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원래 삶에서도 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정말로 고마워.”
간만에 떠오른 그레이스의 옅은 미소에 이런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던 하녀들이 입을 다물었다.
‘마님이……!’
‘작년부터 한 번도 웃지 않으셨던 마님이!’
‘마님이 웃으셨다!’
어떤 용을 써도 웃기는커녕 상태가 악화되던 그레이스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방 밖을 나오고, 홀로 열심히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를 보필하는 하녀들은 그녀의 긍정적인 변화가 뚜렷한 양상을 보일 때마다 감격스러웠다.
하녀들이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던 때,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럼 각하를 뵈러 가 보아야겠어. 계시려나?”
“아, 네! 주인님께서는 지금 본관에 계실 거예요.”
“간다고 미리 연락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당연하죠!”
“암요! 마님과 주인님은 부부 사이이신걸요!”
“그렇죠!”
하녀들은 그레이스의 마음이 행여 바뀔까, 다급하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 또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모습이 그레이스에게 있어 웃기고 귀여웠다.
‘이상하네.’
보통 이쯤 되면 머릿속을 헤집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었는데,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그럼 얼른 다녀올게.”
“천천히 다녀오세요!”
“본관에서 주무시고 오셔도 괜찮아요.”
“에밀리……!”
“뭐 어때, 둘 다 마님의 집인데.”
‘집.’
또 저 말이 왜 가슴께를 간질이는지.
이혼 조정 기간이 끝난 후에도 답을 찾지 못하면 끝내기로 했으면서 저 단어에 위안받았다.
“금방 다녀올게.”
⋆★⋆
조용한 집무실 내부, 서류를 확인하던 벤자민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거라.”
방금 심부름 보낸 제 보좌관인 줄 알았던 그는 예상외의 손님을 맞이하며 굳었다.
“시, 실례해요?”
그는 순간 자신이 환각이라도 본 듯 얼어붙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 부인?! 여기까지는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 정화 작업에 같이 가게 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아, 아! 그러셨군요. 잠시만요.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더니, 책상 위 서류를 정리했다.
“저기 소파에 앉아 계십시오. 금방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제가 바쁠 때 온 건가요?”
“아뇨, 아닙니다. 마침 딱 쉬려고 했을 때 오셨습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는 소파에 앉으며 벤자민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퍽 당황했는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기하네.’
하지만 그것보다도 벤자민이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라, 그레이스의 이목을 끌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시선을 느끼며 어색하게 물었다.
“부인……? 혹시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그게 아니라 안경 쓰신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
“각하?”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벤자민은 안경을 벗으며 테를 매만졌다. 표정이 얼마나 가라앉았는지,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테를 부러트리는 게 아닐까 그녀는 조금 두려웠다.
“어울,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대답에 활짝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평생 쓰고 다닐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
“굳이 필요 없을 때까지 쓰고 다닐 필요는 없죠. 평소에 맨눈으로 다니신다는 건 시력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그레이스의 대답에 벤자민은 뭐가 웃긴지 크게 웃었다.
“각하?”
“하하, 부인이 옳습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레이스를 향해 그가 말했다.
“부인께서는 언제나 옳은 말씀만 하십니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조금 전의 대화를 아무리 되새겨 보아도, 딱히 웃을 만한 점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크게 웃는 벤자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차를 내오라고 할까요?”
“아, 부탁해요.”
“곁들일 디저트는 조금만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부인께서 식이조절을 하는 것은 알겠으나, 너무 빠른 속도로 살이 빠져서 이대로면 영영 사라질까 겁이 나서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워낙에 그레이스가 운동 부족이었기에 꾸준히 산책하고 식이조절을 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점점 체력도 붙고 있었고, 이제 슬슬 다른 운동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저런 걱정을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괜히 거절하지는 말자.’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내가 우울해지려고 할 때 그런 소리가 더 자주 들리는 것 같으니까.’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의 표정이 더욱 펴지며 사용인을 불렀다.
“차…… 아니다, 커피를 부탁하지.”
“……!”
‘내가 커피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전에도 벤자민이 차 대신 커피를 내왔던 적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의아한 시선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 듯 말했다.
“그, 제가 이번에 원두 사업을 시작할까 해서 말입니다.”
“아하…….”
