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7)화 (57/131)

57화

벤자민을 만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벤자민과 근래 교류하며 느낀 건 펠튼 공작 부인은 별관에 들어간 후 밖을 나오지 않았고, 벤자민은 별관에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남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주치의인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예전에 손을 치료받을 때 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테니까.’

보통 약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습관처럼 물어본다.

그러나 펠튼 공작가의 주치의는 약에 관한 궁금증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일반 영양제도 아닌 약. 제국법상, 약은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정제된 고형으로 제조된 약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약마다 크기나 색, 혹은 찍혀 있는 모양과 철자가 달랐다.

약을 철저하게 분류하고 관리해, 알맞은 약을 처방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 또한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발전한 부분이지.’

약학의 발전은 매우 신속했으며, 그 중심에는 현 황제의 동생인 자르테 공작이 있었다.

그는 비단 황족이라 공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약의 발전을 이끌고 제국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렸다는 공로였다.

‘원래의 그레이스가 약에 관심이 있었을지도.’

자르테 공작은 소설에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지식이 이리 방대한 건, 펠튼 공작 부인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튼 공작 부인의 기억은 참 신기한 것이, 본인에 대한 것은 뒤죽박죽에 엉망이고 떠오르지 않는 게 그리 많았으면서 타인에 관한 지식은 많았다.

‘아무튼, 그렇기에 그 약은 결국 누군가에게 처방받았다는 게 옳아. 그게 아니라면 불법일 테고.’

약에 대한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약제사가 아닌 이상 그 약에 대한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공부한다면 알 수도 있었지만, 공작 부인의 서재에 전문가 수준의 약학 정보가 담긴 책은 없었다.

“좋았어.”

“무엇이 말입니까?”

“……!”

생각을 갈무리하고 혼잣말을 하는 그레이스의 근처에서 부드러운 중저음이 들렸다.

“가, 각하?”

“예, 접니다.”

언제 인사를 끝내고 온 건지 벤자민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레이스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부인께서 깊게 생각에 빠져 계시기에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왔으면 인기척 좀 내지, 그레이스는 조금 민망해졌다.

“별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이번 원정에서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또 그런 걱정을 하시는군요.”

벤자민은 사뭇 슬픈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부인께서 절대 짐이 될 일은 없습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리 말하는 그가 건넨 것은 황금빛 꽃 한 송이였다.

“이건……?”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꼬마 아이가 주더군요. 마차 안에 누가 있느냐고 물어보기에, 제 부인이 있다 하니 당신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

그레이스는 흠집 하나 없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딱 봐도 아이가 가장 예쁜 꽃을 꺾어 온 게 틀림없었다.

“각하의 아내라고 해서 줬나 봐요.”

“그런가 봅니다.”

벤자민이 한없이 멋있고 다정했으니 아이들이 보기엔 왕자님처럼 보일 터였다.

‘사실 공작이니 비슷하지.’

그런 공작의 아내라면, 소문을 듣지 못한 아이라면 똑같이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괜히 아이의 동심을 무너트리는 기분이었다.

‘아냐.’

그녀는 마차가 서서히 출발해 빛나는 게이트 너머로 들어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건 전부 자격지심이지.’

정말 그러했는지 아닌지, 저 꼬마 아이 빼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원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펠튼 공작 부인을 비웃었는지 알며, 툭하면 머릿속에서 그녀를 향해 비웃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자기 비하에 사로잡히는 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리 변명하는 제자신이 비참해졌다.

⋆★⋆

토할 거 같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며, 시야가 어지럽다.

‘짐이 되지 않기로 했는데…….’

그레이스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결국 마차에 누워 있었다.

“멀미인 것 같군요. 괜찮아질 때까지는 마차로 이동합시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래 원정 초반에는 저도 마차로 이동하기로 했었습니다.”

게이트 사용 후, 그레이스는 심각하게 속이 매슥거렸다.

예전에 게이트 관리국에서 쓰러졌을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때보다 나은 점을 꼽으라면 열은 나지 않는다는 점일까…….’

