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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2)화 (52/131)
  • 52화

    ‘그보다 샤를 후작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뭐였지?’

    그레이스는 고개를 잠시 기울이다 말았다.

    정말 큰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떠오를 터였다. 그러나 그러지 않다는 건, 그냥 소설에서 몇 번 이름이 거론된 수준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최근 게이트가 더 많은 곳에 설치되고 있나 봐요?”

    “예, 마도구학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니까요. 제국민의 생활이 더욱 풍족해질 테니 좋은 소식이죠.”

    ‘그리고 게이트가 잘된다는 건 그만큼 펠튼 공작가에도 수익이 들어온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

    게이트의 가장 큰 투자자가 펠튼 공작가였으니 말이다. 그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끄덕이며 커피를 마시자 벤자민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네?”

    그레이스는 갑작스레 자신을 달래듯 하는 벤자민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린덴 자작령에는 아직 게이트가 설치되지 않았으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도 세워질 것입니다.”

    “…….”

    그레이스는 왜 갑자기 벤자민이 린덴 자작령의 게이트에 대해 말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벤자민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부인께서 저와 결혼한 후 린덴 자작가를 갈 겨를이 없지 않았습니까.”

    “…….”

    “그으, 예전에는 종종 린덴 자작령에도 게이트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시곤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꽤 예전의 일이지만요…….’ 하며 말을 흐렸다.

    ‘그러니까, 원래의 그레이스는 종종 린덴 자작령에 게이트가 생기길 바랐다는 거구나.’

    그레이스는 빙의 전의 그레이스, 그러니까 펠튼 공작 부인의 드문드문 남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린덴 자작가의 아이들은 영지민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냈고, 그레이스는 그만큼 많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하지만 펠튼 공작 부인이 기억하는 린덴 자작령을 떠올릴 때면 애틋한 마음이 조금 차올랐다.

    ‘고향을 꽤 아꼈나 봐.’

    “……그러니까, 저번에 게이트 관리국에 방문했을 때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벤자민이 왜 이렇게 말을 우물쭈물하면서도 길게 꺼내나 했더니, 그레이스는 그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다.

    ‘내가 게이트 관리국에 간 이유가 친정을 그리워해서라고 생각했구나.’

    결혼 후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건 2년을 내리 가족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펠튼 공작 부인의 우울증은 저택 내 모두가 알 정도로 심각했던 만큼, 가족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았던 거구나.’

    추측이 가능해도 제대로 이유를 묻는 게 정상 아닌가? 싶었지만, 벤자민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그레이스를 설탕공예보다 약한 것처럼 취급했다.

    “염려 끼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레이스는 오해를 굳이 정정해서, 그날 왜 게이트 관리국을 방문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정정한다면 왜 굳이 게이트 관리국을 들렀는지에 대해 말해야 했던 탓이다.

    “조만간 부인께서 괜찮다면 린덴 자작령을 함께 들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찮을 거 같네요. ……가족도 볼 수 있고요.”

    가족이라는 말을 뱉을 때는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아무리 이젠 자신이 그레이스라고 한들, 그들을 만났을 때 ‘펠튼 공작 부인’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던 탓이다.

    그레이스가 커피잔을 매만지고 있자 벤자민이 질문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 맞아.”

    그레이스는 이제야 자신이 이곳에 방문한 목적을 떠올렸다.

    “이번 원정은 게이트로 출발하는 게 맞죠?”

    “예, 중간 지점에 있는 땅까지는 게이트로 출발한 뒤 반으로 나누어 내부와 외곽을 조사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어느 쪽으로 가나요?”

    “일단은 외곽 쪽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편입니다.”

    “희망이요?”

    벤자민은 공작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이 일의 책임자였다.

    그런 그가 ‘희망’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승낙이 떨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신전분들이 대거 동행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벤자민이 굳이 외곽 쪽으로 간다는 건…….’

    “성녀님은 어느 쪽으로 가시나요?”

    “……외곽 쪽입니다.”

    ‘역시.’

