러겠지.’

    그레이스는 이곳에 도착 후 원정대 일부에게서 비호의적인 시선을 받았다.

    대략, ‘저 부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왜 여기까지 함께 온 거지?’쯤 되는 의미였다.

    예전부터 타인의 악의나 동정 어린 시선은 지긋지긋하게 받아 왔다.

    그레이스가 이를 못 읽을 리가 없었다.

    ‘마음대로 욕하라지.’

    숲으로 들어가는 학자들을 배웅한 뒤 그레이스는 샐리와 함께 이동해 구제 물품을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오염 사태를 늦게 알아낸 이유는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야.’

    알아본바, 아르델 백작령은 현재 황실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영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를 처벌했다는 문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원작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건 어려우니까.’

    로맨스 위주인 글을 읽을 때면 세계관보다는 주인공들의 연애사에 집중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지질학자를 데려온 마지막 이유.

    ‘할 일이 없어 보이네.’

    미리 도착해 주변 상황을 둘러보기로 한 인력은 지질학자들이 대신 그 역할을 해 손이 비었다.

    그레이스는 할 일이 없는, 먼 거리를 왕복하는 데 익숙한 인력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 펠튼 공작가에 소속된 기사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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