“그래서 알아본 원두 중 꽤 맛이 좋은 게 있어서 저도 커피에 취미를 들여 볼까 해서요.”
“그렇군요.”
‘우연이었구나.’
그럼 저번에도 역시 우연이었을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저를 신경 써 커피를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면 괜히 부끄러운걸.’
사람의 말은 어지간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덜 신경 쓰이고 스트레스도 안 받았다.
‘저렇게 말했으니까, 그런 의미겠지 뭐.’
가뜩이나 사교계는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사람이 천지라는데, 여기서까지 저 말에 다른 의미가 있겠거니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생각에 빠진 그레이스를 곁눈질하던 벤자민이 말했다.
“그러니 부인께서 이번에 커피를 시음해 보고 수요가 있을지 말씀해 주길 바랍니다.”
“음? 그걸 제가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벤자민은 생긋 웃으며 커피 한 잔을 그레이스 앞으로 내왔다.
이 세계에서 처음 접했던 커피보다 부드럽고 풍요로운 향이 물씬 풍겼다.
‘예전에 마셔 본 것보다 훨씬 좋다.’
이 정도라면 지금 시장에 나온 것 중 제일 고품질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펠튼 공작가는 고급 상품만 취급하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의 위상이 위상인 만큼 저택 내에 있는 모든 것은 최상위 물품이었다. 지난번에 그레이스가 먹은 커피는 그녀에게는 약간 아쉬웠지만, 현 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등품이었을 게 분명했다.
“엄청 좋은 것 같은데요. 물론 제가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으니 필시 모두에게 반응이 좋을 것입니다.”
벤자민은 퍽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가 저리 단정하니 오히려 그레이스가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샤를 소후작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면 기뻐하겠군요.”
“샤를 소후작이요?”
그레이스는 지난번 들었던 이름이 벤자민의 입에서 또 나오자 눈이 조금 커다랗게 뜨였다.
“예, 이 원두는 단디레온 남작가가 소유한 운하를 통해 운송되어 옵니다. 그리고 단디레온 남작가는 소후작 부인의 친가지요.”
“소후작 부부는 사이가 상당히 좋은가 봐요.”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요.”
벤자민이 짧게 소리 내어 웃으며 끄덕였다.
“단디레온 남작령은 각광받는 특산품이랄 게 없어서요. 운하가 큰 자금줄이었는데, 단디레온 운하와 직통으로 이어지는 영지 부근과 제뉴월 왕국에도 최근 게이트가 설치되어 수익이 줄어든 상태였죠.”
“하지만 커피 원두의 경우에는 신선한 게 좋지 않나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배를 통해서 받았던 것의 향이 더 풍미가 좋더군요. 배로 운송되어 오는 중에 숙성이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게이트로 받아 온 것 또한 비슷한 기간을 보관해 본 뒤 마셔 보았음에도, 운하를 통해 받아 온 것을 따라올 수 없다고 벤자민이 이어 말했다.
오가는 데에 시간은 걸리지만 게이트보다 해상이 가격 면으로서는 더욱 절감되었다.
더군다나 보관하는 데에도 비용이 드니, 맛의 차이가 나는 이유를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해상으로 운송하는 게 이득이었다.
‘커피가 고가라서 상류층만 즐기는 기호식품이라면, 오히려 공수해 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게 이미지적으로 좋을 테고.’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시아 왕국.’
전에 저택에 있는 제국령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아이젠 제국 부근에 위치한 왕국이 그려진 지도를 본 적 있었다.
‘단디레온 남작령이 소후작 부인의 본가라면 남동쪽일 거야. 아르시아 왕국도 제국에서 남동쪽으로 가야 하고.’
그리고 아르시아 왕국은 타국과 깊은 교류를 이어 가 본 적 없는 만큼, 게이트도 세워지지 않았다.
‘앞으로 외교하기 시작한다 해도 게이트가 하루아침에 설치되지는 않을 테니까.’
‘단디레온 남작령의 운하를 사용하면 길을 돌아가지 않아서 비용이 절감되고, 이미 벤자민과 거래를 하고 있는 만큼 나에게 부당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 거야.’
한마디로 완벽한 거래처였다.
이렇게 벤자민의 일에 다리 하나 걸쳐서 득을 보는 건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미 가진 걸 이용해서 나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