그렇다고 완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누가 건들기만 하면 토할 거 같았다.

“물이라도 가져올까요?”

“괜찮아요…….”

이번 원정의 목표는 톰 버킨의 재판으로 향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펠튼 공작 부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꼴이면 비난을 없애긴커녕 몇 수저 더 얹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안 좋은 소문 나는 거 아냐?’

원작에서도 숨만 쉬어도 까이는 호두까기 인형의 호두 같은 존재였는데, 이 정도면 그냥 까 달라고 호두가 굴러온 수준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너무 원작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다음에 펼쳐질 길을 한 치 앞도 예상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었기에 놓을 수 없었다.

‘그 나침반이 원래 가리키던 방향이 죽음이라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어쩌면 그래서 더 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몇 가지 정보만 쏙 빼 와서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이득을 취한 뒤 조용히 살 터였다.

원작을 바꾼 뒤에 일어나는 변화가 무조건 자신에게 좋을 거란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먹고살기 진짜 힘드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살기 힘든 쪽일까…… 잘 먹고 있지 않으니.

그레이스는 최근 몸 관리를 위해 먹은 식단을 떠올렸다.

덕분에 몸이 느린 속도로라도 가벼워지고는 있었다. 처음의 자신과 비교해 보자면 지금은 환골탈태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보면 여전히 살이 있겠지만.’

특히 아리아 옆에 서면 그녀를 나뭇가지로 만들어 버릴 수준이 아닐까? 까지 생각에 이른 그녀는 퍼뜩 정신 차렸다.

‘이런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왜 자꾸 떠오르는 건지. 누군가에게 세뇌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이건 아마 멀미 때문에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일 터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이런 생각이 딱히 들지 않으니 말이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맞은편에 있는 벤자민이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벤자민은 마부석과 맞닿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차가 향하는 반대 방향으로 앉으면, 멀미하기가 더 쉬웠다. 그래서 보통 더 아랫사람이 저 방향으로 앉곤 했는데, 벤자민은 가장 처음부터 저 자리에 앉았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

그레이스는 그가 남몰래 조금씩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럼에도 자못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녀가 이따금 원치 않는 자기비하적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녀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대단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졌다.

‘이것도 남 탓이지.’

그녀가 아는 원작에서는 아리아를 짝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이 몸에 들어와 마주했을 때는 더 없이 그레이스를 우선하며 다정한 저 남자.

“……슬슬 괜찮아지려고 하네요.”

“……! 다행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

그것이 이상하게 그레이스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그레이스가 아닌 펠튼 공작 부인을 찾으려고 하면, 벤자민의 사랑이 사실은 아리아가 아니라 펠튼 공작 부인에게 향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레이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에게 물었다.

심장께가 영 불편하고 갑갑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 또한 멍청한 사람이었다.

⋆★⋆

그 후로 몸이 괜찮아진 그레이스는 말과 마차를 번갈아 타며 이동했다. 원정 내내 말을 타고 싶었으나, 그것은 그녀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타는 게 도움은 되었는지 최대 예상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이건…….”

“끔찍하군요.”

아르델 백작령으로 향할수록 오염의 여파인지 척박한 환경이 눈에 들었다.

다들 그 참혹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는데, 최외곽인 아르델 백작령은 상태가 더욱 끔찍했다.

그레이스는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참혹한 참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나무는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었고, 한때 밭이었을 땅에는 이미 죽은 풀포기들만이 보였다.

모든 사람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듯 문을 꼭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벤자민은 입을 달싹이다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렸다.

“먼저 구호 물품을 배급해야겠습니다.”

“아.”

그레이스도 그제야 정신 차리고 말에서 내리기 위해 더듬거렸다. 벤자민은 꽤 자연스럽게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레이스가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게 좋겠어요. 몇 사람은 구호 물품을 꺼내서 품목별로 정리하고, 정리하지 않는 일원은 물품을 받을 사람을 파악해야…….”

“인원 파악은 괜찮습니다.”

“네?”

벤자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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