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저는 좋아요. 나들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동 시간은 길어 봤자 피해만 끼치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벤자민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각설탕을 하나 꺼내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이 아이가 좋아하는 겁니다. 하지만 자주 주지 않으니, 당신께서 주면 아주 기뻐할 겁니다.”
벤자민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각설탕을 본 말이 콧김을 약하게 내뿜었다.
“읏!”
“하하.”
그레이스가 화들짝 놀라, 각설탕을 쥔 채 뒷걸음질 쳤다. 벤자민은 평소라면 그레이스를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꽤 짓궂은 웃음소리만 흘렸다.
“순한 아이입니다. 공작가에 있는 말 중 가장 착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죠.”
“이, 이름이 있나요?”
“앰버라고 합니다.”
‘호박에서 따 온 건가?’
말은 아주 새까만 흑마였다. 그레이스는 약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앰버라고 불린 말을 바라보았다.
앰버는 그레이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새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사람을 상당히 좋아하는 성정인지, 고갯짓 하나 하지 않았다.
‘뭐, 이름 지을 때 그런 연관까지 생각하는 경우가 몇이나 있겠어.’
연관 있게 짓는다고 한들, 정말 그렇게 자라나는 경우도 없었다.
‘내 지금 이름도 그레이스인데, 이름이랑은 영 멀잖아.’
“……!”
그레이스는 또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이 일었다.
‘이러면 안 되지!’
바뀌기로 매번 다짐하면서도, 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려 들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레이스는 눈썹에 힘을 주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부인? 왜 그러십니까?”
“마음을 다잡는 거예요.”
“무슨 마음이요?”
“…….”
각설탕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앰버와 친해질 마음이요!”
“…….”
벤자민은 웃음을 꾹 참으며 끄덕였다.
“예, 친해지면 좋죠. 앰버도 부인의 마음을 알고 기뻐할 겁니다.”
“저는 진지해요!”
비록 그것 때문에 고개를 내저은 건 아니지만.
“네, 압니다. 저도 진지합니다.”
벤자민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비록 원정을 떠날 때는 앰버와 함께하진 못하겠지만, 저택에서 승마하고 싶을 땐 얼마든지 앰버를 만나십시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승마가 체력 증진에도 좋습니다.”
“…….”
‘귀신같네.’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운동에 관해 말한 적도 없던 것 같은데, 그가 먼저 운을 뗐다.
비록 운동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레이스는 그의 말의 저의를 이해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은 거 같아.’
저렇게 좋은 말을 자신에게 내주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건네는 호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딱히 불리해지는 것도 아닌 만큼 더더욱.
그레이스는 손에 쥔 각설탕의 포장지를 벗겨 앰버에게 건넸다.
앰버는 푸르륵, 하고 소리 내다 그레이스의 손에 올려진 각설탕을 날름 먹었다.
“……! 머, 먹었어요!”
“네, 먹었군요.”
말이 각설탕을 먹는 게 이상하게 신기해, 그레이스가 작게 외쳤다. 마음속 한구석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앰버가 자신의 머리를 그레이스의 품에 가벼이 부딪히고 떨어졌다.
‘이상해.’
아까 머릿속을 기분 나쁘게 휘젓던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금 따스한 기운만 맴돌았다.
그레이스가 앰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탑승해 보시겠습니까? 안장도 차고 있고, 제가 에스코트 해 드릴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요?”
“예, 마침 부인의 드레스가 움직이기 불편한 차림도 아닌 듯하니까요.”
그레이스는 앰버의 등에 타 보라는 벤자민의 제안에 솔깃하면서도 망설였다.
“그으…….”
“네.”
“조금 바, 바보 같고…… 웃긴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절대 웃지 않겠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우물쭈물하던 그레이스가 작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겁지 않을까요?”
“…….”
살이 빠지긴 했어도 정상 체중보다 위였다. 그레이스는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자 괜히 수치스럽고 창피해 얼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이런 거 물어보지 말걸 그랬어.’
그레이스는 고개를 땅을 떨구었다.
“여, 역시 그냥 승마는…….”
그리고 승마는 다음으로 미루겠다 말하려고 하자,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그녀의 눈앞에 있던 견고한 벽과 같은 땅은 멀어지고, 대신 벤자민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레이스를 향해 그가 웃었다.
“어?”
