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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6)화 (56/131)
  • 56화

    그레이스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커튼을 치고 기대어 앉았다.

    잠시 후, 짐칸에 선물을 채워 넣은 샐리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영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마차 안의 분위기를 읽은 샐리는 다소 의아한 얼굴이 되었으나 그레이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이제 출발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레이스가 답하자, 샐리가 마차를 두들겼다.

    천천히 바퀴가 굴러가며 마차가 나아갔다. 그레이스는 괜히 낯 뜨거워진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일까.’

    ⋆★⋆

    “어,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관리국장이 급히 나와 반겼다.

    ‘어째 긴장한 것 같네.’

    관리국장의 얼굴에서 다소 긴장한 모습이 보였다.

    그뿐 아니라 주변에 서 있는 이들 또한 그레이스의 안색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음…….”

    도리어 이런 분위기가 되니 그레이스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레이스는 샐리에게 손짓해 준비해 온 선물을 내왔다.

    “빈손으로 들리기 미안해, 선물을 좀 가져왔네.”

    “부, 부인. 그러실 필요 없었습니다만.”

    관리국장은 그리 말하면서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은 솔직한 건가…….’

    눈치를 살피고 긴장하면서도 선물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람을 보며 그녀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입꼬리를 아주 미미하게 올렸다.

    “내가 지난날 게이트 관리국에서 쓰러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일이 많았을 텐데, 진작에 찾아와야 하는 게 맞지.”

    그레이스가 가져온 선물은 쿠키들과 고급 찻잎뿐 아니라, 이번에 판매하고 있는 티백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관리국에서의 일은 많이 바쁘고 고되다 들어서. 숨 돌릴 때 차라도 마시면 좋지 않을까 싶어 가져왔네. 마차에 더 있으니, 기쁘게 받아 주면 좋겠어.”

    따지고 보면 선전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기뻐할 법한 선물을 준비했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이는 그레이스가 일개 직원들의 선물도 챙겨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그레이스는 보닛을 꾹 누르며 관리국장에게 말했다.

    “슬슬 안으로 들어가서 앉을 수 있을까?”

    “아! 물론이죠. 귀한 분을 계속 세워 두어 죄송합니다.”

    “…….”

    그레이스는 자신이 눈치를 준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괜히 미안해졌다. 작게 침을 삼키며 그의 안내를 따랐다.

    애초에 계급주의가 있는 이 사회에서 자신보다 연상인 사람에게 반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레이스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한 문제였다.

    ‘원래부터 불편해했던 거 같기도 해.’

    그레이스가 뜨문뜨문 남아 있는 기억을 뒤적여 보면, 애초부터 심성이 여린 사람이었다.

    린덴 자작가는 귀족이었고 영지를 관리하였기에 영지민에게 대우받기는 했으나, 린덴 자작 부부의 아이들은 귀족 평민 할 거 없이 어울려 자랐다.

    즉, 그레이스는 자라면서 만나는 모든 어른에게 존칭을 쓰며 지내왔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밖에서 누군가와 교류하고 지낸 기억도 딱히 없고.’

    떠오르지 않고, 떠올려 봤자 불쾌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려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레이스는 두통을 가라앉히며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게이트를 운영하는 날이 아니라고 했지?”

    “예, 지난번에 회로를 재검토했으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관리국의 건물을 이전시킨 후, 종종 회로가 망가지는 일이 있어서요.”

    “회로에 문제가 일어나다니,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

    “아! 아닙니다.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류로 고장 난 적은 근래에 없으니까요.”

    근래라는 건 예전에는 있었다는 뜻이다.

    그레이스는 심란해졌다.

    “다만 관리국 이전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반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시킨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1년쯤 되었습니다. 안착하는 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지만요.”

    “아하…….”

    게이트를 이전한다는 것은 게이트를 연결하기 위한 좌표 마법의 수식도 고쳐서 고정해야 함을 의미했다.

    거기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모든 지역에 게이트를 설치할 수 없었다.

    이전하는 동안에는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제도의 물가가 상당히 올랐을 거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게이트 관리국이나 게이트 자체의 설치 위치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텐데.’