    예상대로 벤자민은 아리아와 동행하기를 바랐다.

    ‘이 사람이 아리아를 정말 사랑하건 아니건, 아무튼 아리아의 시야에 계속 들려고 하는 건 맞지.’

    모른다고 답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이를 맞는다고 솔직히 답하는 벤자민의 태도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걸 왜 또 굳이 사실대로 말해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냐고 원망해야 할지.

    어찌 되었건 이기적인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예.”

    벤자민의 표정은 영 난처한, 난관에 봉착한 얼굴이었다.

    “신전 측에서 게이트 사용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신전에서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레이스는 원작 내용을 분명히 기억했다.

    게이트 폭주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게이트로 이동하지 못하게 되자 신전에 있는 몇몇 사제들이 원정에 동행한 벤자민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아리아는 그들을 나무라고, 벤자민의 편이 되어 줬었어.’

    이러한 내용이 원작에 있다는 것은 원작에서는 신전 측이 게이트 사용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쪽의 편리성을 느꼈다는 뜻이다.

    ‘신성력 때문인가?’

    신성력과 마력은 서로 충돌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도구의 힘과만 충돌한다고 할 수 있지만.’

    신전에 속한 사제 중 마력 멀미를 하는 이들이 많았고, 신전에 있는 마도구는 유독 빨리 망가졌다.

    이에 대한 원인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독 사제들에게서만 마력 멀미 증상이 나타났기에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처럼 자리 잡았다.

    다만, 그 마력 멀미 증세를 일으키는 마력 또한 마법사가 자연에서 끌어 쓰는 순수한 힘이 아니라, 마도구에만 제한되었다.

    ‘그래서 마도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마도구사들이 매일 연구 중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력 멀미가 심한 자들은 대부분 아직 신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초보 사제들에 국한되었다.

    서부 지역 오염 사태는 심각한 사안이었기에, 실습하듯이 초보 사제를 많이 데려갈 수는 없었다.

    ‘성녀인 아리아까지 대동한 일인데 함부로 초보를 데려갈 순 없으니까.’

    그동안의 일을 보면 분명 많은 이야기가 달라졌음에도 소설에서 서술되는 큰 사건은 똑같이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축제에서 결국 벤자민과 떨어졌던 것도, 게이트 관리국을 점검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게이트를 쓰지 못하게 되는 것도. 이번에도 결국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부인?”

    “…….”

    그레이스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섬찟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부인?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역시 이번 원정은 하지 않으심이…….”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외에도 다른 굵직한 사건이 뭐가 있더라. 그레이스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생각했다.

    다만, 사건이 아리아 중심이었기에 그레이스로서는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다.

    ‘주인공이 확실한 소설인 만큼, 조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으니까.’

    아리아에게 벌어질 일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을 이루는 것을 펠튼 공작 부인의 기억에 의거해 알 수 있었지만, 제국민으로서 닥칠 미래는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아리아와 실베스터의 연애가 중점이었던 만큼, 아리아에게만 닥치는 사건 사고가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 펠튼 공작 부인, 내 죽음의 원인을 벤자민으로 특정할 수밖에 없던 거고.’

    작은 일은 바꾸더라도 소설에 기록된 일은 바꿀 수 없는 걸까? 이런 추측이 떠올랐다.

    고아원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 속에 나오지 않았으니, 그레이스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보를 이용할 수 있어도, 정보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없다거나.’

    여기까지 생각한 그레이스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벤자민은 그런 그레이스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러한 탓에 현재 원정에 대한 안건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

    벤자민의 보고 아닌 보고에 그레이스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물었다.

    “그…… 제가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두 개, 열 개, 백 개도 괜찮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요.”

    혹시 이 제안을 이미 누가 하지 않았을까, 멍청한 이야기가 아닐까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게이트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가 신성력과 마도구의 마찰 때문이라면, 게이트와 기차 인력으로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성녀님이 기차를 타고 서부 지역을 원정한다는 것이 이미지적으로 좋기도 하잖아요.”

    그레이스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가자 벤자민은 진중한 얼굴로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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