그레이스는 잠시 멍하게 벤자민을 바라보다, 이내 그가 자신을 번쩍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 각하?!”
당황해서 벤자민을 불러 보아도, 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벤자민은 낯빛 하나 안 바뀐 채 그레이스를 앰버의 등, 안장 위에 앉혔다. 어찌나 가벼운 손짓이었는지, 그레이스는 정신을 차렸음에도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앰버의 말고삐를 쥐며 말했다.
“들어보았는데, 전혀 무겁지 않더군요.”
“그, 그런…….”
“걱정 마십시오. 저한테도 가벼운데, 말이 무거워할 리 없죠.”
“…….”
“그리 걱정되시면 원정 때 제가 부인을 안아 들고 뛸까요?”
“아뇨!”
벤자민이 놀리듯 말하자 그레이스가 빨리 외쳤다.
역시나 장난이었는지, 벤자민이 키득거리며 고삐를 그레이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의 반응에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새초롬히 말했다.
“웃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아, 이런.”
그레이스의 지적에 벤자민이 제 입가를 가렸다.
“제 불찰이군요.”
사실 그가 약속했던 부분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질문에서만 웃지 않겠다고 했고, 이미 질문은 끝났다.
그저 그레이스가 민망해 억지 부린 것뿐이었다.
‘민망해.’
그레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삐를 양손으로 쥐었다.
벤자민은 그런 그녀를 훔쳐보다 말했다.
“그러니, 보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부인께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
고삐의 일부를 잡은 벤자민이 천천히 걸음을 떼자 앰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정이 끝나면, 그 길로 바로 린덴 자작령을 방문하도록 하죠.”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게이트 관리국을 방문한 이유가 린덴 자작령이 그리워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이미 황실에 허가까지 받고 자작가에도 전해 두었습니다.”
이번 원정은 제국 차원에서 행하는 일이었기에, 일이 끝난 뒤라도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레이스가 이 부분을 염려하는 것을 인지한 그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황실의 허가와, 원정대 모두에게 미리 귀띔했으며 모든 절차가 끝난 뒤 린덴 자작령 측에 편지까지 보내 두었다는 벤자민의 설명에 그레이스는 살짝 미묘해졌다.
“이미 말을 다 끝내 두었군요.”
“그래서 보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했죠.”
“제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러나요?”
“그러면은…….”
벤자민이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미 황실과 원정대 측에 한 말을 무를 수는 없었던 탓이다.
이내 그가 생각을 마무리했는지 활짝 웃으며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부인과 저, 단둘이 도망이라도 칠까요?”
“……풉!!”
“부인?!”
산뜻하게 웃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사레 걸려 콜록거리다가 겨우 가다듬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나름 농담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같이 빠져나가자는 말은 맞지만요.”
그레이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아도 그는 모른 척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절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가도록 해요.”
벤자민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누가 봐도 그레이스의 승낙을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진짜 이상하네.’
원작에서의 그는 아리아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행동하는 걸 보면, 아니 이제까지 해 온 일을 보면 그레이스를 향해 엄청난 호의를 가진 듯했다.
사실 그것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벤자민이 이대로 변함없이 자신에게 웃어 주고 호의를 보여 주며 잘 대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혼 같은 거 할 필요 없을 텐데.’
그레이스의 얼굴에 입꼬리에 잔잔한 미소가 걸릴 때쯤이었다.
<바보.>
“……!!”
<그는 네가 펠튼 공작 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잘해 주는 거야.>
<그리고, 저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저 사람은 네가 공작 부인과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어.>
<정말 사랑했다면 알았겠지.>
“…….”
은밀하고도 간교한 목소리가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들렸기에 이를 환청이라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그 존재가 분명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펠튼 공작 부인’이 아니라, 그레이스 본인을 향해 분명히.
이제까지 많은 목소리가 그레이스를 잡아 끌어당겼지만, 항상 주체는 펠튼 공작 부인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레이스는 목소리를 버거워하며 휘둘렸어도 어떻게든 뿌리치고 나올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들어오고 모든 기억과 감정을 삶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나’는 다른 인물이라 되새기곤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펠튼 공작 부인의 우울은 타인이 되어야만 수용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프고, 괴롭고, 강제로 욱여져 들어오는 것을 토해 낼 수도 없는 끔찍한 감각.
우울이란 고요한 굉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