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0)화 (50/131)

50화

‘이런 인정을 받은 적이 있나?’

원래 삶에서도 거의 이해받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찮은 취급을 했다.

‘거기서도 외모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은데…….’

하도 끔찍했던 일이 가득해 빙의 전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현 상황에 슬픈 기억을 덤으로 얹고 싶진 않았던 탓이다.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았구나.’

새삼 이 사실을 떠올리는 그레이스는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제 말에 기분이라도 상하셨습니까?”

벤자민은 갑자기 침묵하는 그레이스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레이스는 아차, 하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게 아니고, 각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엇인가요? 부인의 부탁이라면 할 수 있는 한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이번 오염 지역 파견에 저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도와줄 것 같이 자신하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질문에 입을 딱 다물며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오염 지역으로 가는 건 많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일이기도 하니, 부인의 몸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각하도 아시잖아요?”

그레이스가 무엇을 아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음에도 벤자민은 그 의미를 깨닫고 눈썹만 아래로 늘였다.

“제가 같이 가는 것이 나을 거예요.”

“그래도…….”

“그리고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벤자민은 영 걱정되는 시선을 지우지 못하다, ‘답답하다’는 그레이스의 말에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이 시기에 여행은 너무 거창하니까요. 그리고 임무인 만큼 사람이 많아서 안전할 거예요. 바깥바람을 쐬기에 좋잖아요.”

“…….”

“폐를 끼치진 않을게요. 할 수 있다면 돕고 싶어요.”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하는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안 되려나?’

아무리 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레이스가 별다른 능력도 없는 귀부인인 이상 짐이 안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

그레이스를 향한 좋지 않은 시선은 많았다. 지금 그녀가 간접적으로 겪은 것뿐 아니라, 원작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있는다고 사라질 악평이 아니었다. 계속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레이스가 행동해서 하나씩 고쳐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서부 오염 지역으로 함께 가는 건 꽤 좋은 계획이었다. 보통 귀부인들은 험한 곳엔 직접 가지 않고 기부금만 보내었으니까.

벤자민은 한참 고민하다가 작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리해야지요.”

수락의 의미였다.

⋆★⋆

“마님, 양산을 챙기는 게 좋겠죠?”

“마님, 이건 어떤가요?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요.”

“마님…….”

서부의 최외곽으로 가도 된다는 벤자민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그레이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걸 둘이서 독단으로 정해도 되나 싶었지만, 황실에서는 기꺼이 허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혼 정정 기간이라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일종의 부부 봉사 활동으로 분류되어, 오히려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서 다른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못된 생각까지 들 정도로, 너무 간편했다.

하지만 그 뒤로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아 정신없었다.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툭하면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던 소리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바쁜 게 좋을지도.’

정신이 피로한 것보다 육체가 힘든 게 몇 배는 나았다.

별관의 사용인들이 물건을 이것저것 가져와 그레이스에게 보여 주었다. 전부 그레이스의 먼 여정을 돕기 위한 것들이었다.

‘왜 귀부인들은 직접 재난 장소로 가지 않는지 이유를 알겠어.’

귀부인들은 품위 유지가 필수적인 만큼, 멀리 나갈 때 챙겨야 할 물건이 많았다.

하지만 구호 활동을 하기 위해 가는 곳에까지 개인 물품을 많이 가져가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될 뿐이다.

“이렇게 많이 챙길 수는 없어. 짐이 될 테니까.”

“그래도요…….”

“그래도 중간 지점까지는 게이트를 타고 가지 않나요? 게이트를 소유한 영지가 있으니까요.”

“맞아요. 게이트를 타면 이 정도는 짐도 아니라고요.”

“그건 그렇겠지만…….”

그레이스는 원작 전개를 떠올렸다. 게이트 관리국에 갑자기 사고가 터져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저번에 그 쇼를 벌이긴 한 거지만.’

어째서인지 그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 같았다.

‘원작은 평화롭게 흘러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

여주인공에게 큰 위협이 없었기에 평화로운 사건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지,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것투성이였다.

