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3)화 (53/131)
  • 53화

    “다만 그렇게 된다면 합류 지점이 문제군요.”

    “게이트를 타고 가는 인원을 또 반으로 나누어, 반은 서부지역의 최외곽으로…… 나머지 반은 기차를 타고 오는 분들과 곧장 합류하면 될 거예요.”

    “강줄기의 시작인 외곽 지역이 오염되어 있다면 사태가 심각한 만큼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고, 아니라면 성녀가 험지인 서부 지역으로 직접 이동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제국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표군요.”

    “네. 제도까지 오염된 물이 흘러들어왔다면, 오염의 근원지는 상태가 매우 심각할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고민하다가 물었다.

    “원정의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아르델 백작령입니다. 그곳이 론델 운하의 시작점이니까요.”

    “아르델…….”

    그 이름을 그레이스가 되뇌자 머릿속에서 명확한 정보가 내리꽂히듯 떠올랐다.

    아르델 백작령은 영주였던 백작가의 명맥이 전부 끊겨 제법 오랫동안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았다.

    ‘아르델 백작이 현 황제가 즉위하기 전, 흉계를 꾸미다가 처단당했다고 했지.’

    “그곳이라면 주인 없는 땅이네요.”

    “……! 네, 잘 아시는군요.”

    벤자민이 조금 놀란 듯하자, 그레이스는 멋쩍어졌다.

    ‘혹시 원래 그레이스는 몰랐던 건가?!’

    너무 당연하게 머리에 떠오르길래, 펠튼 공작 부인도 아는가 싶었는데 벤자민의 반응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저번에 제국 영토에 대한 책을 봐서요. 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네요.”

    그레이스는 애써 둘러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영주가 없는 땅이라고 해서 관리가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예, 맞습니다. 영주가 없는 땅은 보통 황실의 녹을 받는 자가 관리하거나, 인근의 영주가 대신 맡고는 합니다. 아니면 영주 대리를 세우거나 하고요.”

    하지만 아르델 백작령에서는 지금껏 아무런 오염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르델 백작령이 오염의 근원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가 원작의 내용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레이스는 의심 가는 상황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다.

    “아르델 백작령에서의 주 수확물은 뿌리채소와 견과류였죠. 혹시 최근 시장가가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확실히 시장가를 확인해 본다면 영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겠군요. 다만 게이트가 타국으로 수출되며 식료품의 수입이 원활해지기 시작했으니, 시장가에는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작물의 수입량 혹은 유통되는 작물의 원산지 현황을 파악해 두는 건요?!”

    그레이스가 종종 고아원을 방문하며 오가던 시장에서는 여러 농작물을 판매하고는 했는데, 원산지를 표기해서 팔진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그게 필수가 아니니까.’

    게이트 운송이 해상이나 마차보다 유통 과정이 간단함에도 비싼 이유는, 국가 간 경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원산지를 기록하지 않더라도 게이트 쪽에서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기록할 수밖에 없어.’

    “확실히 그쪽이 더 좋겠군요. 그렇게 하면 목적지를 정하기 더욱 수월할 것입니다.

    “부탁드릴게요.”

    “무엇을요. 제국을 위한 것인데요.”

    벤자민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괘념치 않는 듯한 낯이었다.

    ‘이상해.’

    그레이스는 그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또 속이 울렁거렸다.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을 만큼 지독하게 괴로운 달콤한 기분이었다.

    ⋆★⋆

    그레이스의 말에 따라 최근 게이트를 통한 수입 기록을 확인해 보니, 견과류의 수입량이 늘어 있었다.

    아벨이 말했다.

    “뿌리채소의 경우 종류가 많고, 다양한 영지에서 수확이 가능하며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유통하는 경우도 많아 원산지를 특정 짓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견과류, 그중에서도 아몬드는 서부 지역에서 많이 나오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군.”

    매해 서서히 아몬드를 수입하는 양이 많아지고 있었다.

    벤자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만으로 아르델 백작령이 오염되었다고는 확언할 수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가능성은 높지. 만약 그렇다면 아르델 백작령의 상태는 심각할 거다.”

    “…….”

    “그럼 왜 이제까지 보고가 황실에 올라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군.”

    아르델 백작령에는 직속 게이트가 설치되지 않았으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충분히 게이트 관리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벤자민은 미심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인의 의견을 따르는 게 낫겠군.”

    “하오나 각하.”

