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레이스는 애써 숨을 골랐다.
‘이제는 안 들려.’
잠시 뒤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그레이스가 시선을 옮기자 벤자민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그레이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변명이 튀어나왔다.
“……승마는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럴 수 있죠.”
느릿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이보다 평화로운 소음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심장은 불안하게 뜀박질했다. 조금 전의 굉음이 몰고 온 잔향이었다.
⋆★⋆
“마님,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괜찮았어.”
말을 타는 것은 생각보다 체력을 요했다. 그레이스의 축 처진 몸에서 피로가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 내일 찾아올 근육통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할 것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계속 옆에서 리드해 준 벤자민이나 나를 태운 앰버가 더 힘들었을 테니까.’
“오늘도 혼자 씻을게.”
욕조에는 이미 따듯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녀들이 물러간 뒤 물에 몸을 담근 그레이스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이제까지는 그런 적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러는 거지?’
그나마 그녀가 살 만했던 요인 또한 어차피 이 우울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목소리가 ‘펠튼 공작 부인’이 아니라 그레이스, 현재의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심과 불안에 대해 속삭이면 그녀가 가진 확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모든 불안은 아직 그녀가 알고 있는 ‘원작’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기에 계속 떠올랐다.
‘그 외에도, 이 원작에는 사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펠튼 공작 부인이 가진 우울은 지나치게 거대했고, 그녀가 무능하다고 하기에는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았다.
‘만약 지식이 없었다면, 원작의 정보를 알고 있다 해도 이용하기 용이치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따금 드는 스스로를 향한 불신과 불안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펠튼 공작 부인이 가진 지식은 다양했다. ‘원작’의 정보를 활용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원래부터 건망증이 심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공작 부인의 기억 자체에는 모호한 점이나 구멍이 많고, 원체 감정 기복이 오락가락했다.
물에 잠겨 있는 몸은 무겁게 축 늘어졌다.
‘무능하고 못난 공작 부인.’
원작에서 펠튼 공작 부인의 이름 앞에 꼭 붙던 불명예스러운 수식어였다.
그레이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벤자민과 아리아가 나란히 서 있던 잔상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 보통은 그래야 맞지.’
아리아 정도는 되어야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나,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만약 펠튼 공작 부인과 같이, 자신과 같이 생긴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모두가 불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애초에 그녀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살고 싶었다.
저번 생에서 죽나 싶었더니 갑자기 새로운 삶이 주어졌고, 이 목숨마저도 원작에 의하면 들판 위에 켠 촛불보다도 위태로웠다.
이 몸에 들어와 그레이스가 된 후로 묻어 두었고, 서서히 잊히던 원래의 자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한 형제 사이에서 태어난 못난 별종,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 어느 순간부터 병원에서만 살았다. 부모님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개인실을 내주었지만, 자신을 찾아온 날은 손에 꼽혔다.
그레이스는 부모님이 바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외로워했고 나날이 죽어 갔다.
그래서 더더욱 소설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다른 사람이 되어서야 이러한 생각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래서 더 벤자민을 좋아했던 걸까?’
소설 속에서 모두가 벤자민의 결혼을 동정했으며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해 폄하했다.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벤자민은 너무나도 불행하고 불운한 자였으나, 소설 속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제 아내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 없었다.
“당신께서 언젠가 제 부인을 만나 보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아리아의 앞에서 종종 제 아내에 대해 말하는 그는 그때마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묘사를 기억한다.
“…….”
그래서 그가 좋았고, 그래서 그가 미웠다.
모두가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말할 때도 한 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실제로 마주한 그 또한 한없이 온후하였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죽은 후의 벤자민은 돌변해 아리아를 독차지하기 위해 납치와 감금을 서슴지 않았다.
이상했다.
지금의 벤자민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후에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한 미래가 일어난다면 그레이스는 죽은 후였다.
그렇다고 지금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어떠한 말로든 포장할 수 있었으나 그 질문으로 인해 바뀌는 상황과 감정은 어떠한 말로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리가 들리는 원인은 역시 내 감정 탓이겠지.’
다른 것을 탓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원인이라면 벗어나는 방법은 내 스스로가 바뀌는 것뿐일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바뀌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려고 할 때쯤이면 꼭 소리가 들려 자신을 방해하고 저지했다.
다시금 눈을 뜨자 빛이 부셨다.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무언가가 떠오를 듯한데,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아주 낯선 웃음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이는 필시 환청이었다.
⋆★⋆
“원정 날짜가 정해졌다면서요?”
“응, 하지만 각하와 나는 조금 더 이르게 출발할 예정이야. 집사가 말해 줬지?”
“네! 저도 마님과 함께하니까요.”
샐리는 이번 원정에 함께하기로 했다. 나들이나 여행이 아니라 고될 텐데 기뻐 보였다.
“샐리가 말을 탈 수 있을지는 몰랐어.”
“저희 집은 원래 말 목장을 운영했었어서 그래요.”
“그러면 샐리가 날 가르쳐 줄 수도 있었겠다. 말 타는 거.”
“에이, 누굴 가르쳐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제가 감히 마님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러다가 사고 나면 어떡해요!”
샐리는 과장된 목소리로 까르르 웃으면서 그레이스의 옷매무새를 갈무리해 주었다.
“밖에 다 준비되었어요. 저는 선물만 챙겨 갈 테니, 먼저 가 계셔요.”
“고마워.”
오늘은 원정을 나가기 앞서 게이트 관리국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전에 그레이스가 게이트 관리국에서 쓰러졌던 일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로 한 탓이다.
‘이것만 확실해지면 게이트로 원정을 떠나는 것에 차질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쓰러진 사건 때문에 게이트 사용이 쉽지 않았다.
이번에 게이트를 사용할 때도 그레이스가 직접 게이트 관리국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는 조건이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된다면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벤자민도 함께하지 않지.’
최근 승마 연습을 하며 벤자민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던 그레이스는 오늘 일정을 혼자 진행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이런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것 자체에서 그와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새삼 실감되었다.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껄끄러웠다. 고아원 사람들과 늘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고아원 화재 사고도 있었는데, 지금 괜찮을까?’
그 후로 제도 신문을 본 적 없는 그레이스는 이렇게 외출하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별관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본 후 그녀가 안고 있던 불안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펠튼 공작가의 인장이 박힌 화려하고 웅장한 마차의 앞에 펠튼 공작가의 정예 기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사 제복을 갖춰 입은 로젤리아가 모든 기사들의 앞에 서 고개 숙였다.
“로젤리아 반트린, 오늘 마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위협도 마님에게 향하지 않기 위해, 펠튼 기사단은 검을 들겠습니다.”
“히, 힘내 줘서 고마워?”
“…….”
그레이스가 감사를 표하자 일순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레이스는 혹시 이게 아닌가, 고민했다.
“……고맙네. 앞으로도 펠튼 공작가를 위해 검을 들어 주게나?”
혹시 말투 탓인가 고민하며 정정해 보아도 그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결국 마차에 타겠다며 삐걱삐걱 이동했다.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탑승해, 습관처럼 커튼을 치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뭐, 뭐야?!’
갑자기 울리는 거대한 소리에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그레이스는 재빨리 커튼을 걷으며 밖을 보았다.
그녀 앞에 펼쳐진 건 괴상한 풍경이었다.
“……뭐, 뭐…… 지?”
열을 맞춰 서 있던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 마님이…….”
“……마님께서.”
계속 마님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거나 영 작게 말해 마차에서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레이스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대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음…….”
그레이스는 이런 일에 대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겨를이 없었다.
커튼을 쥔 채 눈을 굴리던 그레이스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로젤리아 반트린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