‘아무튼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조심해야 하는 거고.’

“게이트 관리국은 상태 괜찮아?”

“네! 걱정 마세요. 이번에 확인에 확인을 거쳐 절대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주인님께서 확인하셨어요.”

“그럼요. 절대로 안전할 거예요.”

“암요! 우리 주인님이 누구신데요, 마님의 안전을 그 누구보다 신경 쓰시잖아요.”

그레이스는 그저 넌지시 물었는데 근처에 있던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한 마디씩 올렸다.

그들은 계속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그레이스는 그들의 행동이 꽤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그렇구나.”

“그럼요! 마님께서는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어차피 여정 동안 좋으나 싫으나 성녀이자 여주인공인 아리아와 함께한다.

성녀는 이 세상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알려졌고, 아리아는 주인공인 만큼 정말로 사랑받았다.

그냥 사랑받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의 총애를 받는 수준이었으며, 아리아에게 위협이 되는 건 후에 그릇된 집착에 눈을 떠 폭주하는 벤자민뿐이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나의 위협…… 후보지.’

벤자민의 다정함 속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순간 때문에 여전히 후보군이었다.

‘이번 활동을 시작으로 발을 넓히면 알게 될 수도 있어.’

정말 나를 죽이려는 자가 있는지, 있다면 벤자민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아니면 이 공작가에 얽힌 일 때문인지.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살기 위해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사는 게 우선이었다.

‘나에 대한 비난은 많지만 적이 많은 건 아니니까.’

그레이스에게 진짜 악의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그레이스가 바깥 활동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아군을 만들면 그레이스는 자신을 노리는 범인의 동향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의문의 병사는 불가능하겠지.’

음,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름 괜찮아.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녀들의 시중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게이트를 사용하게 되더라도 짐은 적은 게 좋을 거야. 놀러 가는 게 아니니까.”

그레이스의 엄한 중재에 하녀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동행하기로 한 샐리만 고개를 끄덕이곤 수북이 쌓인 물건을 정돈했다.

“제가 옆에서 열심히 보좌해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샐리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뭘요. 좀 더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인걸요.”

무려 공작 부인이나 되는 그레이스였지만 시녀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녀와 시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랐고, 샐리는 이를 충당해 주지 못해 미안한 듯했다.

사실 다른 하녀들도 이에 대해 신경 쓰이는지 유독 난리 치며 그레이스의 물건을 챙겼다.

거기까지 가서 기죽지 말란 의미였다.

“걱정 마세요. 마님이 거기서 최고일 테니까요.”

“최고? 무엇으로……?”

“그 무엇이든지요!”

“그럼요! 그리고 반트린 경도 함께하기로 했어요. 아무도 마님을 함부로 건들지 못할 거예요!”

‘뭘…… 건드리는데?’

아무리 그레이스의 평이 좋지 않아도 펠튼 공작 부인이었다.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평가되었음에도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고,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바로 항의할 이였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래, 그렇게 강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기는 하지……. 그레이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뺨을 매만졌다.

“아무튼 기죽지 마세요. 마님이 최고니까요.”

“암요. 가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마님 탓은 아니에요.”

그레이스는 갑자기 몰려드는 전폭적인 지지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왜 이러지?’

평소에도 그레이스의 눈치를 많이 살피던 이들이지만, 이렇게까지 폭주한 적은 없었다.

그레이스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든 그러지 못하든 간에 하녀들은 눈을 빛내며 그레이스를 응원했다.

“고, 고마워.”

결국 그레이스는 떨떠름하게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 혹시 아리아 때문인가?’

다들 입 다물고 있지만 벤자민의 행태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번에 벤자민이 신전의 활동을 도와 론델 운하로 갔을 적, 그레이스에게 보고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그래서구나.’

어쩐지 이유를 얼핏 알 것도 같았지만, 그레이스를 향해 아군 100%의 시선을 보내오는 하녀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신을 귀찮아할 거라고 추측했던 이들이지만, 언제나 그레이스를 지지했다.

자신의 편이 있다는 건 언제나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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