    “걱정으로 끝난다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지만, 만약 정말 아르델 백작령이 오염의 근원지였다면 이는 조용히 지나갈 수 없는 문제다. 다른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 또한 그림이 좋지 않지.”

    오염 사태를 담당한 이들 중 작위가 가장 높은 건 벤자민이었다. 아무리 성녀가 함께한다고 해도, 그녀는 사실상 명예직이었기에 그리 책임이 크지 않았다.

    “서부의 수확물 양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던 것은 맞지 않나? 이번 기회에 다른 영지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알겠습니다.”

    아벨은 벤자민의 결정에 별 토 달지 않고 끄덕였다.

    그의 주인 되는 자, 벤자민 펠튼은 한 번 결정하면 그것을 무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성향을 잘 알았기에 아벨은 제 의견을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애초에 벤자민의 선택은 거의 틀리지 않았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예외도 있던가?’

    아벨은 문득 떠올렸다.

    저렇게 올곧게 제 뜻을 관철하는 자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마님에게는 안 통하지.’

    벤자민은 늘 그레이스 앞에서는 제 수를 무르고, 한없이 약해졌다.

    이것은 그레이스만 모르는 공연한 사실이었다.

    잠시 의문을 표한 아벨에게 벤자민이 말했다.

    “이제 그대가 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 있겠군.”

    ⋆★⋆

    결국 그레이스의 제안대로 인원을 나누어 출발하기로 했다.

    아리아는 기차를 타고 지나는 영지를 순차적으로 방문하며 오염 정도를 확인하고 축복을 내리기로 하였다.

    ‘이러면 정말 원작이랑 비슷하긴 하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로서는 안심되는 일이었다.

    ‘내년 차밭의 수확물을 기대할 수 있겠어.’

    무려 성녀의 축복이 조금이나마 닿은 찻잎이었다. 올해는 값을 더 치러 찻잎을 전량 구매했으나, 내년부터는 실제 값어치보다 저렴하게 찻잎을 구입할 수 있을 터였다.

    ‘응응, 완전 잘되었어. 생각보다 결과가 좋아.’

    처음 게이트 관리국에 찾아가 쓰러졌을 때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해당 영지가 아리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내려놓고 행동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인명 피해도 없애고 금전적 이득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클레타와 고아원 사람들도 이제 그쪽으로 거처를 옮기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차밭 쪽에 미리 편지도 보내 두었으니 나중에 클레타가 기차를 타고 도착하면 마중 나와 줄 거야.’

    그레이스는 뿌듯해져,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때, 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네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해?>

    <분명 중간부터 망할걸.>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봐.>

    뱀의 혓바닥처럼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그레이스의 다리를 세게 움켜쥐고 저 아래,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누가 들으면 한없이 유치한 분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레이스는 이상하게 그 말을 먼지 털 듯 쉬이 떨어트릴 수 없었다.

    “…….”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정말 내 선택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그레이스에게 떠올랐다.

    <차라리 따라가지 마.>

    <네가 가 봤자 짐이 될 거 아냐?>

    사실 저 말도 맞았다.

    그레이스가 따라가 봤자 할 것도 없고, 짐만 될 터였다.

    ‘그것도 아주 무거운…….’

    심장이 불안감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돌지 마.’

    느릿한 걸음 소리는 그레이스가 되기 전의 자신이 집에서 아플 때면 듣곤 했던 환청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지?’

    사람 소리와 다른, 다른 걸음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마치…… 말발굽 같은…….’

    이런 환청이 들릴 때가 있었나? 그레이스는 혹시 싶어 고개를 홱 돌렸다.

    “부인.”

    말 한 필을 끌고 나온 벤자민이 활짝 웃으며 고개 돌린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혹시 시간이 되십니까?”

    “시, 시간이요?”

    “네.”

    그는 제 옆에 서 있는 말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승마 연습하지 않겠습니까?”

    “승…… 마 연습이요?”

    “네.”

    그레이스가 연신 느릿한 어조로 말을 따라하듯 되묻는 말에 답답할 성싶었으나 벤자민은 평소와 같은 미소로 그녀를 대했다.

    “아무래도 아르델 백작령은 게이트로 중간까지 가, 기차를 탄다고 한들 시간이 꽤 걸려서 말입니다. 마차도 타야 하니까요.”

    “…….”

    “물론 마차도 이용하긴 할 겁니다만, 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중간부터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

    “귀부인에게 이런 청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을까요?”

    “아, 아뇨.”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