    그레이스는 원작 내용을 떠올렸다.

    아리아가 제도에 올라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 현재, 원작에서도 아리아는 종종 게이트를 사용하곤 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나온 적 없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라, 소설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그리 추측했다.

    ‘별로 다룰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대화에 올리는 건 페이지 낭비니까.’

    관리국장이 그레이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펠튼 공작 부인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만큼, 그가 얼마큼 열심히 관리국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어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각하께 나중에 관리국 내부에 지원이 필요하다 전해 주겠네.”

    “……! 감사합니다.”

    그레이스의 추측이 맞았는지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래도 어엿한 단체의 대표일 텐데 저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해서 괜찮은 걸까.’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그레이스는 대화를 본격적으로 잇기 위해 보닛을 풀어 샐리에게 건넸다.

    예전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보닛을 풀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그레이스는 공작 부인으로서 책무를 하기 위해 온 상태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응접실 내부에서 상대할 사람은 관리국장 한 명뿐이었다.

    ‘내 뒤에 기사들이 서 있는 것도 한몫하지.’

    대신 오늘 나눈 대화는 전부 벤자민의 귀에 들어가겠지만, 그레이스는 그에게 무언가 꿍꿍이를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약속 장소로 출발할 적, 그레이스는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되새겨 보면 무엇인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맞닥뜨려도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낯간지러움 그리고 또 평생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누군가는 매일 겪을 일상 속의 든든함.

    그러니까 야트막한 호의.

    사람을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감정이었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는 것에 이어, 몇 가지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그래서 오늘의 그레이스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 맞은편의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탁할 일이라고 해야겠지.”

    “부탁이라 함은?”

    “능력 좋은 지질학자가 몇 명 필요하네. 어떤 가문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으로. 그리고 또 지역과 나라별 게이트 사용 기록을 출발 전까지 추려 주면 좋겠군. 한, 2년 치.”

    “…….”

    관리국장은 ‘왜 그런 걸 내게?’라는 얼굴이었다.

    “맨입으로 해 달라는 것이 아니야. 이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네.”

    ⋆★⋆

    시간이 흘러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고아원 사람들은 후발 원정대와 같은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기에 함께하지 못했다.

    게이트 관리국에는 원정대를 구경하러 온 제국민과 배웅을 위해 나온 황실 소속 공무원이 있었다.

    ‘잘 준비해 주었네.’

    그레이스는 마차의 창으로 원정대에 합류하는 지질학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레이스와 같은 곳을 바라보던 벤자민이 말했다.

    “만약 사람이 필요했으면 저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각하께서는 원정 준비하느라 바쁘셨으니까요. 괜찮아요.”

    아무래도 수많은 눈이 지켜보았기에 그레이스는 밖으로 나갈 용기가 서지 않았다.

    “밖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각하께서 모습을 보여야 출발할 거예요.”

    “……그럼.”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여간 돕고 싶었는지,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밖에 있는 이들에게 얼굴을 비추기 위해 마차 밖으로 나갔다.

    게이트 출발 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 그레이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서부의 끝, 아르델 백작령의 현재 토질 상태를 검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리아가 도착해서 오염을 정화하고 난 뒤에도 작물들이 잘 자라나질 못했어.’

    마력이나 신성력의 원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자연의 흐름의 일부였다. 하필 지질학자인 이유는 아르델 백작령의 토지를 정화되기 전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탓이다.

    ‘신전은 원인 규명 이전에 구제가 목적이라서 전부 정화해버리니까. 완전히 깨끗해진 집에서는 쓰레기를 찾을 수 없는 노릇이니.’

    그레이스는 관리국장이 준비해 준 게이트 사용 기록을 살폈다.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이것을 준비해 달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숨겨져 있던 일기장에 표시된 날짜를 떠올리며, 그날의 게이트 기록을 살펴보았다.

    ‘딱히 모든 날짜에 일치되는 지역은 없네.’

    혹시 잘못 본 걸까 몇 번이고 훑어보았지만, 몇 번 일치하는 구역은 있어도 아예 모든 날짜에 포함되는 장소는 없었다.

    “흠.”

    그렇다는 건 제도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건가? 그레이스는 미간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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